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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Aug 04. 2024

도토리 위스키

 위스키바에 갔다. 골목길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곳이라 신비한 느낌이 들었다. 내부로 들어가자 다양한 싱글몰트와 블렌디드 위스키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좌석이 6개밖에 없다 보니 내부는 아담했다. 키핑 해둔 술을 찾는 손님도 있었고 사장님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는 커플도 있었다. 메뉴판을 받아 들고 즐거운 고민을 시작했다. 나는 맥캘란과 발베니를 두고 고심하다 발베니를 선택했다. 양자택일이 제일 어렵다. 친구는 피트 위스키를 선호하는 편이다. 발음하기도 힘든 이름의 생전 처음 보는 위스키를 골랐다. 술이 나오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늘 즐겁다.


 얼음을 카빙하고 적당한 잔을 골라 세심하게 세팅한다. 몸에 익은 동작은 군더더기가 없다. 신속하면서도 느긋하고 편안하면서도 나름 절도가 있다. 벽장에서 브리딩된 위스키를 꺼내 조심스럽게 잔에 담는다. 캐스크에서 숙성된 술의 빛깔은 언제 봐도 참 아름답다. 테이블 위에 놓인 두 잔의 위스키는 은은한 조명과 만나 오묘한 색감을 만들어낸다. 코 끝으로 향을 즐긴다. 잔을 살짝 흔들어서 눈으로 흘러내리는 레그의 질감을 확인한다. 혀 끝에 닿은 알코올의 쏘는 맛은 미뢰를 적시면서 금세 풍부한 향으로 돌변한다. 목을 넘어가면서 비강에 퍼지는 풍미와 향미는 위스키의 꽃이다.


 위스키의 맛을 설명하는 전문용어와 관용적인 미사여구가 즐비하지만 나는 그냥 도토리 향이 난다고 말한다. 위스키를 숙성하는 오크는 가을이 되면 도토리가 주렁주렁 달리는 참나무다. 비싼 최고급 위스키라고 할지라도 결국 도토리나무로 만든 통에서 숙성한 술이다. 위스키는 도토리 향이 난다. 정확하게 말하면 참나무 밑동에서 올라오는 나무냄새와 흙내음이다. 잘 익은 도토리를 으깼을 때 풍기는 고소한 향도 들어있다. 도토리 껍질을 벗겼을 때 나는 풋내도 느껴진다. 비 내리는 참나무숲에서 피어오르는 물에 젖은 나무껍질 냄새도 맡을 수 있다.


 쉐리 위스키는 풍부한 과일 향이 난다고 하지만 달콤함이 날아가면 곧바로 도토리 냄새가 치고 들어온다. 피트 위스키는 강렬한 탄내가 코 끝을 찌른다. 참나무는 예나 지금이나 땔감으로 폭넓게 쓰인다. 캠핑장에서 불을 피울 때 나는 매캐한 탄내가 피트 위스키에서 진하게 올라온다. 이탄을 태워서 훈연한 향이라고 말하지만 그냥 탄내다. 친구가 고른 생소한 이름의 피트 위스키는 고무타이어를 불태웠을 때 나는 냄새가 났다. 글라스에 코를 대자마자 타이어가 잔뜩 쌓인 폐차장이 떠올랐다. 참지 못하고 얼굴을 찡그려버렸다.


 식문화는 정답이 없다. 자기 방식대로 즐기면 그만이다. 하지만 살다 보면 정답을 강요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스스로를 마니아라고 말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편견에 가깝다. 가격으로 등급을 나누고 주류가 지지하는 분류법을 진리로 여긴다. 마치 예법을 지켜야 한다고 호통치는 고지식한 종교재판관을 보는 느낌이다. 비싼 술과 좋은 술은 다르다. 내가 즐길 수 있는 술이 곧 좋은 술이다. 취향은 자유다. 타협할 필요도 없고 설득될 이유도 없다. 간섭할 권리도 없으며 논쟁할 가치 역시 없다. 그냥 서로 터치하지 말고 알아서 행복하게 즐기면 그만이다.


 좋은 술에 관한 기준에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애호가들이 군침을 흘리고 마니아들이 극찬하는 위스키라도 내 입맛에 맞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유학 간 친구가 귀국하면서 사온 비싼 위스키를 나눠 마시면서 맛과 가격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위스키를 맛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술에 붙는 맛이라는 표현은 적당한 미사여구라고 생각한다. 향은 즐길 수 있지만 혀 끝을 치는 알코올의 둔탁한 무게감은 여전히 불쾌하다. 알코올은 후각과 미각 같은 감각신경을 빠르게 마비시킨다. 두 번째 잔을 넘기면 맛이 급감하는 느낌이 든다. 늘 첫 잔이 제일 즐겁다. 술은 적을수록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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