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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May 22. 2024

갑질의 나라

브레이크 없는 가해자 안전벨트 없는 피해자

 대한민국 사회의 정서적인 특징을 설명하는데 빠질 수 없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정과 눈치 그리고 갑질이다. 1인가구가 늘고 전통적인 가족구성이 무너지면서 이웃 간의 정은 거의 자취를 감췄다. 아파트 단지와 소득 수준에 따라 나뉘는 커뮤니티 문화는 계급이나 마찬가지다. 정을 대신해서 사회경제적 신분이 자리 잡았다. 눈치는 공감능력이라는 단어로 치환됐다. 다분히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표현이므로 합리화를 위한 공방일체의 무기로 쓰인다.


 정과 눈치는 본래의 의미가 많이 변질되었지만 갑질은 예외다. 시간이 흐를수록 갑질의 유형이 다양해지면서 결국 사회문제가 됐다. 갑질(gapjil)은 옥스퍼드 사전에 등재된 한국의 고유한 사회현상이다. 영어로 번역할 수 없는 문화적 특수성을 담았다는 점에서 갑질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갑질을 윤리의식이나 도덕성의 차원에서 들여다볼 시기는 이미 지났다. 갑질로 인해 자살하는 사람이 매년 증가하고 있다. 인명피해가 발생한다는 점에서 갑질은 엄연한 사회적 병폐다.


 갑질을 일삼는 이들은 ‘내가 돈을 주는데 뭐가 문제냐?’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비용을 지불하면 그만이라는 발상은 다분히 반사회적인 사고방식이다. 서비스는 돈과 등가교환 된다. 돈이 더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을 하대할 수 없다. 받는 것이 아니라 교환하는 구조다. 애초에 우열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평등한 입장에서 동등하게 거래하는 것이다. 상거래는 사람을 비난하고 인신공격해도 된다는 내용을 포함하지 않는다. 인간성을 훼손하는 계약조건이 들어있다면 법적 처벌을 받아야만 한다.


 제품이나 고객 응대 서비스의 품질이 문제가 있다면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하면 된다. 공식절차를 통해 업체로부터 사과와 배상을 받을  있다. 그러나 갑질을 하는 이들은 보상과 개선을 고려하지 않는다. 악성 민원은 애초에 요구하는 내용이 없다. 갑질을 일삼는 악질은 문제해결에 전혀 관심이 없다. 마음대로 하대하고 정서적으로 학대하고 싶은 욕구를 충족하는데 열을 올릴 뿐이다. 갑질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스트레스를 풀려는 목적일 수도 있고 상하관계를 통해 상대를 통제하려는 시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유가 어떠하든 갑질이 정서적 폭력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갑질은 대상을 가려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주도면밀하고 악의적인 범죄다. 강자에게 갑질을 하는 사례는 보고 되지 않았다. 갑질은 약자에게 행하는 사회구조적인 폭력이다. 상대를 물색하고 분석해서 우위에 있다는 판단이 서야만 갑질을 저지른다. 위계질서를 악용하고 거래나 계약으로 얽힌 관계를 이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피해자는 갑질로 인한 정신적인 고통을 주변에 토로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만큼 괴롭힘의 빈도와 강도는 지속적으로 증가한다. 가해자는 브레이크가 없고 피해자는 안전벨트가 없다. 사고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정서적인 폭력으로 인해 발생하는 정신적인 외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심각성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본인조차 내면의 깊은 상처를 발견하려면 큰 결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문제를 인지하더라도 치료와 도움을 받으려면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정작 가해자 본인은 이런 심각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피해자가 고통을 호소하면 더 심한 공격을 일삼는다. 열정이나 근성을 운운하면서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익숙하게 가스라이팅을 반복한다. 협박과 폭언을 쏟아내면서 지위와 권위로 피해자를 찍어 누르려고 한다.


 갑질의 핵심은 비인간화다. 상대방과 자신을 인간이라는 동일선상에 두지 않는다. 피해자는 열등한 존재이므로 얼마든지 비난하고 조롱해도 된다고 맘대로 판단한다. 게다가 갑질을 일삼는 가해자는 본인이 피해자와 비교할 수 없이 우월한 존재라고 착각한다. 심지어 피해자를 지도하고 도와줬다는 서사를 부여하면서 행동에 정당성마저 부여한다. 잘못된 행동이 외부로 유출되어 고발과 비난을 당하면 오히려 스스로를 피해자로 포장한다. 위신과 체면 때문에 끝내 사과하더라도 진심으로 뉘우치는 경우는 드물다.


 매년 갑질을 일삼았다 폭로당하는 유명인들이 속출한다. 대중적인 이미지가 친숙할수록 그들이 저지른 갑질은 정반대로 비정하고 끔찍하다. 언어폭력은 기본이고 가스라이팅과 정서적 학대 심지어 폭행까지 저지른다. 재력과 권력을 모두 가진 유명인이 저지르는 갑질은 피해자에게 씻을 수 없는 큰 트라우마를 남긴다. 갑질이 일상화된 만큼 그들은 심각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유명인과 함께 일했던 주변인들의 폭로는 언론을 타고 일파만파 번진다. 그동안 쌓아온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다.


 상하관계뿐만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에서도 얼마든지 갑질이 발생할 수 있다. 학교폭력이나 직장 내 괴롭힘 역시 피해자의 인격을 유린하는 갑질이다. 부당한 요구를 하거나 루머를 퍼뜨리거나 인신공격을 일삼는 점에서 정서적 폭력은 모두 유사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폭력성이 한국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용어를 변경해야 한다. 갑질이라는 단어를 인격폭행이라고 바꿔 불러야 할 것 같다. 한국 사회는 심각한 정신적 외상을 야기하는 심리적인 학대에 여전히 관대하다. 언어는 문제인식에 대한 국민들의 수준을 보여준다. 폭력을 폭력으로 부르지 않는 현실을 보면 우리 사회의 윤리의식이 얼마나 처참한지 알 수 있다.


 정상참작은 쌍방과실이 존재할 때나 거론할 수 있다. 갑질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선이 뚜렷하게 나뉘어있다. 일방적인 폭언과 인신공격이 지속된다는 점에서 가해자의 입장을 고려할만한 여지는 없다. 피해자에게 끼치는 정신적 외상의 정도로 보자면 갑질은 심각한 정서적 폭력이다. 변명과 합리화 따위는 통하지 않는 매우 죄질이 나쁜 범죄다. 그럴듯한 설명과 그럴싸한 변명을 늘어놓는다고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가해자 입에서 어떤 이유가 나와도 해명이 될 수 없다. 이름을 바꿔도 폭력은 결국 폭력이다. 범죄에 붙는 이름표는 납득이 아니라 처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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