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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DYK Nov 06. 2022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유현준. 책 요약 책리뷰

도시를 보는 열다섯 가지 인문학적 시선













생각정리



유현준 교수가 "알뜰 신잡"에 나오기 전에 읽었던 책이었다. 제목부터 너무 흥미로워서 사게 되었고 도시에 대한 부분들을 건축과 자연, 인문학을 접목시킨 책이라 읽게 되었다. 예전 읽었던 책이지만 서재에 꽂아 있는 것을 보면서 기억나지 않는 부분들을 더듬으며 다시 처음부터 읽게 되었다. 다시 읽으니 기억 속에 일부들이 생각이 나지만 다시 인사이트와 인문학적 소양을 얻어가는 느낌이었다. 건축가이지만 인문학적 인사이트를 갖고 있는 유현준 교수는 도시가 어떻게 형성이 되었고 건축은 어떤 의미로서 도시에 자리 잡아야 하며 과거와 현재의 변해가는 시대에 건축이 어떤 메시지를 줘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건축이란 것은 건설회사나 다니는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전혀 그렇지 않다. 건물 하나에도 의미를 담아 디자인하고 그 주변의 환경과 매칭 시켜 조화를 이루며 현대화되어간다. 유교수님은 우리가 아쉽게 잃고 있는 자연과 건축물들의 조화를 꼬집기까지 한다. 책을 읽다 보면 건축을 이야기한다기보다 역사, 사회, 사람, 그리고 자연을 융합해서 이야기하고 있고 그만큼 읽으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푹 빠질 수 있는 매력이 있는 책이다.


우리는 도시 속의 가장 큰 중요 요소인 길이나 골목을 잃었다. 우리의 옛 도시 속에서 다른 집에 갈 때는 골목을 따라서 집을 찾아간다. 하지만 아파트에서는 복도나 엘리베이터를 통해서 길을 찾는다. 아파트 단지에는 골목은 없고 복도만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골목과 복도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 근본적인 차이는 하늘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우리의 대형 아파트 단지는 우리에게서 우리 머리 위의 하늘을 빼앗아 갔다.


골목길에 대한 추억은 아직도 옛사람들에게 남아 있다. 골목길은 사람의 정과 추억이 담긴 우리의 놀이터였다. 속도의 사회가 되면서 골목길의 정취는 사라지고 건축물도 속도와 밀집도에 의해 높아만 졌다. 밀폐된 공간의 아파트들로 사람들은 숨어 들어갔고 그 속에서 본인들의 프라빗 한 삶만을 추구하게 되었다. 당연히 그 안에는 더 많은 기기들이 채워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부족함에 허덕인다.


옛 도시에는 마당에 나무가 있었고, 방문을 열고 나가면 어디서나 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다. 옛 도시에서 자연은 바라보는 것을 넘어 더 적극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것이었다. 자연과 항상 소통하면서 세대 간의 교류를 촉진했던 골목길 없이 복도와 엘리베이터로 연결된 세대는 과거에 비해 더 분리되고 소외될 뿐이었다. 르 코르뷔지에의 디자인에서 자연은 일상에서 체험되기보다는 보기만 하는 대상으로 전락하면서 계획안은 실패하였다.

집은 자연과 어우러지고 소통하는 곳이다. 자연이 주는 건강함과 아름다움이 건물에 녹아내릴 때 인간은 더욱 아름다워지고 건강해진다. 집과 건물에 그런 부분이 사라질 때 인간은 건조해지고 감성과 낭만은 사라진다.

하나의 훌륭한 도시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건축물도 중요하고 자연환경도 중요하다. 하지만, 결국 도시를 훌륭하게 완성하는 것은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이다. 다양하고 다채로운 삶을 담아낼 수 있어야 성공적인 도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삶은 도시환경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이런 면에서 홍콩의 도시 속에 널린 빨래를 쳐다보자. 그 건축물은 빈민촌에 가까운 풍경이지만, 빨래가 도시에 컬러를 입히고 생동감 넘치게 해 준다. 반면 우리나라의 아파트 단지들은 모두가 오피스 건물처럼 유리창으로 도배가 되어 있다. 그 안에 사람 이사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건물이던 골목이던 사람이 존재해야 살아 움직이게 된다. 생동감이 있다는 것은 움직이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고 건물이란 구조물에 사람들이 살아가야 생동감을 얻게 된다. 아무리 좋은 자재로 건물을 멋있게 지었다 해도 사람의 온기가 사라진 건물은 죽은 건물이 된다.

건물을 짓는 목적은 누구를 보여주기보다는 살아가는 사람을 위한 건물이 되는 것이다. 먼저 사람의 행위를 디자인하는 것이 건축가라는 말이 와닿는 대목이다.


https://brunch.co.kr/@woodyk/505



좋은 건축물은 소주가 아니라 포도주와 같다. 소주는 공장에서 화학 공식에 따라서 대량 생산되는 술이다. 소주는 생산하는 사람이나 지역의 다양성이라는 가치가 반영되지 않고, 인간과 격리된 가치를 가지는 술이다. 건축물에 비유한다면 찍어 내듯이 양산되는 아파트나 지역성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국제주의 양식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반면, 포도주는 좋은 건축물 같다. 같은 종자의 포도라도 생산되는 땅의 토양에 의해서 다른 포도가 생산되고, 같은 종자의 포도와 같은 밭이라고 하더라도 그 해의 기후에 의해서 다른 포도가 만들어지며, 똑같은 재료라고 하더라도 포도를 담그는 사람에 의해서 다른 맛이 만들어지는 것이 포도주다. 따라서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로 조화를 이루어서 세상에 단 한 종류밖에 없는 포도주가 완성되는 것이다. 건축도 이같이 지구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땅 위에 특별하게 주어진 프로그램에 특정한 건축가가 개입되어서 단 하나의 디자인이 나와야 한다

건축물을 소주와 포도주로 비유를 한다. 소주는 화학주로 찍어내면 동일한 스펙이 나오지만 포도주는 시간과 습도, 온도, 지역 등 자연과의 소통을 통해 이 세상 유일한 하나가 생산되는 것이다. 표준화되는 세상사에 오히려 차별화되는 것은 이 세상 유일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인간도 각자가 이 세상에는 유일한 존재이다.


절의 대부분의 공간은 외부 공간으로 구성되어서 외부 사람이 들어와도 그저 정원 마당에 들어가는 느낌으로 쉽게 접근이 가능하다. 마치 백화점 매장에서 옷걸이 사이의 빈 공간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가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절은 점원이 와서 조금만 부담을 주면 그냥 슬쩍 나가 버리면 그만인 부담 적은 백화점 같다. 반면에 들어가고 나오기가 편안한 외부 공간 없이 내부 공간 중심으로 구성된 교회 건축물의 공간은 비신자가 문을 열고 들어가기에는 너무 큰 용기가 필요하다. 마치 독립된 옷가게에 문을 열고 들어가면 뭔가를 사야 할 것 같은 부담을 갖게 되는 것과 같다

절은 자연 속에 녹아 있다. 그리고 늘 개방되어 있다. 언제라도 누구라도 들어가고 싶으면 들어갈 수 있다. 종교라는 측면보다 자신을 찾아가는 철학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무엇을 우상화하지도 않는다. 부처는 내 안에 있다는 말처럼 나를 찾아가려는 노력이 있는 종교이다. 기독교는 신이 존재하고 절대신을 위한 공간이 존재한다. 도심에 있고 전도를 위한 활동들을 지속적으로 하면 확장해 나간다. 교회는 함부로 들어가기가 쉽지는 않다. 압도적 건물과 폐쇄된 문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조심스럽게 느껴진다. 자연과의 부분보다는 예배당에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 처음 가는 사람들에게는 부담스러움을 주기도 한다.


마당 있는 주택이 넓은 평수의 아파트보다 더 넓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마당이 계속해서 바뀌기 때문이다. 주상복합에 아무리 넓은 거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거실의 인테리어가 매일매일 시시각각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마당은 때로는 비도 오고, 햇살도 비치고, 눈이 내리기도 하고, 낙엽이 떨어지기도 한다. 아침의 동편 햇살을 받은 마당과 저녁노을의 마당이 다르고, 밤이 되어 어두운 달빛을 담은 마당은 또 완전히 다르다. 그밖에도 마당에서 이루어지는 이벤트는 다양하다.


좁고 긴 발코니에서는 바깥을 바라보는 일밖에는 못하는 반면, 정방형의 마당에서는 둥그렇게 마주 보고 앉을 수 있다. 이런 공간에서는 사람 간의 관계성이 쌍방향을 띠게 되면서 더욱 다채로워진다.
정방형의 마당이 담을 수 있고 만들어 낼 수 있는 관계성은 다양하다. 공간은 실질적인 물리량이라기보다는 결국 기억이다. 우리가 몇 년을 살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시간 속에서 어떠한 추억을 만들어 냈느냐가 우리의 인생을 결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다양하게 기억되는 공간은 우리의 머릿속에서 이벤트 별로 각기 다른 공간으로 각기 다른 기억의 서랍들 속에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서 우리의 머릿속에서 실제 크기보다 더 크게 인식된다.


한국의 전통가옥은 가운데 마당이 있다. 마당에는 나무들이 있다. 사계를 툇마루에서 느끼고 즐길 수 있다. 하루하루가 변화는 그림처럼 재미가 있다. 지루하지도 않고 자연이 집에 들어와 있다. 하지만 아파트는 늘 그 모습이다. 편안함은 아파트의 장점이다. 그리고 추위도 덜 받고 살아갈 수 있다. 전통가옥은 춥다. 자연과 소통을 한다는 것은 춥기도 덥기도 하다는 것이다. 개방되어 있어 이웃들이 언제라도 들어와 수다를 떠는 장소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당연히 마당이 있는 집은 아파트보다 더욱 넓어 보일 수밖에 없다.





과거 농경 시대에는 우리가 항상 하늘을 보면서 햇빛 아래에서 일했다면 지금은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일을 한다. 여기서 현대인의 비애가 발생한다. 심지어 창문 없이 형광등만 있는 건강하지 못한 공간에서 일하는 분들도 많다. 농부는 자연 속에서 일하고 겨울철 3개월이 휴가다. 근무 여건만 본다면 일 년에 2주일 쉬는 회사원보다 더 좋은 조건처럼 보인다. 현대인은 자연과 분리되어 사는 '자연스럽지 못한 라이프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현대인들은 고밀화된 도시 공간 구조 속에서 공간을 통해 권력의 조종을 받게 된다. 그 스케일은 도시 스케일에서 미세한 자리 배치에까지 이른다.


왜 집은 이렇게 계속 커져 갔을까? 가만히 살펴보면 커져 버린 집의 공간은 물건으로 채워져 있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눈만 뜨면 이 세상의 TV, 라디오, 신문 같은 모든 매체에서 더 많은 물건을 소유해져야 더 행복해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물건을 사기 위해서 열심히 일한다. 그리고 또 그 많은 물건을 넣기 위해서 더 큰 집을 구해야 한다. 그리고 더 큰 집을 사기 위해서 더 많이 일해야 한다. 그야말로 인간의 삶과 자연을 수탈하는 악순환이다. 10년 후에는 새로운 발명품이 나와서 그 물건을 넣을 다양한 종류의 방들이 더 필요해질지도 모르겠다. 이대로 간다면 우리 자녀들은 더 힘들게 살 것 같다.


동양과 서양의 철학은 다르다. 동양은 곡선이고 서양은 직선이다. 동양은 주변의 관계를 중요시하며 서양은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측면을 중요시한다. 건물도 당연히 그와 비슷하게 전달된다. 동양은 자연과 늘 소통하는 형태의 집을 짓고 살았지만 서양은 기하학적 공간들을 만들어 갔다. 동양의 바둑은 주변의 패를 통해 자신의 집이 커지고 작아지지만 체스는 절대 왕을 쓰러트리면 이기는 게임이다. 서양과 동양의 철학은 상이하다.





체스는 본질적으로 유목 민족의 전쟁을 기반으로 한 게임이다. 체스와 흡사한 게임으로 중국의 장기가 있는데, 장기는 말과 코끼리, 졸병, 대포 등이 나와서 전쟁을 하는 게임이다. 장기나 체스가 유목 사회의 전쟁을 기반으로 한 게임이라면, 바둑은 농경 사회의 문화에 기반을 둔 게임이다. 바둑은 마치 화전민이 경작지를 넓혀 나가듯이 빈 땅을 넓히는 땅따먹기 게임이다. 이 두 게임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바둑은 상대적이고 체스는 절대적인 게임이다. 바둑은 빈 공간을 만들어나가는 게임이고, 체스는 상대편을 죽이는 게임이다. 이러한 게임의 특징은 곧 그들의 문화적인 특징에 기인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적인 특징은 건축 공간에도 투영되어 있다.


알파벳에서 볼 수 있듯이 서양 사람들은 이처럼 기본적인 최소 단위를 추구한다. 그리스 시대의 학자들은 물, 불, 흙, 공기가 세상의 만물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라고 믿었다. 그래서 과학도 그리스 시대부터 근대까지 항상 최소 단위인 원자를 찾고, 원자보다 더 작은 양자의 세계까지 쪼개는 식으로 문명이 발달해 왔다. 알파벳 26자는 마치 화학에서의 원소기호처럼 최소한의 단위인 것이다. DNA는 생명체의 설계도가 A, G, C, T의 네 가지 염기로 만들어진 암호문으로 되어 있다는 개념이다. 마치 26개의 알파벳이 순서 배열로 다른 단어를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DNA라는 개념이 동양이 아닌 서양 과학자에게서 먼저 발견된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반면에 동양에서는 음과 양의 조화로 세상의 구성을 바라본다. 두 상반된 힘의 조화와 균형이 세상을 만든다고 보는 것이다. 건축의 경우 서양은 기하학적인 형태의 공간을 추구했다. 피라미드는 정사각형과 삼각형으로 만들어졌고, 로마의 판테온의 평면과 단면은 모두 원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반면에 동양에는 기하학적 모양보다는 자연과 어우러지는 상대적 관계성을 더 추구했다. 우리의 풍수지리 이론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생각의 근본은 상대성 속에서 가치를 찾는 이론이다.


동양의 문화의 가치체계는 관계와 비움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로 특징 지을 수 있다는 말이 너무 와닿는다. 비워 있다는 것은 채울 수 있는 것이고 비워야 더 많은 것들을 흡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워 있다는 것은 주변의 자연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고 서로의 관계를 의지하며 자신의 가치를 만들어 간다는 의미와도 상통한다.


공자, 노자, 석가모니의 영향으로 동양 문화의 가치 체계는 '관계'와 '비움'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 같은 동서양의 다른 가치 체계는 공간을 뜻하는 두 개의 단어만 살펴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서양에서의 공간을 뜻하는 단어는 'space'로, 이 단어는 동시에 우주를 뜻하기도 한다. 동양의 공간은 비어 있다는 뜻의 '공(空)'과 사이라는 뜻의 '간(間)'이 합성된 단어이다. 공간이라는 단어는 '비움’과 ‘관계’의 합성어로 만들어져 있다. 이렇듯 단어만 살펴보더라도 동양에서는 단순히 비어 있는 것 이상의 가능성을 보는 '비움'과 상대적 가치인 '관계'로서 공간을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책 속 기억하고 싶은 내용 정리(책 중 발췌)



자기 주도적인 삶도 우리가 원하는 것이고 우연성이 넘친다는 것은 우리가 도시에 사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거리가 더 많을수록 우리의 삶은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지금까지의 연구를 보면 높은 이벤트 밀도는 우리의 삶 속에서 자기 주도적인 선택권을 많이 준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같은 이벤트가 일어날 가능성이 많고 자기 주도적 선택권을 주는 거리가 더 걷고 싶은 거리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걷고 싶은 거리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이벤트 밀도 외에 다른 특징은 없을까? '공간의 속도'는 걷고 싶은 거리를 만들어 내는 정량화시킬 수 있는 거리의 두 번째 특징이다.




이처럼 공간은 움직이는 개체가 공간에 쏟아붓는 운동에너지에 의해서 크게 변한다. 이와 비슷한 현상은 뉴욕의 록펠러 센터의 선큰가든(지하나 지하로 통하는 공간에 꾸민 정원)에서도 일어난다. 록펠러 센터 선큰가든은 여름에는 정적인 레스토랑으로 운영되고, 겨울에는 움직임이 많은 스케이트장으로 운영이 된다. 같은 물리적인 공간이지만 그 공간이 의자에 앉아 있는 레스토랑 손님으로 채워졌을 때와 스케이트 타는 사람으로 채워졌을 때는 다르다. 공간은 어떠한 행위자로 채워지느냐에 따라서 그 공간의 느낌과 성격이 달라진다. 그리고 이 변화의 요소는 모두 움직이는 것들이다.



하지만 공간의 속도와 이벤트 밀도의 순서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둘을 합쳐서 매긴 순위는 신사동 가로수길 > 홍대 앞 피카소 거리 명동 > 강남대로〉테헤란로로, 우리가 데이트 코스로 선호하는 순서와 거의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이벤트 밀도와 거리 공간의 속도는 거리가 보행자에게 얼마나 호감을 주는지를 알려 주는 지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사동 가로수길이나 홍대 거리가 낮은 속도의 수치를 갖는 것은 일단 자동차 차선이 적고, 좁은 길이기 때문에 자동차가 속도를 내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홍대의 경우에는 거리 주변 곳곳에 식당이나 카페에서 법규적으로는 주차장으로 지정된 건물 앞 공간에 불법으로 데크를 설치해서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공간이 실질적으로 공간의 속도를 낮추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계절에 어울리는 한 곡의 노래가 우리의 삶의 의미를 깨우쳐 주는 것같이 감성을 울리는 건축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건축은 대중음악이 팔리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시장에서 잘 팔리는 건축이 될 것이다. 또한 그런 건축이 많아질 때 현대 도시는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구성의 변화는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 변화들은 인간에 의해서 디자인된 대로 변화되는 것이라기보다는 불특정 다수의 인간이 만들어 낸 변화들이 모여서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며 이 불특정 다수인 인간은 유기체 생명이기 때문에 도시가 유기체의 특성을 갖는다고 생각된다. 유기체 생명인 인간은 모여서 사회라는 조직을 형성하고 이 조직은 우리가 파악하거나 컨트롤할 수 없는 또 다른 유기체를 만들어 낸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같은 유기적인 인간사회가 만들어 내는 것이 도시이다. 그러하기에 완전한 도시 디자인이란 불가능하다. 디자이너가 아무리 아름다운 도시를 그려도 계획대로 진행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훌륭한 건축은 대지에 존재하는 에너지를 잘 이용하는 건축이고, 더 훌륭한 건축은 좋지 못한 에너지까지도 좋게 이용할 줄 아는 건축이다.



절은 미술관이고 교회는 경기장에 비유할 수 있겠다. 미술관은 특정 시간에 사람이 몰리지 않고 분산되어서 사용되지만, 경기장은 몇 시간의 경기 시간 전후로 사람의 이동이 많은 시설이다.



절의 건축은 영내에 들어온 사람들을 압도하지 않고 걷는 사람들이 편하게 주변을 둘러볼 수 있게 하는 한국 전통 건축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거의 절반이 공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예배당을 지을 때 돌을 쪼아야 하는 작업 공간이 필요한데 광장이 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작업장 주변으로 공사 인부들을 위한 가게들이 생겨나면서 도시가 형성된다. 수십 년의 성당 공사가 끝나면 그곳은 빈 광장이 되어서 예배를 마치고 쏟아져 나오는 사람을 받는 도심 속 중요한 외부 공간으로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교회 건축물들은 대형 예배당만 있을 뿐 건물 주변의 광장 같은 외부 공간이 없다. 아주 가끔 빈 공간이라도 주차장 정도가 있을 뿐이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스스로 수양하고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정해진 시간에 법회를 드리는 절도 있지만, 예전부터 우리에게 인식된 불교는 마치 교회의 기도원처럼 개인적으로 본인이 원하는 시간에 혼자 가서 기도를 드리고 오는 좀 더 개별적인 느낌의 종교이다. 같은 시간에 한 번에 모이는 것이 주가 되는 형식이 아니다.



자동차는 우리로 하여금 멀리 있는 공원에는 갈 수 있게 해 주었지만, 가까이 있던 마당과 거실 같던 골목길을 빼앗아 갔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얻은 것이 많다고 말해 왔지만 사실 우리는 주변의 질 좋은 공간을 팔아서 물건을 산 것일 뿐이었다. 70~80년대를 거치면서 현재는 전체 인구의 절반이 넘는 국민들이 마당이 있는 집을 팔아서 온수가 잘 나오는 아파트로 이사했다. 아파트에 살면서 우리는 마당 대신 넓은 주차장을 얻었다. 하지만 마당이 없어지니 발코니까지 확장해서 집을 더 넓히려고 안달이었다. 마당과 골목길의 부재는 고스란히 더 넓은 평형의 아파트를 구하는 갈급함이 된 것이다. 작은 마당이 있는 주택이 100평짜리 주상복합보다 더 넓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예전에 학교에서 현대 건축의 최고의 적은 형광등이라고 배운 적이 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햇볕을 받기 위해서 창을 내어 창가에 살았고, 건축가들은 자연 채광을 들여오기 위해서 재미난 단면을 고안해 내야만 했다. 그러다가 값싸게 인공의 빛을 만들 수 있는 형광등이 건축에 도입되면서부터 건축물은 더 이상 햇볕이 들어오는 디자인에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형광등이 건축 공간을 단조롭게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층 위에 2층, 2층 위에 3층을 포개 놓고 머리가 안 닿을 정도의 천장 높이만 확보한 후에 천장에 형광등을 달면 모든 빛의 문제가 해결되었다.





과거에 식량은 곧 생존이었다. 현대 사회에는 돈이 그 역할을 한다. 과거에 식량 저장의 한 방편으로 돼지를 키웠다면 현대에는 돈을 저장하는 방식으로 부동산을 산다. 부동산도 돼지나 발효식품처럼 부패하지 않기 때문이다. 돼지가 기근을 넘기는 방식이 되듯이 현대인들에게 돈이 부족한 시기를 넘기는 방식은 부동산을 처분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우리나라 문화에서 아파트는 환금성이 가장 높기 때문에 돼지의 역할을 한다



건축은 사람의 수명보다 오랫동안 지속된다.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비로소 건축은 사람의 삶을 담아내고, 사람 냄새가 배어나는 '환경'이 되는 법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우리나라에는 한국 전쟁 이후에 새롭게 지어진 '젊은'건축물들만 있을 뿐이다. 절대적 시간이 부족하니 시간이 만들어 내는 유서 깊은 도시가 안 만들어지는 것이다




건축 공간이라는 것은 사람이 머릿속에서 만들어 내는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것으로만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이렇듯 주관적인 관점에서 공간의 해석이 달라진다는 관점은 건축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에 큰 변화를 준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공간을 완전히 다른 객체의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인 해석의 결과물이라고 보는 것이다.




더 많은 이벤트는 심리적으로 기억할 것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고, 더 많은 기억들은 같은 시간을 더 길게 느끼게 만든다. 그리고 시간이 길게 느껴지면 공간은 더 크게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같은 원리에 의해서 공간을 크게 느끼게 하려면 시간을 길게 느끼게 해야 하고, 시간을 길게 느끼게 하려면 기억할 사건을 많이 만들어 줘야 한다. 기억할 사건이 많게 하려면 많은 감정을 느끼게 해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건들을 느낌과 감정으로 저장하기 때문이다. 철학자 강신주의 말처럼, 기억할 감정이 많다는 것은 인생이 그만큼 풍요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벤트가 많이 일어나는 거리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성공적인 거리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뜨는 거리가 되려면 다양하고 많은 감정을 느끼게 해줄 이벤트들이 필요하다. 그것이 쇼윈도의 다양한 상품이거나 혹은 식당에 앉아서 밥을 먹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이거나, 마주 걸어오는 사람들의 다채로운 모습이거나 어떠한 것이든 좋다. 건축가는 이런 이벤트들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할 수 있는 무대장치를 디자인하는 연출가이다.



우리의 도시에 새로 지어지는 주요 건축물들은 '나를 보라'라고 말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밖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만으로 디자인된 건물들이다. 서울이라는도시에는 자신을 뽐내는 건축물보다는 주변의 에너지를 좋게 바꾸어사용할 줄 아는 유재석 같은 건축물이 필요하다.




보편적으로 중력은 우리를 힘들게 한다. 지구는 우리를 계속해서잡아당기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이가 먹을수록 살이 처지고 늙게 된다. 엄마 양수 속에서 무중력 상태같이 헤엄치던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중력을 이기는 법을 배우게 된다. 처음에는 기게 되고 점차 익숙해져서 걷고, 급기야 뛰기까지 한다. 어린아이들은 틈만 나면 달리기 시합을한다. 이는 아마도 달리기가 태어나서 수년간 노력해서 익힌 것이라 너무나 자랑스러워서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문화평론가는 어른과 어린이의 차이점을 가까운 거리를 갈 때에 뛰면 어린이, 걸으면 어른이라고 말했다. 완전 공감된다.



동양은 노자를 비롯해서 상대적인 사고에 기반을 가지고 비어 있는 것에 가치를 두고 발전했고, 서양은 절대적이고 수학적인 논리적 기틀 위에 문화를 발전시켰다. 먼저 동양을 살펴보자. 동양의 대표적인 사상가중 한 명인 공자는 최고의 가치를 '중용'이라고 말했다.



노자의 경우에는그의 유명한 저서 『도덕경』 11장에서 "그릇이 쓰임을 가지는 것은 찰흙이 단단히 굳어 흙의 성질은 없어지고 그릇의 공간이 생겼기 때문이다.방이 방으로 쓰임이 있는 것은 창과 문이 있기 때문이다. 벽을 쌓고 창호를 뚫었기 때문에 방이 된다."라고 말했다. 이 글의 내용을 살펴보면 물건의 유용한 기능은 비움에서 나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양의 사상가들은 절대 선을 추구한다. 우리가 고등학교 국민윤리 시간에 플라톤은 '이데아'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배웠다. 이데아라는 것은 절대적인 선을 뜻하는 가치로서, 실존하지만 우리는 직접 볼 수 없는 것이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에서 우리 인간은 손발이 묶여서 동굴의 벽면을 바라볼 수 있는데 그 동굴 벽에 이데아에서 온 그림자만을 바라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의 사상에는 이데아 같은 절대적인 가치관이 있다. 따라서 서양의 기독교에는 이데아와 비슷한 절대적인 선의 가치를 반영하는 천국이 있는 반면에 상대적인 가치관을 가진 동양에서는 샹그릴라(중국 윈난성 디칭장족 자치주에 현(縣)이다. 영국 소설가 제임스 힐턴의 소설에서 지상에 있는 '이상향'으로 등장한다.)나 무릉도원이있을 뿐이다. 무릉도원은 한 어부가 배를 타고 가다가 길을 잃어서 어느곳에 갔더니 신선들이 죽지 않고 오래 살면서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는마을이다. 이처럼 샹그릴라나 무릉도원은 모두 우리가 사는 세상과 동일한 세상 어딘가에 있다고 보는 것이지 우리가 죽어서 가는 곳으로 보지는 않는다. 서양은 절대적인 가치를 갖는 세상이 있고, 그 신적인 선(善)을 수학적인 방식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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