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새벽 명상

박찬욱 감독 "어쩔 수 없다" 라는 영화 속 우리. 새벽 속에 나를 찾다

by WOODYK
신독이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단정함을 유지하는 태도가 아니다.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단단해진 나를 만들어 가려는 간절함이다.
<다산의 마지막 공부, 조윤제 저>


세상이 고요한 새벽 시간에 마음을 비웁니다. 욕망이라는 전차를 마음속에 재우고 스스로 겸손해집니다. 수신을 생각하며 마음가짐을 다시 잡아갑니다. 보이는 것이 많아질수록 복잡해지지만, 보이는 것이 적을수록 심플해집니다. 마음도 그렇습니다. 주변이 혼잡할수록 정신도 흔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혼자 조용히 있는 새벽 시간이 정신을 맑게 해 줍니다.


비범함은 무수한 평범함이 쌓여 만들어진 시간의 탑입니다.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평범함이 지루하고 답답한 듯해도, 그런 시간들이 결국 우리를 비범하게 만듭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접하는 평범한 하루하루가 결코 비범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남들의 비범함을 부러워하지만, 우리의 평범함이 결국 우리를 비범하게 만드는 것이기에 남들을 부러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새벽의 고요함은 남들을 보게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내면을 보게 합니다. 하루의 평범함이 주는 고요함의 시간이 되어 줍니다.


세상은 빨라지고, 속도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해갑니다. 추억을 말하면 고리타분한 사람이 되고, 클래식을 이야기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 됩니다. 비효율은 사라지고 효율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처럼, 결과를 위한 효율 지배주의가 팽배합니다.


AI가 온 세상을 뒤덮었습니다. 모든 곳에서 AI를 빼면 대화가 되지 않는 세상이 도래했습니다. 효율화의 가장 선봉에 AI가 등장했고, AI로 모든 것이 대체될 것이라는 긍정과 부정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회사의 워크숍에도 AI를 빼고는 주제가 사라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영화가 현실이 되어가는 시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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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의 <어쩔 수 없다>라는 영화를 보면, 제지 회사의 전문가가 실직하고 가정을 지키기 위해 재취업 노력을 합니다. 하지만 자리는 한정되어 있고, 동종업계의 전문가들을 한 명씩 사라지게 하며 그 자리를 차지하려 노력합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생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자기 합리화를 하며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려는 가장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가 한 명씩 죽인 사람들처럼, 이미 시대는 사람이 필요 없는 세상이 되었고, 제지 회사도 효율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며 자동화를 도입합니다. 큰 공장에 수십 명이 일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존재하는 일자리는 사라집니다.


모든 것이 자동화되어 공장을 지키는 한 사람만이 큰 공장에 남아 있고, 모든 것이 기계가 움직이는 사회가 되어갑니다. 주인공이 한 사람씩 죽이는 모습은 자동화되어 가는 시대에 사람이 필요 없다는 상징적 메타포를 주는 영화입니다.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에서 낭만이라는 말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에 대한 질문을 포기하지 말라. 그 질문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의 낭만도 끝이 나는 것이다."


"우리"라는 말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를 알고자 우리는 살아갑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 속에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뜨거움과 슬픔, 차가움과 기쁨 등 모순된 감정과 살아가는 재미가 있습니다. 또한 살아가는 시간 속에 사람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이 존재하기에 효율적 분석보다는 비효율적 감정이 섞이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존재하는 세상에는 비효율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빈틈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람의 정과 관계가 함께 공존하기 때문이고, 그 속에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낭만은 그런 것입니다.


살아가는 이 세상에 나라는 존재가 있고, 그 나라는 존재는 혼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존재하기에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혼자서 만든 세상도 아니고, 우리가 만들어가는 세상입니다. 그 속에 낭만이 있는 것입니다.


혼자인 듯한 새벽 시간에도 혼자가 아닙니다. 누구보다 이 새벽을 만드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 혜택을 새벽에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연 속에 공존하는 생물들의 이로운 기운이 지금의 살아있음에 선물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AI가 범용화 되고 세상이 어디까지 속도를 내며 진화할지는 모르겠으나, 효율화라는 말에 '우리'라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더욱 단절될 것은 분명합니다. 빅테크 기업의 경제적 관점에서의 빅뱅은 이미 일어나고 있고, 그런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지속적으로 앞으로 전진하며 나갈 기술의 발전은 경제적 논리로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갈수록 이 세상에는 건조한 효율만 이야기하며, 사람들이 기댈 곳은 줄어들 것입니다. 당연히 추억을 말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생각이고, 사람들과의 낭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감정에 치우친 바보 같은 단어가 되어갈 것입니다.



어느 순간 이웃이 사라졌습니다. 어느 순간 자신만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 사람들이 사라집니다. 사람들과의 케미가 사라지는 세상이 더욱 크게 다가오고 있는 줄 모릅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 비효율적 사고를 효율화시켜야 한다고 했던 시대에서, 이제는 효율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 사람들의 향기가 더욱 빨리 사라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함께 걸어가야 하는 시대에서 혼자 뛰어야 하고, 뛰어도 쫓아가지 못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조급해집니다.


조급해진다는 것은 우리를 잃어버리고,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흘러가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 시점에 우리는 이야기해야 합니다. 낭만닥터 김사부가 이야기했던 "우리가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에 대한 질문을 포기하지 말라. 그 질문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의 낭만도 끝이 나는 것이다."


속도감이 우리를 어지럽게 해도, 속도감을 벗어나 적막한 새벽의 어둠을 혼자서 오롯이 느껴봐야 합니다. 그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왜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주변의 고마운 생명들이 나를 얼마나 감싸주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낭만을 잃지 않고 자신의 색으로 혼돈스러움을 극복해 나갈 수 있습니다.


아무리 AI가 존재하는 세상이라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아무리 AI가 모든 것을 안다 해도, 자신 스스로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는 묻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람 욕심이란 게 원래 그렇게 주저리주저리 자기 합리화를 잘해대지. 어쩔 수 없었다. 이럴 수밖에 없었다. 자존심인지 욕심인지 구분도 못하고 자기변명하기만 바빠서. 내가 보니 넌 양심이 아픈 게 아니라, 니 욕심이 아픈 거야.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 중>



영화 <어쩔 수 없다> 속 주인공처럼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잃어간다며 자조하고, 잃어버린 자신을 찾지 않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요?


새벽의 적막함 속에서 나를 찾아가는 여행을 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그냥 창으로 보이는 어둠의 적막함을 바라만 보고 있어도 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앉아 밖을 바라만 봐도 됩니다. 그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어떤 의미로 우리가 살아가는지를 묻고 혼자서 이야기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어쩔 수 없다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외쳐 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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