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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drifter

스치면 흔적이 남는다

by 김태민

김태민, <달래>, 종이에 볼펜, 12x22cm.

오후에 세탁기를 돌렸다. 날이 추워서 건조대를 거실로 갖고 내려와서 빨래를 널었다. 외출용으로 자주 입는 트레이닝 복을 꺼내 들었는데 고양이털이 눈에 들어왔다. 하얗고 긴 털은 기모 안감 여기저기에 잔뜩 붙어있었다. 속옷이나 후드티에는 털이 거의 없었다.


아무리 봐도 친구네 집 달래에게서 온 것 같았다. 달래는 장모종인 랙돌이라 털이 많이 날린다. 매일 청소기를 돌리고 빗질을 해주면서 친구가 신경을 쓰고 있지만 한계가 있다. 돌돌이를 한 두 번 깜빡했더니 여기저기에 털이 달라붙었나 보다. 고양이는 먹고 자면서 하루 종일 털을 만드는 생물이다.


털을 물처럼 흘리고 다니는데도 매일매일 털이 뿜어져 나온다. 고양이 몸속에서는 털 만드는 공장이 365일 쉬지 않고 돌아간다. 털이 길수록 더 많이 빠지는 것 같다. 쓰다듬거나 굳이 만지지 않아도 고양이가 사는 집에 가면 옷에 털이 들러붙는다. 집에 돌아와서 고양이털을 발견하면 그야말로 묘한 기분이 든다.


반가움과 난감함이 5:5 비율로 뒤섞여있다. 테이프를 잘라서 털을 떼어냈다. 고양이와의 만남 뒤에는 늘 흔적이 남는다. 사실 사람도 비슷하다. 접촉하는 것들은 전부 흔적을 남긴다. 사람, 동물, 물건 모두 마찬가지다. 평소에는 모르고 지나간다. 그러다 우연히 발견하게 된다.


빨래를 돌리다 고양이털을 발견하는 것처럼 사소한 계기로 의미를 깨닫는다. 알게 모르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리적인 흔적이 남는 것처럼 정서적인 흔적도 내면에 남는 것이 아닐까? 친밀감이나 익숙함도 흔적이다. 친구네 집에 갈 때마다 달래와 놀아줬다.


만날 때마다 쓰다듬으면서 예뻐해 줬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늘 그랬다. 달래는 내게 낯을 가리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에게 우호적인 감정의 흔적을 남긴 사이가 됐다. 마음은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감정을 감출 수는 있어도 마음을 숨길 수는 없다.


마음이 오고 가는 모든 관계는 내면에 흔적을 남긴다. 무심코 스쳐 지나가는 짧은 관계도 예외는 아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괜찮아졌다고 여겼는데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이 아플 때가 있다. 이별 후에 찾아오는 열병만큼은 아니지만 헛헛한 감정이 피로감을 느끼게 만든다.


기억은 흐르는 세월의 부산물이다. 강물아래 퇴적물이 쌓이는 것과 같다. 가슴속을 들여다봤다. 낡은 이름표를 떼어내고 오래된 기억들을 전부 퍼다 버렸다. 때가 되면 잊거나 비워내야 하는 기억들이 있다. 모든 순간이 다 같은 추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의미가 있다고 다 가치 있는 것도 아니다. 내려놓고 돌아서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억도 있다.


오래된 상처가 가끔씩 욱신거리듯이 흔적 역시 살아있는 생물처럼 반응한다. 고양이털은 떼어낼 수 있지만 사람이 남기고 간 흔적은 맘대로 떼어낼 수 없다. 내 안에 남은 흔적을 오랜만에 들여다봤다. 관계에서 비롯된 여러 가지 미련은 시간이 지나면서 아쉬움으로 변했다.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완전히 다른 감정이다. 미련은 여전히 과거와 이어져있지만 아쉬움은 추억에 맞닿아있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지난날을 추억한다. 마음에 흔적을 남겼던 이들은 다들 잘살고 있을까? 낯선 곳에서 고양이털을 발견하는 것처럼 지난날들을 떠올릴 때 나를 생각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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