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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DYK Nov 18. 2022

미래를 예측하는 법

새옹지마는 미래를 말하고자 한다.

사람들은 미래의 흐름을 현재의 추세를 통해 예측하려 한다.


경제의 매크로적 시각도 현재와 과거의 경제 추세를 보며 예측을 한다. 미래학자들은 세상의 변화를 현재에 벌어지는 현상과 발전을 통합적으로 생각하며 미래를 예측한다. 역술가는 주역의 통계들을 보며 개인의 미래를 예측한다. 관상가는 많은 다양한 사람들의 얼굴 형태를 본 경험으로 개인의 미래를 예측한다. 그런데 진짜로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이렇게 예측하고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돈을 많이 풀어 세계경제가 거품이 많이 끼어 거품이 빠질 것이다. 그때는 경제적 위기가 도래할 것이다. 3년 내로는 반드시 올 것이다'" 현재 벌어지는 현상을 보다 보면 미래의 흐름을 예측할 수 있다. 역술가나 관상가들도 도움을 요청한 사람들을 상담하고 면담하다 보면 그 사람의 상황과 흐름을 예측하고 그에 따른 미래를 이야기하기 할 수는 있다. 이 정도라면 누구나 말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누구나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언제까지 무엇이 어떻게 된다고 구체적으로 예측할 수 있고 확언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경제가 언제 꺾일지 본인이 언제 죽을지 언제 성공할지 그것은 신의 영역이다. 누구도 예단하거나 예측할 수 없다. 왜냐면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는 수없이 많은 변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변수를 다 고려한 예측은 있을 수 없다. 나비효과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작은 나비의 바람이 온 세상을 어떻게 흔들어 놓을지 모르는 것이다. 또한 세상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서 같이 동조화되고 있다. 지역적, 환경적, 경제적으로 거의 모든 분야가 연결되어 있어서 작은 변수에도 세계가 같이 움직이고 요동친다. 수많은 변수를 어찌 인간은 이해하고 그 변수에 의해 변화되는 미래의 모습을 예측할 수 있겠는가? 그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흐름을 이치에 맞게는 말할 수 있다. "바닥에 가까워지면 올라가고 너무 높아지면 떨어지는 것은 이치이기에 어떤 현상이 과해지면 언젠가는 줄어들고 너무 떨어지면 다시 회복한다" 이거는 예측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옛날 중국의 북쪽 변방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 노인이 기르던 말이 멀리 달아나 버렸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위로하자 노인은 "오히려 복이 될지 누가 알겠소."라고 말했다.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그 말이 한 필의 준마를 데리고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축하하자 노인은 "도리어 화가 될는지 누가 알겠소." 라며 불안해했다. 그런데 어느 날 말타기를 좋아하는 노인의 아들이 그 준마를 타다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걱정하며 위로하자 노인은 "이것이 또 복이 될지 누가 알겠소." 라며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어느 날 마을 젊은이들은 싸움터로 불려 나가 대부분 죽었으나, 노인의 아들은 말에서 떨어진 후 절름발이였기 때문에 전쟁에 나가지 않아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_나무 위키 발췌

 

세상을 살다 보면 내가 잘하고 싶다고 잘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안 되고 싶다고 안 되는 것도 아닌 것들이 많다. 어떨 때는 내가 안 한 게 너무 잘한 일이고 내가 한 일이 너무 잘못된 일일 때도 있다.


젊었을 때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신경 쓰지 않으면서 앞으로 전진하며 도전하는 삶을 살아가지만 나이가 들 수록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흘러가는 것들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승진과 성공을 논할 때 많은 사람들이 겸손하게 운이 좋았다는 말을 한다. 그런데 진짜로 성공에는 운이 필요하다. 그 운이라는 것은 누구도 예측하기 쉽지 않은 것이다. 미래를 예측해서 어떤 운이 올지를 골목에서 기다리다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살이에는 변수가 수없이 많기에 언제 나에게 불운이 올지 행운이 올지 절대 알 수 없는 영역이 된다. 그래서 오히려 사람들은 일희일비하는 모습보다 담담하고 대범하게 행동하는 것이 더 낫다. 또한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기에 겸손하게 세상을 대하여야 한다. 지금의 안 좋은 상황이 오히려 미래에는 좋은 상황으로 변할 수 있고 지금의 좋았던 상황이 미래에는 안 좋은 상황으로 전환될 수 있다. 전화 위복이란 말이 이런 상황에 적확한 표현일 것이다. 전화 위복, 새옹지마라는 용어는 절대로 우리가 미래를 섣불리 예측할 수 없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회사를 다니며 직장인들은 일희일비한다.


어느 때는 기분 좋게 일을 하다가도 어느 때는 기분이 굉장히 상한 상태로 일을 하게 된다. 회사 내에서도 여러 변수들이 살아서 움직이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상황이 달라진다. 그러다 보면 어느 친구는 우울모드이고 어느 친구는 행복 모드로 빠지지만 모든 직장인들은 그 상황이 수시로 바뀔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 근무를 한다. 회사라는 매트릭스 안에서는 당연히 벌어지는 일상이다. 회사라는 구조는 나의 의지와 일치되며 움직여지지 않는다. 매트릭스 안에서 개인들의 역할로 성과를 내고 운영되는 구조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로서만으로 매트릭스를 움직일 수는 없다. 그리고 우리는 늘 그 매트릭스에서 일하는 존재로서 보상을 받는다. 그렇기에 일희일비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회사뿐만이 아니라 인생의 큰 그림에서는 새옹지마, 전화위복이란 크나큰 흐름이 있다.  지금의 불행이 오히려 행운이 될 수 있고 지금의 행운이 나중에 불운이 될 수도 있다. 회사생활이던 인생이던 다 마찬가지로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에 오히려 더 섣불리 자신을 놓아서는 되는 것이다.

 

많은 후배들이 찾아와 면담을 통해 자신의 비통함과 억울함, 그리고 슬픔을 이야기할 때가 있다.


맞다. 그 순간은 그들에게 너무 힘들고 너무 답답할 것이다. 또한 억울할 때도 있을 것이다. 스스로의 답답함을 그래도 풀고 싶어 찾아오는 것이다. 그럴 때 많이 이야기하는 말이 새옹지마이다. 오히려 그런 과정 속에서 좋은 변수들이 작용하여 그들을 더 성장시켜 줄 수 있다고 말하곤 한다. 모든 것에 사이클이 있고 매일 좋을 수도 매일 슬플 수만 있지 않다. 하지만 여러 과정과 힘듦 속에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자신 스스로를 현실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간절하다면 행동해야 하고 간절하다면 더욱 고민해야 하고 간절하다면 달라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 간절함이 어디까지 상황을 변화시킬지는 모르지만 그런 움직임 속에 좋은 운들은 그를 따라다닐 것이다. 그것도 예측할 수 없지만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보다는 움직이고 행동할수록 좋은 운이 따라올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리라 생각한다.


특히 좋은 후배들이 일희일비하며 자신을 잃어가지 않았으면 한다. 회사라는 구조는 그들을 일희일비하게 만드는 구조이지만 그런 틀에 자신을 녹여 버리지 않았으면 한다. 오히려 새옹지마라는 말을 되새기며 담대하게 움직였으면 한다. 그리고 자신을 더 객관화했으면 한다. 이렇게 말하는 나 스스로도 늘 일희일비하며 살아간다. 정말 어떨 때는 이렇게 사는 게 맞는가도 고민이 되기도 한다.


 생옹지마, 전화위복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매우 묵직하다. 우리의 미래는 예측 불가능하고 일희일비보다 담담하고 대담하게 행동하며 삶에 겸손함을 갖고 살아가라는 메시지를 우리의 삶에 던져 준다.
당신은 오늘 어떠한가?
혹시 일희일비하며 스스로를 괴롭히지는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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