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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Mar 08. 2024

아무것도 하기 싫은 사람들

삶의 목표와 의지를 상실한 무기력층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직업을 가질 생각도 없고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려는 의지도 없다. 목표도 없고 이루고 싶은 소망도 없다. 삶이 무의미한 이들은 이른바 ‘무기력층’이다. 범죄를 저지르거나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국가의 성장과 발전에 기여하는 면도 없다. 노동을 하지 않으므로 생산도 납세도 하지 않는다.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본사회의 프리터(Freeter)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경쟁에 시달리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선택했던 프리터. 아르바이트나 비정규직에 종사하면서 낭만을 쫓았던 프리터는 한국의 욜로족과 비슷한 면을 갖고 있었다. 불황과 저성장의 늪으로 빠지면서 프리터의 낭만은 사라졌지만 그들은 노동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번듯하게 살 수는 없지만 적어도 사람답게 살려는 의지는 갖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한국 사회에서 늘어나고 있는 무기력층은 살고 싶은 의지를 상실한 사람들이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으므로 노동을 통해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없다. 돈을 벌 이유도 없고 돈을 모을 만한 동기 역시 없다. 그들은 경제활동이 수반하는 스트레스를 회피하고 사회생활에서 발생하는 경쟁을 거부한다. 평범하게 살아가려면 생각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성공이나 실패를 가릴 필요 없이 살기 위해서는 선택하면서 앞으로 계속해서 나아가야 한다. 이 과정이 그들에게는 피곤하고 무의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을 하고 가정을 이룰 생각도 없다. 혼자서도 충분히 고통스럽고 피곤한데 여럿이 고생할 이유는 없다고 믿는다. 이런 가치관이 처음 등장했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무시했다. 사회부적응자들을 신경 쓸 필요 없다는 여론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지난  년간 돈이 넘쳐나는 시대였다. 코로나 특수가 만들어낸 유동성은 자산 가격을 폭등시켰다. 너도 나도 대출을 받아서 집과 건물을 샀다. 주식 청약에 수백조 원의 돈이 몰렸고 주식이든 집값이든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러나 돈잔치가 폭락으로 끝나자 현실과 진실의 온도차는 크게 벌어졌다. 하락장이 끝나고 반등이 찾아왔지만 부자가 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탐욕은   탐욕을 낳고 위험은 그저   위험을 부를 뿐이다.


 양극화는 매년 최고점을 갱신하고 있다. 물가는 폭발적으로 우상향 하고 있지만 사람들의 삶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AI특수와 비트코인 폭등이 주식시장에 활황을 가져왔으나 천문학적인 부채는 사라지지 않았다. 월급이 올라도 생활비는 그보다  크게 뛰어올랐다. 살기 힘든 인플레이션 시대는 약자들에게 절망과 상실감 그리고 깊은 실망감을 안겨준다. 고물가와 불황이 만들어낸 저성장시대가 오면 모두가 살기 힘들어진다.


 중산층은 서민이 되고 서민은 빈민이 된다. 처음부터 바닥에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의지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노력하고  흘려봐야 바닥이라면 노동은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결과가 정해져 있는 인생을 열심히 살려는 인간은 없다. 계속해서 늘어나는 무기력층은 끝이 분명한 레이스를 시작조차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들은 기득권과 상류층의 노예로  생각이 없다. 패배자의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그들에게는 일종의 보이콧이다.


 형태만 본다면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불복종과 비슷하다. 물론 근본적인 정신은 판이하게 다르다. 노력과 가능성을 부정하는 그들은 성장의지와 삶의 목표가 없다. 살아갈 이유 자체를 잃어버린 인간은 점점 무감각하게 변한다. 패배자라는 낙인을 신경 쓰지 않는 데다 실패자라는 비난을 들어도 개의치 않는다. 의식을 개선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근로의욕은 삶의 의지와 직결된다. 무기력한 이들은 일하려 하지 않는다.


 무기력층은 사회가 부양해야 하는 국가공동체의 ‘살아있는 부채’가 된다. 부정적인 관념은 비슷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빠르게 확산된다. 삶의 만족도가 낮을수록 우울감이나 좌절감에 전염될 가능성이 높다. 무기력층의 연령대는 청년층부터 중장년층까지 다양한 편이다. 한국 사회 전반에 형성된 우울감은 나이에 상관없이 열패감과 열등감을 만들어내고 있다.


 남보다 못 산다는 생각이 불행하다는 인식으로 전환되면 병이 찾아온다. 한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자 엄연한 선진국이다. 빈곤을 벗어난 지 오래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상대적인 빈곤 앞에 여전히 취약하다. 남들보다 부족하고 남들처럼 못 산다는 생각은 사람들을 병들게 만든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의지를 상실하고 무기력해진다. 상대적 박탈감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양극화와 불황은 노동의욕을 점점 더 떨어뜨린다.


 경쟁은 갈수록 더 심화되고 행복도는 계속해서 하락하는 중이다. 한국 사회의 높은 자살률과 노인빈곤 그리고 고독사문제는 몇 년째 세계 최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상대적인 빈곤은 심리적인 빈곤으로 전이된 상태다. 화려한 경제적 성과와 찬란한 K컬처는 겉모습에 불과하다. 병든 한국 사회의 환부는 뿌리까지 깊이 썩어버렸다. 국가의 고질병은 국민들에게 전염된다. 삶의 만족도가 바닥을 치는 공동체에 이상증상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사람의 성격이나 지위 그리고 환경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문제가 나타난다. 무기력층과 은둔형 외톨이 그리고 증오범죄는 이상증상의 대표적인 유형이라고 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늘 강세를 보였던 자살은 거의 사회적인 선택처럼 여겨지는 분위기다. 살아서 등을 돌리든 죽어서 세상을 등지든 중도탈락자들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인구감소는 결국 현실이 되었다. 국가소멸이라는 초유의 위기 속에서 자진해서 기권하는 사람들을 방치할 수는 없다. 개인의 책임이나 선택으로 치부하는 관점을 이제는 변화시켜야 하지 않을까? 남의 일이 아니다. 머지않아 내 지인 혹은 가족 아니면 내 일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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