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와 기억

by 김태민

드립백커피를 선물 받았다. 집에 와서 상자를 열어보니 케냐 르완다 에티오피아에서 생산된 커피가 들어있었다. 커피 포장지에는 데포르메화 된 기린 고릴라 표범이 인쇄되어 있었다. 각 나라의 대표 동물을 그려 넣은 것 같다. 첫 타자로 케냐 드립백커피를 맛보기로 했다. 케냐 하면 나이로비 국립공원이 떠오르는데 특히 코끼리와 기린이 유명하다. 역시 동물과 관련이 있었다.


집에 앉아서 지구 반대편에서 수확한 원두커피를 간편하게 마신다. 새삼 세계무역주의의 영향력을 실감한다. 드립백을 꺼내서 찻잔에 올렸다. 주전자에 끓인 물을 조금씩 천천히 붓는다. 처음에는 물을 조금만 넣고 커피가 추출될 때까지 기다린다. 네 번에 걸쳐 물을 붓고 기다린다. 그동안 향을 충분히 즐긴다. 차는 향으로 즐기는 기호식품이다. 커피를 내릴 때 첫 향이 가장 좋다. 케냐 원두는 고소함과 달콤함이 어우러져있는 부드러운 초콜릿 향이 났다.


커피향기가 금세 거실을 가득 채웠다. 드립백에 코 끝을 대보면 헤이즐넛과 마카다미아에서 맡을 수 있는 견과류 고유의 향이 난다. 차 한잔에 다채로운 식재료의 향미와 풍미가 숨어있다. 커피의 매력은 역시 향이다. 콩과식물을 태워서 나는 탄내지만 커피는 향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린다. 냄새 대신 향이 붙는 이유가 있다. 친근함과 익숙함은 커피냄새를 커피 향으로 만드는데 일조한다. 커피에 관한 제일 오래된 기억은 믹스커피다.


식사 후에 부모님 두 분이서 함께 마셨던 커피의 달달한 냄새를 좋아했다. 그 시절 커피는 어른들만 마실 수 있는 특별한 음료였다. 손댈 수 없는 로망이었다. 그래서 커피맛 더위사냥을 사 먹으면서 커피를 향한 소박한 갈망을 충족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때쯤 처음 커피를 마셨다. 몰래 마신 믹스커피의 첫맛은 강렬했다. 왜 어른들이 밥 먹고 항상 커피를 찾는지 알 것 같았다. 좋은 첫 경험이 커피에 대한 친근한 인상을 만든 계기가 됐다.


하지만 블랙커피는 첫인상이 별로였다. 호기심에 한 입 마셨다가 인상을 쓰면서 싱크대에 쏟아버렸다. 술을 입에 처음 댔을 때도 똑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정반대다. 단맛에서 쓴맛으로 취향이 변하게 될 줄은 몰랐다. 향을 즐기는 차와 술은 대부분은 맛이 쓰다. 나이가 들면서 쓴맛을 찾는 어른이 됐다. 술은 여전히 멀리하지만 차는 늘 곁에 두고 있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집에 오면 옷에서 커피 향이 난다. 기억이나 향기는 전부 흔적이 남는다.


여과지에 원두를 넣고 내려 먹는 것보다 드립백은 확실히 간편하다. 손도 덜 가고 깔끔하게 뒤처리할 수 있는 점도 마음에 든다. 인스턴트커피보다 비싸서 직접 사 먹을 일은 드물지만 어쩌다 한 번씩 선물 받으면 기분 좋게 마신다. 처음 먹었던 드립백 커피는 친구가 베트남에서 사 온 다람쥐커피였다. 첫 키스는 이미 오래전에 잊어버렸지만 드립커피가 준 첫 경험은 기억 속에 그대로 남아있다. 다람쥐커피를 아껴가며 참 맛있게 먹었다.


그때가 벌써 10년 전이다. 음악이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음식도 추억 불러온다. 둘 다 녹슬지 않는 타임머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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