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서점에서 '17년도에 발간된 이기주 작가의 '말의 품격'을 사게 되었다. 50쇄가 넘도록 많은 독자층을 갖고 있는 책이다. 말과 관련된 책을 사서 본 적은 거의 없던 것 같다.
잠시 눈으로 살짝 읽어 보니 짧은 주제들을 힘 있게 써내려 가는 필체가 느껴졌다. 베스트셀러였지만 발간될 당시에는 나에게 끌리는 책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책의 의미가 전혀 퇴색되지 않고 그대로 그 힘을 갖고 있는 듯했다.
말의 중요성, 말의 의미, 청취의 가치, 말의 품격을 짧지만 힘 있게 써내려 간 책이다.
말은 무기가 되기도 하고 상대에게 힘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개인마다의 언향이 있다. 말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을 듣는 것도 중요하다. 말은 독백을 할 수 있지만 대부분 상대를 두고 하게 된다. 한번 뺃은 말은 멀리 날아가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온다.
말에는 품격이 있다. 전달하는 사람의 태도와 진정성에 따라 같은 단어일지라도 다르게 전달된다. 가슴속에 담은 생각들이 말로 전달될 때 말은 생명을 갖고 움직인다. 작은 단어 하나가 세상을 움직이게 할 수 있고 작은 단어 하나가 세상을 아프게 할 수도 있다.
말은 힘이 있고 독이 있다. 그리고 말은 그 사람의 인품을 드러낸다. 그렇다고 늘 좋은 말과 아름다운 말만을 하며 살 수는 없다. 강약이 조절되고 균형 잡힌 말품이 있어야 호소력이 있고 메시지를 정확히 전달할 수 있다. 강하다고 나쁜 것이 아니고 약하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상황과 상대에 맞게 적절한 밸런스가 존재해야 말에는 품격이 생기는 것이다.
말을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들 속에 인향이 있다. 고유한 자신만의 말의 향기가 존재하기 때문에 말을 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말의 향기는 멀리 날아 무고한 사람들에게 상처가 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치유의 약이 되기도 한다.
책을 읽다 보면 공감되는 문구들이 많다. 말에 대한 주제를 갖고 이렇게 의미 있고 멋있는 글을 쓴다는 것에 이기주 작가의 내공이 느껴진다.
"삶의 지혜는 종종 듣는 데서 비롯되고 삶의 후회는 대개 말하는 데서 비롯된다. _ 이청득심"
책 속 기억하고 싶은 문구들
<말의 품격 中, 이기주 저>
"모든 힘은 밖으로 향하는 동시에 안으로도 작용하는 법이다. 언어의 힘도 예외가 아니다. 말과 문장이 지닌 예리함을 통제하지 못해 자신을 망가뜨리거나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들이 비일비재하다.
나는 인간의 말이 나름의 귀소 본능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언어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가려는 무의식적인 본능을 지니고 있다."
천하의 덕장으로 묘사된 유비 역시 그러한 유형으로 볼 수 있다. 덕장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몰리는 법이다. 유비는 자신의 덕을 깃발 삼아 훌륭한 인재를 불러들였고 그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제갈량을 초빙하는 과정에서는 세 번이나 찾아가 고개를 굽히며 도움을 청했다. 겸손과 굽힘과 협업을 통해 난제를 해결한 유비의 세력은 눈덩이처럼 붙어났다. 유비의 진정한 무기는 칼이 아니라 덕이었다.
옛말에 '이청득심'이란 말이 있다. 귀를 기울이면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일리가 있다. 독일의 철학자 게오르크 헤겔은 "마음의 문을 여는 손잡이는 바깥쪽이 아닌 안쪽에 있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상대가 스스로 손잡이를 돌려 마음의 문을 열고 나올 수 있도록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한 것
언젠가 방송인 신동엽이 말하는 방식을 유심히들여다본 적이 있다. 신동엽은 조금 비약해서 얘기하면, 한 번 말하고 두 번 듣고 세 번 맞장구를 를 치는 식으로 방송을 진행한다. 신동엽은 출연자가 말할 때 함부로 끼어들거나 중간에 말허리를 꺾어 들어가지 않는다. 그저 출연자가 편안하게 얘기를 꺼낼 수 있도록 배려하며 대화의 장을 조성한다.
중용은 기계적 중립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용은 단순히 중간 지점에 눌러앉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여건에 맞게 합리적으로 위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다를 떠다니는 배도 중용의 힘으로 파도를 밀쳐내고 물살 위에서 버티는 게 아닐까 싶다.
대개 선박은 출항 전 배 밑부분에 평형수를 넣는다. 파도를 만나 배가 한쪽으로 기울면 가만히 있던 평형수는 반대 방향으로 이동해서 선박의 무게를 절충하며 중용의 중심을 잡는다.
오히려 갈등과 다툼질 앞에서 서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그 사실
을 업신여기지 않을 때 오해의 가능성은 줄어든다.
'먹다'라는 동사와 가장 가까운 말은 '살다'일 것이며, 자식이 밥을 먹었는지 궁금하다는 건 잘살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 부모들이 시도 때도 없이 자식에게 전화를 걸어 "밥 먹었냐?'하고 물어보는 것도 이런 배경이 작용하는 게 아닐까 싶다.
중요한 것은 말을 잘하는 게 아니라, 적절한 때에 말을 거두고 진심을 나눌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닐까. 숙성되지 못한 말은 오히려 침묵만 못 하다.
인생을 살다 보면 사람의 진심과 속마음은 간결한 표현에 묻어나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생각과 느낌을 말속에 짜임새 있게 담아서 전달할 수만 있다면 굳이 말의 분량과 길이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말은 오묘하다. 말은 자석과 같다. 말속에 어떤 기운을 담느냐에 따라 그 말에 온갖 것이 달리 붙는다.
"근자열 원자래"
'가까이 있는 사람을 기쁘게 하면 멀리 있는 사람도 모여들게 마련"이라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둔감력은 좌절감을 극복하는 마음의 근력 또는 힘을 의미하는 '회복 탄력성 resience' 같은 단어와 어감이
묘하게 겹쳐진다. 타인의 말에 쉽게 낙담하지 않고 가벼운 질책에 좌절하지 않으며 자신이 고수하는 신념과 철학을 바탕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힘, 그렇게 삶을 바라보는 세계관이 바로 둔감력이다.
칼은 칼집에 있을 때 위엄이 있다. 무작정 꺼내 들면 칼의 위력은 줄어든다. 아마 말도 그러할 것이다. 적절한 둔감력을 바탕으로 유연하게 휘두를 때 말의 품격은 더 해지며 언력은 배가된다.
삼라만상 모두가 공부의 자원이다. 진리와 이치를 먼 데서 찾을 필요가 있을까 싶다. 주변을 진득하게
응시하면 어느 순간 진리에 도달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인간의 말이 나름의 귀소 본능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언어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