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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Jul 15. 2024

분노와 증오가 폭발하는 사회

묻지마살인과 증오범죄 그리고 테러

 전례 없는 범죄는 사회 이면에 방치된 문제들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된다. 작년 여름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흉기난동사건은 국민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가장 무서운 범죄는 범행동기가 없는 범죄다. 일본에서 ‘도리마’라고 부르는 무차별살인이 한국 사회를 덮쳤다. 불특정다수를 노리는 살인예고과 도심 한복판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으로 인해 불안감이 폭증했다. 직장인과 고등학생 그리고 노인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흉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범행동기가 없는 증오범죄는 해를 넘기면서 고유명사가 됐다. 이제는 온라인상의 범행예고를 더 이상 허풍으로 볼 수 없는 세상이 됐다. 한국사회는 왜 무차별 살인예고가 난무하는 무법지대가 된 것일까? 폭력적인 게임이나 콘텐츠에 노출되었다는 매스미디어의 철 지난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근본적인 원인은 늘 사회구조적인 병폐 속에 숨어있다. 흉기난동과 묻지마살인은 오랜 기간 축적된 분노가 폭발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한국 사회에 내재된 분노를 제대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랫동안 누적된 사회적 불만과 분노는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폭탄이나 마찬가지다. 서로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차별하고 멸칭을 쓰면서 헐뜯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대립하는 첨예한 갈등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악화됐다. 차별은 갈등을 낳고 갈등은 증오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증오는 뿌리 깊은 차별과 적개심으로 이어진다. 한국 사회는 분노의 악순환을 오랫동안 방치했다. 분노범죄를 패배자와 사회부적응자들이 저지르는 일탈로 치부한 것 역시 악수였다.


 코로나가 끝나고 장기불황과 저성장 그리고 인플레이션이라는 악재가 찾아왔다. 양극화는 이제 계층이 아니라 계급을 나누는 수준으로 심해졌다. 화합과 상생이 사라진 갈등사회에서 심화된 분노는 폭발할 수밖에 없다. 양극화와 불황은 하위계층에게 치명타가 됐다. 사회적 약자들은 실망과 절망감을 해소할 곳이 없었다. 내면에 누적된 분노는 때가 되면 외부로 표출된다. 본인의 실패와 좌절감을 사회현실과 동일시하는 사람들 속에 쌓인 울분이 극단적인 형태로 터져 나왔다.


 내재된 분노와 사회를 향한 증오는 이유 없는 살인을 낳았다. 연이어 발생한 묻지 마 살인은 취약한 내면을 가진 인간들의 가슴에 불을 붙였다. 폭발은 연쇄반응으로 이어졌다. 1년 넘게 전국 각지에서 증오범죄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분노를 범죄로 표출하는 망가진 인간들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상식에서 벗어난 인간은 상식을 초월하는 짓을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다. 뒤틀린 인간의 내면을 지배하는 것은 피해의식이다. 다들 행복한데 나만 불행하다는 피해의식은 증오와 분노를 만나 공격성으로 변한다.

 피해의식은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노력을 원천봉쇄한다. 증오가 누적되면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이 전부 미워진다. 내가 제일 불행한 사람이니까 누구든 미워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 잡는다. 극도로 편향된 끔찍한 자기 연민이다. 출구 없는 자기 연민과 왜곡된 피해의식은 쌍둥이처럼 닮았다. 증오범죄를 저지른 범인들은 본인을 억울한 피해자라고 주장한다. 공감능력이 결여되면 인간은 오로지 나뿐인 나쁜 놈으로 전락한다. 본인이 저지른 행동이 초래한 결과에 신경 쓰지 않는다. 양심이 사라졌으므로 범죄를 저지르고 나서도 반성과 자책을 찾아볼 수 없다.


 증오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죄책감이 없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인간이니까 그래도 된다고 여긴다. 나보다 잘 사는 인간은 모두 증오의 대상일 뿐이다. 죄를 뉘우치거나 진심으로 반성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면 극단적인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의 행동양식은 테러리스트와 닮았다. 테러리스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범죄를 저지른다. 동기의 측면에서 본다면 가장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소통방법이다. 한국 사회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증오범죄와 비슷한 면이 있다.


 체포된 이들이 밝힌 범행동기는 일반인들이 납득하기 힘든 것들이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 몰래 담아둔 응어리를 쏟아낸 것처럼 보였다.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한 자가 두서없이 토해내는 문장은 무척 당혹스러웠다. 불만과 분노를 풀 곳이 없어서 그들은 범죄를 저질렀다고 말했다. 그리고 본인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궤변을 늘어놓았다. 합리화와 면죄부가 뒤섞인 범행동기는 픽션일 뿐이다. 테러리스트가 폭탄을 터뜨리고 세상이 썩었다고 내뱉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증오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적 관계가 단절된 상태였다. 분노를 왜곡된 방식으로 표출한 피의자들 주변에 심리적 안전망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회적으로 고립되면 건강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해진다. 치안과 법질서가 사회안전망이라면 인간관계는 심리적인 안전망이다. 인간적인 교류가 줄어들면서 자연스럽게 온라인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온라인 정보들은 편향적이다. 한 가지 생각에 사로 잡히면 입맛에 맞는 것만 찾아보면서 편견에 물들어버린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정신력은 더 쇠약해지고 있다.


 분노와 증오에 물든 폐쇄적인 인간은 온라인 속에서 테러리스트가 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자신의 감정과 사상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범죄를 택하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증가할 것이다. 길 한복판에서 흉기를 휘두르는 난동은 일종의 신호탄이었다. 뒤틀린 인간들이 저마다의 궤변을 토해내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범죄는 진화한다. 칼 한 자루 휘둘러서는 별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인간들은 새로운 방식을 택할 것이다. 택배나 소포에 위험물질을 넣고 무작위로 발송할지도 모를 일이다.


 불특정다수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방화를 저지를 가능성도 있다. 비행기와 선박 기차 같은 운송수단을 테러대상으로 삼을 수도 있다. 부유층을 타깃으로 하는 범죄뿐만 아니라 취약계층을 노리는 사건도 큰 문제다. 접근하기 쉬운 사회적 약자를 상대로 화풀이하는 묻지마범죄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저항할 능력 없는 대상도 먹잇감이 되기 쉽다. 아이들이나 노약자를 노린 범죄와 동물학대는 꾸준히 우상향 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내재된 분노와 증오가 해소되지 않는 한 비극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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