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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DYK May 30. 2022

아버지와 이별

부모님은 서로를 의지하며 사셨다

곁에 있는 사람을 잃으면 그 상실감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크다. 외로움은 혼자라서 보다 그리움에서 나온다. 외로움이 커질수록 가슴에는 멍이 생긴다. 작은 흔들림에도 온몸이 아파온다. 주변의 말도 들려오지 않는다. 가슴 언저리에 계속 그리움이 남아 있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그리워해도 방법은 없다. 그냥 본인이 힘들고 아프다. 밖을 내다 봐도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그냥 멍한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수없이 많은 시간들이 지나가고 같이 보낸 시간이 흘러가 서로의 애증을 만들어 왔음에 그 시간의 그리움이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뒤돌아 서면 잊혀지겠지 하지만 뒤돌아서면 더 생각이 난다. 어디를 가도 내 곁에 있던 사람을 지울 수가 없다. 사는게 다 그런거라 하지만 사는게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아버님이 이 세상과 이별을 하셨다. 어머님의 그늘이 사라지고 매우 외로워하셨다. 50년 동안을 같이 사시고 어머니 임종도 못 보실 정도로 힘들어 하셨다. 그리고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4개월 후 당신도 이 세상과 이별하고 어머님 곁으로 가셨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더욱 외로워하시고 부쩍 건강이 안 좋아지셨다. 어머님이 늘 준비해 주시던 음식도 간혹 투정 부리시며 잘 드셨지만 이내 어머님이 돌아가시곤 드시는 양도 드시는 횟수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투정을 부릴 사람도 없다. 자식들은 모두 사회생활을 한다는 이유로 외지에 나가 있고 바쁘다는 핑계로 자신들의 삶에 귀착되어 있다. 간혹 아버님집에 내려가면 혼자 외로이 누워 계셨다. 그리고 귀까지 잘 안 들리시기에 전화 통화도 하기가 버거웠다. 전화 통화의 주 내용은 아주 짧았다.


"식사 하셨어요."

"잘 안 들린다. "

"밥 드셨나고요?"

"응 먹었어. 그래 잘 있어. 걱정마"


늘 전화 통화 하는 동안 잘 안 들리는 것에 답답해 하셨다. 형이 보청기를 해 주었으나 누워있는 시간이 많아지시면서 불편하다는 이유로 잘 안 하셨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쇠약해지신 모습은 큰 병의 신호였다. 병원진단 결과 암이 허리와 간으로 퍼져 말기 판정을 받으셨다. 아버지는 병원에 있기 싫으시다는 말씀과 치료하지 않겠다는 말씀을 하시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집에서 마무리를 하기로 하셨다. 24시간 간병인을 두어도 그 사람은 남이다. 어머님의 빈 자리를 채울 수도 없고 형식적 행동만 할 뿐이다. 진통제를 드셔도 누워서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형에게 말한 마지막 소원이 집에서 마무리를 하시겠다는 말씀이셨다. 가족끼리 고민이 되었다. 갈수록 더 악화되는 증상과 고통을 집에 모시는게 아버지를 힘들게 하는게 아닐까도 생각해 봤다. 그냥 요양원에서 진통제를 맞으시는게 낫지 않을까도 생각했으나 아버지가 말씀하셨 듯 집에서 모시는 걸로 결론을 냈다. 암의 고통은 크지만 정신은 온전하셨다. 말씀을 하실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우셨을 것이다. 그런데 깨어 있고 누워서 밖을 보실 때는 늘 외로움과 고독함에 눈물 흘리셨을 것이다. 어머니의 그리움, 자식들과의 부족한 시간 들이 당신의 외로움을 더욱 증폭시켰을 것이다.



아침 출근 길에 전화가 왔다. 급하게 내려오라는 전화이다. 회사로 가는 발길을 돌려 아버님에게로 향했다. 이미 집에서 돌아가셔서 병원으로 모신 상황이다. 어머니는 근육이 다 타고 소진된 상황에서 뼈만 남아서 돌아가셨던 기억이 있는데 아버님은 근육이 남아 있으셔서 시간이 있겠다는 가족들의 생각이였으나 너무 빨리 이 세상과 이별을 하셨다. 누워서 외로움과 고통을 감내하는 것보다 오히려 고통없는 편안한 곳으로 가시는게 아버지를 위해서도 자식을 위해서도 낫지 않았나 긍정적으로 생각을 해 본다. 어머님 돌아가시고서 4개월 후 아버님은 당신을 준비하시고 어머님 곁으로 가셨다. 어머니의 슬픔과는 다르지만 아버님의 외롭고 고독한 시간들이 더욱 안 쓰럽게만 느껴졌다.


아버지는 집안에 첫째였다.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5명의 동생, 거기에 자식 4명을 둔 대가족을 책임지시는 큰 사람이었다. 경찰을 하시다 적성에 안 맞아 은행에 들어가 일을 시작했다. 워낙 남들에게 피해주는 걸 싫어하시는 분이셔서 경찰이 주는 부담감을 싫어하셨다. 할아버지는 소위 한량이셨다. 증조할아버지의 많고 많던 재산을 남 좋은 일에만 쓰신 분이셨다. 60년대 트럭이 있었고 지역 땅의 곳곳이 집안의 재산이였으니 얼마나 부유했겠는가! 하지만 평생 직업을 가지시지 않고 그냥 한량으로 사시면서 당신의 삶만 사셨다. 늘 아버지는 어디를 가다가도 저 산도 저산도 우리땅이였는데 하시면서 본인이 밤나무도 심고 했다며 많이 아쉬워 하셨다. 결국 아버지는 혼자서 집안의 모든 경제적 부담을 짐어지셔야 했다. 할아버지가 본인의 위해 쓰셨던 모든 부분들이 이제는 아버지의 짐이 되어 있었다. 두분의 어르신을 모시고 5명의 동생을 지원해줘야 했고 4명의 자식을 키워야 하는 압박감으로 사셔야 했고 돈을 버셔야 했다. 돈이 많지 않아 직장을 다니시면서도 각각의 용도로 통장을 만들어 돈을 쪼개 모으셔야 했고 신발도 다 뜯어진 상태로 신고 다니시기도 했다. 점심도 은행직윈들과 먹으면 돈이 부족해질걸 걱정해서 집에 와서 식사를 하셨고 차를 타고 다니면 비용이 만만치 않을 듯 하셔서 은행에서 싸게 지원해 준 오토바이를 타고 추운 겨울에도 출근을 했다. 간혹 나를 불러 회사에서 행사하고 남은 통닭을 싸서 주셨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사시는 동안 돈을 자신을 위해 쓰신 적이 거의 없다. 대가족의 먹여 살려야 하는 중압감을 갖고 사실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시고 힘겹게 살아 오셨다. 어머니는 그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시고 아버지가 밖에서 하시는 일에 무리가 없도록 바라지를 하셨다. 집안의 모든 고통들을 감내하며 버티고 버티셨다. 그렇게 살아온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도 의지가 약해지시고 외로워 하셨다. 어머님에 대한 애뜻함과는 다르지만 아버지의 삶도 불쌍하게 그리고 힘들게 살아오셨다는 생각을 늘 했다. 늘 남에게 욕 먹지 않고 살아오셨기에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같이 일했던 동료들이 명절만 되면 찾아 오셨다. 회사 후배이셨는데 아버님이 회사를 다닐 때도 그리고 은퇴 후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늘 명절만 되면 찾아 오셨다. 그분도 젊은이에서 할아버지가 되셨는데도 그 인연을 돌아가시기 전까지 이어가셨다. 그리고 그 인연도 다 잊혀진다.


늘 아버지는 회사 일로 늦게 들어 오셨다. 추운 겨울 어머님은 고봉밥을 안방 아랫목에 이불로 덮어 놓고 아버지가 오시면 따뜻함을 유지한 고봉밥을 꺼내셨다. 어릴 적  그 시절에는 두분의 고단한 삶을 몰랐다. 얼마나 힘든 하루였을지 잘 몰랐다. 하지만 힘든 세상에서 두분이 의지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안에서 어머님의 고단함, 안과 밖의 경제를 책임져야 하는 고단함. 이 모든 고단함이 두분에게 힘든 시간이셨을 것이다. 그리고 서로 의지할 수 있었기에 버티신 것이다. 어머님은 늘 아버지 걱정이셨다. 오히려 어머니가 정신적으로 더 강하셨고 아버지를 지탱해 주셨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힘을 많이 의지했다. 자식들도 그렇게 나이를 먹고 커 왔다. 그래서 아버지는 어머니의 그늘이 너무 크셨던 것이다.


두분이 서로를 미워도 하고 답답도 하셨지만 두분이 잘 버텨주시고 이 세상에서 자식들을 지켜주셔서 감사할 따름이다. 돌봐 주었던 동생분들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아픔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건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우리 자식들은 두분의 슬픈 사연을 그리고 아름다운 세상과의 이별을 깊이  이해한다. 그리고 끝까지 자식들에게 부담 주고 싶어하시지 않았던 그 깊은 마음을 이해한다. 주무시면서 평온히 돌아가신 아버님이 오늘 따라 더 가슴 찡하게 하며 어머님과 서로 손 잡고 고통없이 저 세상에서 사셨으면 한다.


"아버지, 어머니 이렇게 키워주신 거 너무 고맙습니다. 살아 계실 때 못 하고 잘 해드리지 못한 부분 많이 이해해 주세요. 드린 것 없고 받은 것만 있는 자식입니다. 그래도 부모님 덕에 이렇게 호강하고 살고 있습니다. 떠나는 길 더 편안하게 가세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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