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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Mar 19. 2024

모두가 가난해지는 세상

빈부격차가 커질수록 심리적인 빈곤은 증가한다

 경제가 어렵다는 말을 건네는 것은 이제 안부인사로 굳어진 것 같다. 치솟은 밥상물가나 기름값을 화제에 올리는 일도 점점 늘고 있다. 갈수록 살기가 힘들어진다는 말을 서민들은 입버릇처럼 달고 산다. 계층을 벗어나지 않는 한 처지는 늘 그대로다. 지나간 10년간 나아진 것이 없다면 앞으로 10년이 지나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환경은 한 번 고착화되면 발버둥 치는 정도로는 벗어날 수 없다. 태생의 한계를 이겨낸 사람들을 괜히 위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간절하게 성공을 꿈꾸지만 가장 절실한 사람들만 목표를 달성한다. 간절함과 절실함은 하늘과 땅 차이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태어난 환경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기 힘들다는 말버릇을 평생 달고 산다. 빈부격차와 양극화는 유사 이래 단 한 번도 해결된 적이 없다. 경제성장을 통해서 절대적 빈곤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다. 그러나 경제가 발전하면서 나타나는 상대적 빈곤 문제를 풀 방법은 없다. 정치의 문제도 아니고 제도의 실패도 아니다. 인간의 본성이 원인이다.


 일반적인 빈곤이 생존의 문제라면 상대적 빈곤은 욕망의 문제다. 상류층이나 부유층에 비해 못 산다는 열등감은 해소할 수 없다. 미디어와 SNS의 영향으로 상대적 빈곤은 이제 심리적 양극화로 발전했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마음까지 가난해지는 것이다. 살아가는 게 갈수록 힘들다고 토로하는 서민들은 걱정과 불안을 떠안고 산다. 오르는 물가가 무섭고 생활에 쪼들리는 것이 늘 두렵다. 처참한 노후는 떠올리고 싶지도 않고 잘 사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극심한 박탈감에 시달리게 된다.


 대부분의 서민들은 피땀 흘려가며 정말 열심히 일한다. 첫차를 타보면 알 수 있다. 새벽부터 나가서 하루종일 노동하는 성실함의 표본이 바로 서민들이다. 처음부터 바닥 아래 지하실에서 시작한 인생이라면 남을 흘겨볼 이유도 없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는데 늘 제자리다. 포기한 적도 없고 남들만큼 살아보려고 발버둥 쳤지만 항상 같은 위치다. 앞으로 전혀 나아가질 못한다. 상황이 나아질 기미 역시 보이지 않는다. 여러 가지 이유가 발목을 잡는다.


 피붙이가 장애물이 되기도 하고 사람을 잘못 만나 큰 타격을 입기도 한다. 한 번이라도 잘못된 선택을 하면 기회는 영영 사라진다. 서민이나 빈민은 패자부활전이 없다. 한 번 미끄러지면 내리막길이고 고꾸라지면 벼랑 끝에 내몰리게 된다. 그런 사례들을 보면서 몸을 사리다 기회를 놓치기도 한다. 안빈낙도는 신분질서가 존재했던 과거의 산물이다. 같은 계급에 속한 사람들은 전부 똑같은 삶을 살다 죽었다. 그래서 억울할 것이 없었다.


 평균수명도 짧고 애초에 누릴 것도 적은 시대였다. 삼시세끼 챙겨 먹고 자식 낳고 살면 행복한 인생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경제가 발전하면서 행복의 본질이나 정의가 달라졌다. 비슷한 계층에서도 삶의 양상이 판이하게 달라지는 세상이 등장했다.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한 주변 사람이 치고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열등감이 확산됐다. 남들보다 잘살아야 한다는 경쟁논리가 상식이 되면서 차이는 차별의 근거로 자리 잡았다. 열심히 노력해도 더 애쓴 사람들이 승자가 되면 노력은 패배자의 변명으로 전락한다.


 나이가 들수록 격차는 더 심해진다. 청년기의 격차는 중장년이 되면 대물림으로 이어졌다. 남들만큼 살 수 없다는 열등감과 남들처럼 해내지 못했다는 열패감은 부정적인 감정을 만들어낸다. 여기서부터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분화된다. 성공만 인생의 분기점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가난 역시 삶의 방향성을 나누는 일종의 갈림길이다. 일부는 분노와 증오를 품고 남 탓을 일삼는다. 신세한탄을 늘어놓다 자기 연민의 늪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중독이나 한탕에 빠져서 하루살이 인생으로 전락하기도 하고 무기력 속에서 자포자기하는 사례도 있다. 경제적인 빈곤은 심리적인 빈곤으로 전이될 가능성이 높다. 본인이 속한 계층의 습성이 몸에 배는 것이다. 인간 자체가 가난해진다. 정신력의 문제나 부족한 노력은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다. 마음이 가난해지면 상상력이 빈곤해진다. 본인의 가능성을 신뢰할 수도 없고 미래에 대한 큰 그림 역시 그릴 수 없다. 자신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사라진다. 자신감과 자존감을 모두 잃어버리면 인간은 껍데기만 남는다. 그 사이 빈곤은 사람의 본성을 완전히 집어삼킨다.


 인간은 의지의 동물이다. 본성이 빈곤에 잠식당하면 의지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자립이나 성장에 대한 욕구 역시 의지와 직결된다. 극심한 심리적인 빈곤 상태에 빠지면 되고 싶은 것도 없고 이루고 싶은 목표도 사라진다. 아무리 예산을 늘리고 복지를 통해 지원한다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정서적인 빈곤상태에 빠진 이들에게 자립의지를 심어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회문제는 골든타임을 놓치면 난이도가 급격하게 올라간다.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마스터키로 취급받는 돈도 힘을 잃는다.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을 비롯한 모든 선진국들이 극심한 양극화로 인한 정서적 빈곤문제에 시달리고 있다. 복지천국으로 불리던 유럽은 저성장과 사회갈등에 시름하고 있다. 자유경제의 무한한 성장을 신뢰했던 팍스아메리카나가 만든 극심한 빈부격차는 사회불안을 가중시켰다. 심리적인 빈곤은 지속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무능한 일부 계층의 문제로 치부할만한 수준을 이미 넘어섰다. 부과 권력은 필연적으로 특정 계층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도 그랬고 사회주의도 똑같았다. 양극화는 역사적으로 늘 존재했고 영원히 사라질 수 없다.


 동전의 양면처럼 양극화는 필연적으로 사회 전체의 심리적인 빈곤을 증가시킨다. 기술의 발전으로 여기에 가속도까지 붙었다.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빈부격차는 사상최고점을 찍었다. 무한경쟁사회는 가고 완전한 승자독식시대가 도래했다. 심리적인 빈곤은 결코 취약계층의 문제가 아니다. 이제 모두가 가난해진다. 평범한 사람들은 비교에서 발생한 열등감 때문에 상대적 빈곤에 빠진다. 태생부터 가난한 이들은 심리적인 빈곤의 위험에 더 쉽게 노출된다.


 풍요로운 중상류층도 안전한 것은 아니다. 상대적으로 덜 위험할 뿐이다. 문제가 발생하면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이 많은 만큼 더 쉽게 중독에 빠질 수 있다.  

살기 힘든 시대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늘 그랬듯이 그냥 산다. 절망이나 고통에 면역력을 가진 사람은 없다. 괴로워하고 발버둥 치다 보면 시간이 지나간다. 그러다 보면 뇌는 고통스러운 순간의 기억을 망각한다. 해결되거나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상처 위의 통증은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다. 망각이 문제를 일시적으로 덮는 것뿐이다.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은 없다. 그래서 인간은 죽을 때까지 불안과 걱정에 시달린다. 망각은 마취제에 불과하다. 고통을 잠시 잊었을 뿐 해방된 것은 아니다. 심리적인 빈곤은 계속해서 누적될 것이다. 모두 영혼이 가난해진다. 다들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있다. 폭발이 한 번 시작되면 연쇄반응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시간이 가져다주는 망각을 받아들여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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