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은 다 주인이 있다

by 김태민
김태민, <TVR 아넬>, 종이에 색연필, 14x19cm.

오랫동안 소장했던 TVR 아넬을 당근했다. 질로나이트 소재로 딱 250개 한정판으로 출시했던 안경이었다. 힘들게 구해서 그런지 애착과 추억이 동시에 깃든 소장품이었다. 1960년대 오리지널 아넬을 복각한 디자인도 준수했지만 색감이 참 매력적이었다. 각도에 따라 검정과 군청색을 오가는 색온도의 변화가 유난히 마음에 들었다. 조명을 받을 때마다 살짝 반짝이는 표면의 펄감은 예거 르쿨트르의 메테오 다이얼을 닮았다.


동급으로 평가받는 줄리어스타르트의 블랙우드패턴보다 훨씬 더 고급스러운 빛깔이었다. 하지만 나는 안경을 손에 넣고 나서 막상 단 한 번도 착용하지 않았다. TVR의 아넬은 정말 멋진 안경이지만 내 얼굴형에 맞지 않았다. 안경마니아가 되면 여러 브랜드의 똑같은 검은색 아넬 안경을 두고 단번에 구별할 수 있다. 프런트와 브릿지 엔드피스의 1,2미리 차이가 만들어내는 미묘한 차이점이 보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TVR이나 줄리어스타르트의 아넬형 안경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


타르트옵티컬이나 BJ클래식에서 출시된 안경이 훨씬 잘 어울린다. 엔드피스의 형태와 좁은 브릿지 그리고 림 상부의 조형이 내 T존에 맞지 않는 느낌이다. 비슷한 계열의 디자인이라도 브랜드마다 미세한 차이가 있는 만큼 잘 어울리는 안경이 따로 있다. 44 사이즈보다는 46이 잘 어울린다. 48은 조금 크고 49는 무겁다. 코받침은 낮을수록 좋고 브릿지는 23이 적당하다. 프런트는 142 최소 140은 되어야 한다. 좁으면 피팅할 때 템플을 너무 많이 휘어야 해서 안경모양이 망가진다.


템플의 두께는 얇을수록 좋다. 귀에 착 붙는 가벼운 착용감을 선호한다. BJ클래식이나 타르트옵티컬처럼 안경다리가 뒤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테이퍼드핏이 피로감이 적다. 셀렉타의 체어맨이나 규파드의 gp05 같은 안경은 귀가 아프다. 이펙터의 cut과 tone도 볼드한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지만 템플이 두꺼워서 결국 중고로 팔아버렸다. 나름대로 원칙과 취향을 갖고 있어도 안경생활은 종종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중고매물을 택배로 구입하다 보면 가끔 예상이 빗나갈 때가 있다. 사람은 성공보다 실패에서 더 크게 배운다. 기쁨은 휘발되는 감정이지만 아쉬움은 흔적을 남긴다. 그래서 누적된 경험의 대부분은 실패다. 지금까지 수십 점이 넘는 안경을 사고팔면서 나에게 맞는 안경을 찾아다녔다. 완벽한 안경을 찾는 작업은 소거법에 가깝다. 어울리지 않는 디자인을 하나씩 지워나가면서 배제하다 보면 나에게 꼭 맞는 디자인이 남는다.


흔히 옷을 좋아하는 자칭 옷환자들은 실패를 두고 낭비한 시간과 비용에 수업료라는 표현을 쓴다. 안경마니아로 살면서 중고거래를 많이 했다. 이제야 나에게 맞는 안경을 알아보는 눈이 생긴 것 같다. 당근에서 만난 구매자에게 TVR을 넘겼다. 물건을 꼼꼼하게 확인할 시간을 줬다. 안경을 착용해 볼 것을 권했다. 그가 안경을 쓰자마자 내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 잘 어울렸다. 물건은 어쩌면 정말로 처음부터 주인이 정해져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대로 된 주인을 찾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뻤다. 중고거래를 하면서 뿌듯함을 느낄 때가 있다. 정말 좋은 물건을 착한 가격에 샀을 때도 기쁘지만 잘 어울리는 사람에게 판매했을 때도 민족감을 느낄 수 있다. 타르트옵티컬 초기모델인 셀룰로이드 FDR을 팔았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지방에서 올라온 구매자는 대학생이었다. FDR 안경을 쓰자마자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잘 어울렸다. 내가 착용하면 서로 다른 장르의 그림체가 섞인 것 같았다.


그럭저럭 나쁘지는 않았지만 크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주인을 제대로 만난 안경은 미련 없이 기쁜 마음으로 보내준다. 수집가는 수집하는 행위 자체를 선호하지만 나 같은 애호가는 과정을 좋아한다. 손에 넣기까지의 과정도 즐겁고 떠나보낼 때의 묘한 성취감도 좋다. TVR을 판 돈으로 BJ클래식의 셀룰로이드 안경을 샀다. 빈자리를 새로 채웠다. 안경생활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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