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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May 25. 2024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학교폭력과 직장 내 괴롭힘 그리고 갑질

 언어는 사람들의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한국 사회는 현실을 직시하는 용기가 없다. 자살이라는 표현을 극단적 선택이라고 부르거나 정서적인 폭력과 비인격적인 학대를 동반한 인신공격을 갑질이나 괴롭힘으로 통칭한다. 비겁한 화법상식처럼 자리 잡았다.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문제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단어를 정의하고 실태를 파헤쳐서 문제를 규정해야 한다. 그러나 인격을 짓밟는 폭언과 트라우마를 동반하는 학대를 칭하는 제대로  단어는 없다.


 한국 사회는 폭력에 관해서 회피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불편한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돌려 말하거나 신조어를 활용해서 사실을 외면한다. 제대로 된 표현을 사용하면 주변에서 눈치를 주거나 발언을 제지당한다. 덮어둔 채 넘어가려는 비겁한 집단무의식이 상식으로 통용되는 상태다. 뉴스에 보도되는 사건에 관해서는 다들 공분하고 손가락질하지만 변하는 것은 없다. 남의 불행을 가십거리로 소비하고 사건사고는 안주거리로 씹을 뿐이다. 정서적 폭력과 학대를 남일로 여기고 거북한 진실을 외면하고 다른 세상 이야기로 취급한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생활수준은 나아졌지만 의식 수준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다. 가족의 정신적 학대를 훈육으로 인정하고 교육현장에서 신체적 폭력을 방침으로 삼던 과거가 떠오른다. 모른 척 문제를 방치하면 사회는 갈수록 망가진다. 학교폭력, 직장 내 괴롭힘, 갑질 같은 정서적인 학대는 결국 한국사회의 뿌리 깊은 병폐나 다름없다. 광범위하게 전이된 암세포가 온몸을 망가뜨리는 것처럼 학대와 폭력은 이제 손쓸 수 없는 상태가 됐다. 사회문제로 규정된 시점에서 용어를 바꿔서 사회구조적 폭력으로 불러야 한다.


 정서적인 학대와 폭력은 사람 사는 곳 어디에나 존재한다. 폭력은 성역이 없다. 그리고 이유도 없다. 이유는 폭력의 명분을 위해서 가져다 붙이는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가해자가 원한다면 이유는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그래서 피해자는 학대의 굴레를 벗어나기 매우 어렵다. 가까스로 용기를 내서 맞서면서 해명을 요구해도 소용이 없다.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피해자는 절망하게 된다. 소나기는 금세 지나가지만 괴롭힘은 집요하게 이어진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장마처럼 끝없이 퍼붓는다.


 학대와 폭력은 평생 동안 계속된다. 학령인구 대부분이 학교폭력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학군이나 지역 진학률 같은 지표는 의미가 없다. 따돌림과 괴롭힘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학교폭력에서 빠져나오면 직장 내 괴롭힘이 기다리고 있다. 경력이 쌓이고 직급이 올라도 갑질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소득과 거주지와 같은 사회경제적 배경은 급나누기라는 차별을 부른다. 한국인은 폭력의 연속성에 노출된 상태다. 생애주기 전반에 걸쳐 사람들은 괴롭힘과 따돌림의 위협을 받고 산다. 다큐멘터리와 뉴스 속 이야기는 엄연한 현실이다.


 정서적인 학대의 본질은 비인간화다.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을 버리게 되면 동질감과 공감대는 완전히 사라진다. 차별과 갈등 그리고 학대와 폭력이 증가하는 이유 역시 비인간화의 악영향이다. 무한경쟁을 통한 승자독식구조는 대한민국의 상식이다. 승자와 패자를 철저하게 구별하고 등급에 따라 배제하는 한국식 경쟁은 협동심을 학습할 기회가 전무하다. 시험 앞에서 친구는 경쟁자고 성과 앞에서 동료는 적이다. 경쟁은 갈등과 충돌을 부른다. 토너먼트가 끊이지 않는 사회에서 이긴 자는 위로 올라가고 패배자는 아래로 내려간다. 이러한 상하관계에서 형성된 위계질서는 시간이 지나 공고한 신분제가 됐다.


 외부와 교류와 개입이 적은 집단일수록 비인간화를 부르는 편향적인 사고가 쉽게 발생하고 확산도 빠르다. 영향력을 가진 사람의 입이 스피커가 되면 친분을 가진 주변 사람들은 빠르게 뉴스를 내보낸다. 소문은 몇 개의 입을 거치다 보면 사실이 된다. 그러다 보면 수평적인 관계의 구성원들은 어느새 피해자와 가해자로 나뉘게 된다. 나랑 다르다는 시각으로 타인을 보는 순간부터 심리적으로 배제하려는 편향적인 사고가 형성된다. 생각은 씨앗과 같아서 뿌리를 내리고 나면 편견으로 자란다. 한 번 자라나면 쉽게 뽑을 수 없다.  


 상대를 보는 시각에서 인간적인 감정과 동질감을 제거하고 나면 오로지 악의만 남는다. 악의적인 편견은 다르다는 사실을 죄악으로 규정한다. 피해자를 향한 학대와 폭력을 심판으로 포장하고 정당성마저 부여한다. 그래서 가해자들은 반성이나 양심의 가책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한국 사회는 경쟁자를 향한 적개심을 몇 세대에 걸쳐 학습했다. 각인된 사실은 공인된 진실이 되고 개선불가능한 배척을 만든다. 경쟁을 통한 줄 세우기와 사회적 지위에 기반을 둔 급나누기가 상식인 사회. 따돌림과 괴롭힘 같은 차별적인 폭력이 일상화될 수밖에 없다.


 매년 많은 사람들이 괴롭힘으로 인한 피해를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들은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안고 산다. 끔찍한 사회문제라는 공감대가 들불처럼 번졌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 여전히 따돌림과 같은 정서적인 폭력은 사회 전반에 만연한 상태다. 물론 사람들은 이전보다는 경각심을 갖고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예방책은 부실하고 해결책 역시 부족하다. 처벌을 법제화한다고 해도 제도가 제대로 갖춰지려면 긴 시일이 소요된다. 하지만 폭력은 현재진행형이다. 세상이 바뀌기 전까지 피해자들은 고립 속에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 한다.


 언어는 마음을 담는 그릇이다. 혐오가 담긴 멸칭과 차별과 증오가 뒤섞인 표현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다. 정서적인 폭력과 학대는 혐오와 증오를 먹고 자라는 독버섯이다. 포자처럼 번져나가는 위험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지표만 놓고 보자면 과거에 비해 현재의 대한민국은 정말 살기 좋은 나라가 됐다. 그러나 스스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국민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갈등과 차별이 만연한 사회적 분위기는 숫자와 현실 사이의 괴리감을 만든다. 살기도 힘들고 살아남기도 쉽지 않은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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