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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Nov 05. 2024

마천루의 저주에 빠진 롯데

현실에 안주하면 혁신은 없다

 송파는 롯데가 지배하는 왕국이다. 2호선 잠실역을 감싸고 있는 롯데월드와 롯데타워, 백화점, 호텔은 마치 거대한 왕궁 같은 인상을 준다. 강남의 삼성타운이나 판교역을 감싸고 있는 카카오캠퍼스와 비교해 보면 느낌이 많이 다르다. 마천루인 롯데타워의 압도적인 존재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송파는 롯데의 본거지다. 롯데그룹의 본사와 주요 계열사의 본사는 대부분 송파구에 주소를 두고 있다. 그중에서도 잠실은 롯데의 심장부나 다름없다. 창립자 신격호의 숙원사업이었던 롯데타워는 한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됐다. 그러나 최근 롯데의 행보나 입지를 보면 마천루의 저주가 떠오른다.


 삼성전자는 위기설이 나오고 있지만 롯데는 공식적으로 위기다. 5대 재벌로 불리는 재계순위에서 말석을 차지하던 롯데의 자리는 포스코가 차지했다. 2021년 롯데의 자산총액은 118조였으나 3년이 지난 현재 총액은 10%가량 오른 130조다. 같은 기간 포스코는 82조에서 137조로 60% 이상 상승했다. 4위인 LG와의 격차는 40조 넘게 벌어졌다. 1위 삼성전자는 500조 2,3위를 차지한 SK와 현대차는 300조 규모다. 같은 재벌그룹이지만 더 이상 같은 체급으로 분류할 수 없게 됐다. 롯데는 마천루를 건설한 역사 속 기업들의 전철을 밟게 될까?


 롯데타워 건설에 들어간 돈은 약 4조 원이다. 유통과 건설은 롯데의 주력사업이므로 선택 자체는 악수가 아니었다. 게다가 5천억 원을 들여서 교통개선사업을 벌인 결과 잠실 일대를 롯데왕국으로 완성할 수 있었다. 교통은 사람과 물류가 지나는 통로이자 수요와 공급을 창출하는 경로다. 유통업의 강자인 롯데로서는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시기가 나빴다는 점이다. 롯데타워는 2010년에 착공했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쿠팡이 등장했다. 2010년대는 유통업이 이커머스로 대전환되는 시기였다. 롯데는 이커머스로 전환할 수 있었던 골든타임을 놓쳤다.


 위메프와 티몬 그리고 쿠팡은 소셜커머스에서 시작했다. 소셜커머스는 일종의 테스트였다. 한국시장의 특성을 파악한 쿠팡은 전략을 대폭 수정하면서 이커머스에 올인했다. 같은 시기 롯데는 롯데타워건설에 그룹의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창립자의 염원과 부동산불패신화가 톱니처럼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쿠팡은 유통업의 상식을 파괴했다. 공급이 수요를 만든다는 온디맨드 전략을 들고 나왔다. 공급을 지배하는 것은 빠른 배송이다. 쿠팡은 공격적인 투자를 집행하면서 배송에 사활을 걸었다. 사옥을 건립하고 서울 사대문 안에 부동산을 매입하는 대신 전국에 물류센터를 지었다.


 그 사이 쿠팡의 적자는 천문학적인 규모로 늘어났다. 위기론과 거품이라는 지적이 이어졌다. 유통업 강자인 신세계나 롯데는 쿠팡을 경쟁상대로 보지 않았다. 부동산 가격은 우상향 했고 면세점과 백화점은 중국인 관광객들이 몰리면서 매출 신기록을 달성했다. 대한민국에서 재벌기업의 입지는 절대적이다. 시대가 변해도 재벌은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시장이 달라졌다. 저성장과 불황이 찾아오면서 사람들은 지갑을 잠갔다. 보복소비와 쾌락소비의 빈도는 늘었지만 결제총액은 점점 줄어들었다. 사람들은 백화점이나 쇼핑센터를 찾아서 시간을 보내고 집에 와서 쿠팡으로 물건을 주문한다.


 소비패턴이 달라졌지만 롯데는 제대로 대응하지 않았다. 달콤한 현실에 안주하면 찬란한 혁신은 없다. 찻잔 속의 태풍쯤으로 여겼던 이커머스의 결제액은 오프라인 유통업 매출을 앞질렀다. 익일배송이 일반화되면서 새벽배송 시대가 열렸다. 롯데마트와 롯데온은 더 이상 쿠팡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제는 면세점과 백화점이 지배하던 명품시장마저 쿠팡의 손길이 닿기 시작했다. 쿠팡은 세계최대 온라인명품 거래업체인 파페치를 인수했다. 사치품 시장에서 롯데의 입지가 단숨에 무너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극적인 혁신을 통해서 그룹 차원에 성장동력을 공급할만한 힘은 이미 사라졌다.


 기업의 성장동력은 불안에서 나온다. 마음 놓고 안심하면 경영전략은 안일해질 수밖에 없다. 2010년대 롯데는 잘하는 것만 잘하려고 했다. 롯데타워가 완공되는 6년간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지 않았다. 시장은 냉혹하다. 패자부활전이 없다. 기회를 날려버리면 상처뿐인 감가상각만 남는다. 경영권 분쟁이나 승계문제는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도전을 두려워했다는 점이다. 롯데는 주력사업에만 힘을 실으면서 무게추를 분산할 수 있는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지 않았다. 기업은 위험해서 싫다고 도전하지 않으면 도태된다. 리스크가 두려워서 포기하면 리워드를 얻을 기회는 오지 않는다.


 롯데도 여러 가지 시도는 했다. IT 분야에서 뒤처졌다는 인상을 지우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다. SI개발과 사내 전산망을 운영하던 롯데정보통신을 AI기업으로 포장했다. 롯데이노베이트로 사명을 바꿨지만 시장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확립하지 못했다. 5대 재벌에 속하는 다른 대기업들은 IT와 AI 분야 R&D에 매년 수 조원이 넘는 예산을 투입했다. 그러나 롯데는 달랐다. 2021년 AI전환이 시작될 때 롯데는 한샘을 인수하는데 1조 4천억을 썼다. 부동산개발과 인테리어 사업의 시너지를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롯데는 이커머스에서 기록적인 패배를 토대로 절치부심하지 않았다. 지분인수와 투자를 통해서 쉽게 가려고 했다. 메타버스 서비스인 칼리버스를 만든 비전VR를 인수하는데 120억을 지불했다. 300억 원을 주고 중고나라 지분도 사들였다. 그러나 IT 분야의 R&D를 크게 늘리지도 않았고 AI전문가를 확보하는 노력도 부족했다. 결과적으로 롯데의 디지털전환은 실패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투자는 직접 경영하는 것보다 리스크가 적다. 오너의 책임론에서 자유로운 만큼 전문성은 기대할 수 없다. 몸으로 부딪히는 도전이 아니라 투자로 요행을 기대하는 방식은 실효성이 없다. 이런 소극적인 경영방침이 롯데의 문제다.


 롯데의 위기는 부동산에서 시작됐다. 롯데타워 건설은 나쁘지 않았지만 미래의 주력 사업으로 삼으려던 것이 문제였다. 잘하는 분야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늘 하던 대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이커머스에서 참패하고 디지털전환에 실패한 롯데가 제시한 해법은 또 부동산이었다. 디지털 분야의 혁신은 사실상 포기했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미 하이엔드 아파트 브랜드인 르엘을 적극적으로 밀었으나 실패했다. 그래서 롯데는 쇼핑몰인 타임빌라스 조성에 7조 원을 쓰기로 했다. 쿠팡이 국내 물류망 구축에 쓴 돈이 6조 원대다. 비슷한 금액이지만 쿠팡의 투자가 더 큰 파급효과를 불러온 것 같다.


 그룹 차원에서 부동산과 건설 관련 분야에 투자한 금액은 10조가 넘는다. 그러나 정작 두 분야에서 롯데의 부진을 알리는 유동성 위기가 비롯됐다. 미래사업으로 낙점하고 삼성으로부터 3조 원을 들여서 인수한 화학사업 역시 유동성 문제가 발생했다. 3조 넘는 돈으로 지마켓과 옥션을 인수하고 건설 계열사의 유동성 문제로 홍역을 치른 신세계와 닮았다. 신세계와 롯데 모두 하락세의 늪에 빠졌다. 카드, 보험 같은 금융과 유통업 분야의 현금창출력이 떨어진 것이 문제다. 본업의 입지는 흔들리고 있는데 미래를 보고 10년 전부터 배팅한 사업은 대부분 실패했다.


 신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롯데의 바이오 사업마저 삼성바이오로직스와 경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시대가 변하면 시장도 변한다. 일본의 30년 저성장불황을 직관한 롯데는 정작 한국의 불황에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왜 롯데는 혁신과 도전을 주저하고 단발성에 가까운 투자와 인수를 남발했을까? 롯데는 2010년대 왕자의 난을 거쳤다. 피를 쏟아가며 얻은 경영권에 과오나 실패 같은 때를 묻힐 수는 없다. 위에서는 결정하고 책임은 아래에서 진다. 책임 없는 권리행사는 실패에 대한 성찰이나 개선이 없다. 컨트롤타워를 바꿀 수 없다면 롯데의 혁신은 슬로건으로 그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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