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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drifter

속도늦추기

by 김태민
김태민, <나무들>, 종이에 볼펜, 12x22cm.

집에 가려고 버스를 탔다. 제일 좋아하는 앞자리에 앉았다. 정면으로 보이는 바깥 풍경을 보다가 전면유리 위에 걸린 전자시계에 시선이 닿았다. 시간이 한참 어긋나 있었다. 1,20분 차이라면 누군가 착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아침인데 시계만 혼자 늦은 오후에 머물러있었다.


아침 출근길 버스를 탄 승객들은 시계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아주 짧은 순간 불편함을 느꼈다. 틀린 시간을 재조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렇지 않게 그냥 넘어가도 될 일인데 쓸데없는 강박증이 잠시 올라왔다가 가라앉았다. 시계 하나쯤 제멋대로 돌아간다고 문제 될 일은 없다.


아무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당장 나도 시계를 보고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서 시각을 확인했다. 불편함은 고정관념에서 비롯되는 작은 불안이 원인이다. 익숙한 습관처럼 내 몸에 밴 오래된 고정관념을 들여다봤다. 힘을 좀 빼기로 했다. 빈틈없이 꽉 조인 녹슨 나사를 천천히 풀었다.


여유를 잃어버리면 아주 사소한 곳에서 표가 난다. 별일 아닌 작은 일에 반응하는 온도차가 달라진다. 며칠간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이유 없이 마음이 조금 불안했던 것 같다. 조금 느리거나 빨라도 괜찮다. 실수는 실패가 아니다. 잘못된 것과 틀린 것은 다르다. 경험을 통해 체득한 사실이지만 살다 보면 가끔 잊는다.


그럴 때마다 마음의 여유도 함께 사라진다. 경직된 마음을 풀고 여유를 되찾고 싶어졌다. 두 정거장 전에 내렸다. 천천히 걸었다. 걱정이나 불안은 두 발로 열심히 걷다 보면 누그러진다. 명학대교 위에서 잠시 멈춰서 강변 풍경을 눈에 담았다. 오리와 백로가 보였다.


자연 속을 살아가는 야생동물들은 걱정하지 않는다. 추위나 더위 같은 궂은 날씨에 일희일비하지도 않는다. 자연에 순응하면서 동시에 대응한다. 자연스럽게 본능에 몸을 맡기고 유유자적하며 산다. 사람은 좀 다른 것 같다. 타고난 본능보다 더 많은 욕구와 욕망을 학습한다.


더 많이 갖기 위해 땀 혹은 피를 흘린다. 남들만큼 살기 위해 애를 쓰고 남들처럼 살려고 기를 쓴다. 그리고 남들보다 더 잘 살려고 경쟁하고 대립한다. 우리는 삶을 치열하다고 표현하는데 익숙해졌다. 끝없는 욕구가 무한한 욕망을 당연하게 여기고 살다 보면 몸도 마음도 망가지는 것 같다.


가지면 더 가지려고 발버둥 치고 가지지 못하면 스스로를 힐난하고 자책하면서 점점 무너진다. 나는 초라함을 안고 있었다. 현실을 바꾸지 못하는 자신에게 무력감을 느꼈다. 조급함과 무기력이 번갈아 찾아올 때마다 조금씩 지쳤던 것 같다. 강박은 불안과 함께 찾아온다.


조바심이 났다. 제멋대로 가는 시계를 보고 마음이 소란스러워질 만큼 조급하고 불안했다.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현실이 갑갑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답답했다. 욕망과 욕심이 삶을 짓누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전보다 좋아지기를 원하고 상황이 나아지기를 바라면서 강박증을 느끼게 됐다.


자리에 앉아서 호흡을 고르고 생각을 정리한다. 현실은 제 자리에 멈춰있는데 불안한 마음만 혼자 널뛰기를 한다. 방향이 맞다면 속도는 시간이 알아서 해결해 준다. 걱정한다고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천천히 받아들인다. 불안한 마음의 속도를 늦춰야겠다. 보폭을 조절하듯이 조금 느리게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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