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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Sep 12. 2024

9월 중순에 찾아온 집중호우

 저녁 무렵에 비가 온다는 예보를 무시하고 점심시간이 지나자마자 폭우가 쏟아졌다. 굵은 빗방울이 두꺼운 이중창에 부딪히면서 묵직함 파열음을 냈다. 창 밖으로 내리는 빗줄기는 곧은 직선을 그리다 어느새 사선으로 휘어졌다. 강한 비바람이 몰아치면서 거리의 가로수들이 모로 눕는 것처럼 보였다. 핸드폰 화면 속 날씨앱에 국지성폭풍우라는 낯선 단어가 떴다. 창문을 살짝 열었더니 맹렬한 기세로 빗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한여름 장마가 다시 돌아온 것 같다. 집중호우는 강한 돌풍을 동반한 사나운 폭우로 변했다. 건물 옥상 위로 산산이 흩어지는 물보라가 보였다.


 빗발이 굵어지면서 주변 풍경이 점점 흐려졌다. 장대비는 굵은 실선을 촘촘하게 그리면서 시야를 차단했다. 회색 장막이 세상을 덮었다. 창 밖은 낮인지 밤인지 분간하기 힘들 만큼 어두워졌다. 환한 조명을 받은 내 모습이 유리창에 비쳤다. 비 오는 날마다 스릴러 영화를 봤다. 데이비드 핀처의 <세븐>이나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은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았다. 불 끄고 방에 누워서 빗소리를 들으면서 낮잠을 자기도 했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호우를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다. 폭우가 동반하는 소음은 먼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소리를 닮았다. 뇌우가 휘몰아치는 밤에는 평소보다 더 깊게 잤다. 공포영화 속 배경 같은 비 오는 밤은 무섭지 않았다.


 오늘은 영화 대신에 책을 골랐다. 정세랑이 쓴 <목소리를 드릴게요>를 푹 빠져서 재미있게 읽었다. 바람이 부는 방향이 바뀔 때마다 유리창을 두드리는 리듬이 달라졌다. 재즈 드럼의 익숙한 비트가 생각났다. 아트블래키나 버디 리치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박자를 촘촘히 쪼개다 늘어지기를 반복하면서 능숙하게 백색소음을 만들어냈다. 빗소리를 들으면서 책에 집중했다. 비 오는 날은 독서하기 좋은 날이다. 액티브하지는 않지만 독서보다 좋은 액티비티는 없다. 그래서 장마철이나 폭설이 잦은 한겨울에 독서량이 크게 증가한다. 맑은 날은 책 읽기 말고도 할게 많다.

 

 늦은 오후가 되자 빗줄기가 점점 가늘어졌다. 비가 만든 짙은 장막이 걷히고 사위도 차츰 밝아졌다. 장마철의 먹빛 하늘과 다른 잿빛 하늘이 시야에 들어왔다. 명도는 조금 더 높지만 채도는 낮은 느낌이다. 수채화를 그리면서 물통에 붓을 빨다 보면 마지막에는 늘 저런 색이 나온다. 딱 그 빛깔이다. 맹렬한 기세로 유리창을 때리던 빗방울 크기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작은 물방울 알갱이가 바람결에 느리게 흩날리는 모습이 보였다. 물감을 뒤섞어 풀어놓은 것 같은 하늘의 색감이 조금 옅어졌다. 비구름이 서서히 물러나면서 비는 멎었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마치 외국에 온 기분이 들었다. 비 내린 싱가포르나 베트남을 연상하게 만드는 날씨다. 집 앞 공원 분수대에 머라이언 조형물이 세워놓아도 이질감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반나절 가까이 폭우가 쏟아졌지만 여전히 열기가 감돌았다. 9월 중순이지만 낮기온은 34도를 기록했다. 공기 중에 가득한 물기가 피부에 들러붙는다. 계절상 가을이지만 오늘은 한여름이나 다름없다. 올여름은 추석연휴가 끝날 때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비에 젖은 참나무나 측백나무 대신에 야자수가 보여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날씨와 세상이 모두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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