도망가는 곳에 미래는 없다
한국사회도 이제 긴 불황의 터널에 진입했다. 저성장의 늪은 건실한 생산력과 막대한 경제규모를 자랑하는 선진국이라도 피해 갈 수 없다. 선진국 말석의 대한민국은 앞으로 꽤 오랜 시간 불황과 동행해야 할 것이다. 일본은 선진국형 사회문제를 다양하게 겪었다. 유럽이나 북미 같은 다민족국가가 아니라 한국과 같은 단일민족 사회이므로 유사성이 많다.
고속성장, 경제버블, 경제불황과 저성장, 저출산고령화, 천재지변, 학교와 직장 내 괴롭힘, 은둔형 외톨이와 묻지마살인까지. 일본이 지난 30년간 겪은 것들이다. 2023년의 한국 사회는 비슷한 사회문제로 인해 심각한 몸살을 앓고 있다. 사회문제는 완치되지 않는 만성질환이다. 발생하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한 번 발병하면 대응하면서 관리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뿌리 뽑거나 없앨 수 없다.
앞서 거론한 일본사회의 문제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위기대응과 안전망을 통해 간신히 확산과 악화를 막는 수준이다. 초강대국인 미국조차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코로나 이후 급격하게 늘어난 한국의 사회문제들은 대부분 정신심리적 문제를 근간으로 한다. 다각적으로 원인을 분석하고 있지만 정답은 정해져 있다. 사회가 병들면 사람도 망가진다. 뒤틀린 인간들이 사회 속에 모여있으면 반드시 문제가 발생한다. 그뿐이다.
최근 급증하는 한국 사회의 문제들을 목격하고 오랜만에 인간증발을 다시 읽었다. 일본 사회의 실종 문제를 다룬 <인간증발> 은 몇 년 전에 흥미롭게 본 책이다. 2010년대 일본은 묻지마살인과 은둔형 외톨이 그리고 실종이라는 사회적 문제로 고통받았다. 한국 역시 이 세 가지 난제를 풀지 못해 큰 혼란과 불안을 경험하게 될 것 같다. 증발현상은 어느 날 갑자기 삶을 내팽개치고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실종과 비슷해 보이지만 스스로 자취를 감춘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사회적 실패를 책임질 수 없는 사람들이 주로 증발을 선택했다. 막대한 빚이나 약물과 도박 같은 중독문제가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원인은 ‘좌절’이었다. 더 이상 노력해도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절망감, 남들보다 뒤처진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열패감,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열등감. 이런 부정적인 감정이 누적되다 한계에 직면하는 순간 내면의 심지는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사회적인 풍토 역시 증발과 이탈을 가속화시켰다. 삶의 기준선이 존재하고 예외는 결코 인정하지 않는 경직된 인식은 일본 사회의 병폐나 마찬가지다. 오답처리 된 사람들은 머리 위에 찍힌 낙인을 뗄 수 없었다. 싸늘한 시선을 느끼며 보이지 않는 해법을 찾다 지치면 결국 사회를 떠나버린다. 더 이상 서있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부끄러운 존재로 여기고 주변 사람들은 하나 둘 피한다.
패배자라는 이름표가 달린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인 인식은 그림자와 같아서 들러붙으면 떨어지지 않는다. 물론 놀라운 성과를 내면서 상황을 반전시키는 역전 드라마의 주인공도 있다. 어디까지나 극소수에게만 해당되는 꿈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기준선 이하의 인간들에게 미래는 사라진다. 이래도 삶이고 저래도 인생이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다양성은 패배와 동의어일 뿐이다. 이런 현실은 과연 일본에만 해당되는 것일까? 한국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 사회 속에는 상당한 수의 잠재적 위험군이 존재할 것이다. SNS 속 사람들은 자랑하는데 여념이 없다. 그러나 내면은 초라하다. 남과 비교하고 더 잘난 사람의 성공에 좌절한다. 타인의 시선에 신경 쓰면서 미움받지 않기 위해 열심히 눈치를 본다.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나은 사람 더 좋은 자리에 대한 욕망을 숨기고 산다. 그래서 늘 현실이라는 행복을 즐기지 못하고 그저 언젠가를 꿈꾼다.
당첨되지 않을 복권을 사고 여행을 도피처 삼아 매일매일 버틴다. 연예인과 드라마는 마취제처럼 현실을 잊게 만들어준다. 중독의 유혹에 빠져 삶을 잃어버리는 사람도 이제 흔해졌다. 모두 잘 살 수 없고 성공은 소수에게만 해당된다는 것을 알지만 사회는 변하지 않는다. 성공의 정의는 여전히 똑같다. 복수정답은 인정하지 않는다. 경쟁은 강박을 낳고 구성원 간의 신뢰를 저해한다. 사회와 부모세대는 경쟁을 부추기고 성공을 강요했다.
여전히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명문대에 보내기 위해 노후를 포기한다. 하라는 대로 살다 보면 대학을 나와 사회인이 되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몰라서 방황한다. 남들처럼 노력하고 남들만큼 고군분투해도 성공의 기준선 안에 들어가는 일은 쉽지 않다. 애초에 서로의 환경이 다르고 살아온 배경이 다르고 시작한 출발선도 다르다. 격차와 차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다. 내 탓을 하거나 남 탓을 하면서 다들 망가진다. 머리부터 심장까지 천천히.
심리적으로 조금씩 내몰리다 보면 두 가지 길을 놓고 고민한다. 문을 걸어 잠그고 들어앉을 것인지 문을 부수고 도망칠 것인지. 마음이 정해지면 실행으로 옮긴다. 은둔형 외톨이는 <자기만의 방>으로 숨는다. 자발적인 실종을 택하는 사람들은 <혼자만의 낙원>을 찾아 떠난다. 그러나 전자는 내면세계로 도망가는 것이고 후자는 나를 아는 사람들로부터 도피하는 것에 불과하다. 어느 쪽이든 도망가는 곳에 미래는 없다.
사회에서 스스로를 배제한다는 점에서 은둔과 도피는 비슷한 면이 있다.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증발을 선택한 지인이 기억난다. 자기가 더 이상 서있을 곳이 없다면서 핸드폰을 없애고 사라져 버렸다. 여러 번의 실패를 거듭하면서 높은 이상을 실현하지 못한 친구는 도피를 선택했다. 본인은 실패자인데 주변 사람들의 성공을 보는 것이 고통스럽다면서 해외로 떠나버렸다.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는다. 한계에 직면하기 직전까지 본심이 드러내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가까운 이들은 은둔과 도피라는 증발현상을 목격하면 충격에 휩싸인다.
갑작스러운 비극이라고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아니다. 징후와 전조는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한국 사람들은 말은 잘하지만 감정은 속에 담아놓고 잘 꺼내질 않는다. 진심을 표현하는 것을 다들 힘들어한다. 그러나 마음은 전달하지 않으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주변에 구조신호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과연 SOS를 알아차리고 위기에 대응할 수 있을까? 앞서 일본이 겪었던 피해사례를 보고 배운 것이 있을까? 불황이 만든 긴 터널 속 어둠은 사람들의 내면부터 집어삼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