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너무 늦거나 이른 건 없고, 꿈을 이루는 데 제한 시간은 없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영화를 보고 싶어도 볼 수 있는 곳은 TV가 전부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시골에 살다 보니 동네에 변변한 영화관도 없었고 영화관을 찾아가 문화생활을 즐길 만큼 풍족한 시절도 아니었습니다.
정규프로그램을 송출하는 KBS, MBC 외에는 영화를 접할 기회는 없던 시절입니다. 주말이 되면 주말의 명화, 토요명화, 일요명화를 보기 위해 TV 주변으로 가족들이 모였고 연휴 때는 TV에서 어떤 영화가 방영되는지 종이 신문에 나오는 TV편성표에 줄을 치며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이때는 한국영화의 수준이 지금처럼 고퀄러티가 아니라서 TV에서 방영되는 영화는 대부분이 미국영화와 홍콩영화였습니다.
TV에서 방영되는 영화를 보며 어린 시절 작은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저런 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꿈 또는 영화를 언제라도 볼 수 있는 영화평론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TV에서 방영되는 미국영화는 서부극이 꽤 많았습니다. 황야의 무법자, 장고, Once upon a time in west, 뛰니티 등 많은 영화들을 보고 자라며 미국이란 나라를 궁금해했습니다. 서부극의 클라이맥스는 악당과 주인공이 마주하며 결투하는 장면입니다. 그때 흘러나오는 음악들은 영화의 장면을 잊지 못하게 하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음악 소리는 귓가에 맴돌게 됩니다.
그들은 과정보다는 큰 성취를 원하지, 하지만 변화는 작은 일의 성취가 모여서 이루어지는 거야 <비포 선셋>
미국 액션 영화는 카레이싱 장면들이 압권이었습니다. 넋을 잃고 보게 됩니다. 지금이야 흔한 카레이싱 장면이지만 어린 시절 그런 장면은 미국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할리우드라는 곳은 상상을 현실화하는 곳이었고 할리우드 뉴스는 가슴을 두근두근 하게 만들었습니다.
러브스토리, 록키, 슈퍼맨 등 다양한 장르의 미국영화를 접하면서 미국이란 나라를 동경하게 되었고 미국영화가 주는 카페인 효과가 커져만 갔습니다. 록키의 음악과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 없고 아직도 삶에서 힘이 들 때는 유튜브에서 록키 1편을 찾아 잠시라도 보며 영상과 음악을 들으면 다시 에너지가 생기기도 합니다.
연휴 때는 홍콩영화가 TV를 장식합니다. 성룡영화는 메인 영화였습니다. 어찌나 영화를 많이 찍었는지 연휴는 성룡의 시간입니다. 폴리스토리, 취권 등 계속 봐도 질리지도 않고 유머와 액션이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줍니다. 그렇게 어린 시절 TV 속에서 보여주는 영화들을 보며 영화라는 세계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일요명화는 연말이 되면 시청자가 뽑은 명작들을 순위대로 보여주며 영화 마니아들을 TV 앞에 불러들였습니다. 라디오 방송에서는 영화음악을 다루는 프로그램들이 있었고 카세트테이프를 틀어 놓고 본인이 좋아하는 영화음악이 흘러나올 때 녹음을 하며 자신만의 영화음악 테이프를 만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창밖을 내다봐.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으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거야. 조용히 귀를 기울여봐. 너의 가슴에서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거야. 눈을 감아봐. 입가에 살짝 미소가 띠면 당신이 사랑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거야 <클래식>
어린 시절 대형스크린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동네에는 영화관도 1개 정도 있었습니다. 바닥에는 쓰레기들이 가득한 허름한 영화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고 싶은 사람들은 500원만 내면 들어와서 영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007 시리즈는 사람들의 영화심을 흔들어 놓았고 그 시절 상상을 초월하는 액션신들은 할리우드를 동경했습니다. 중학생이 되면서 비디오가 있는 친구네 집에 가서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온 영화테이프들을 돌려 보곤 했습니다.
람보, 터미네이터, 록키 시리즈, 탑건 등 지금 들어도 유명한 영화들을 친구들과 보면서 영화 이야기로 밤을 새기도 했습니다. 보고 싶은 영화가 영화관에 개봉되는 날을 기다리며 주말은 친구들과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습니다. 영화관에 가면 영화 팸플릿을 가져와 모으는 재미에 푹 빠지기도 했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는 친구들과 쉬는 시간과 하교시간에 영화에 대한 이야기로 시끄러웠습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사랑과 영혼, 다이하드 시리즈에 빠져 늘 크리스마스의 개봉작들을 기다리곤 했습니다. 안정효 작가의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라는 책을 읽으며 영화라는 세상에 빠져 있던 어린 시절 두 청년을 생각하기도 하며 한겨레에서 펴낸 '씨네 21'을 읽으면서 영화에 대한 깊이와 지식을 경험하게 됩니다.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건 풍선껌을 씹어서 방정식을 풀겠다는 것만큼이나 소용없는 짓이라고 했다. <어바웃 타임>
대학시절에는 단성사, 서울극장, 피카드리 극장은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전화선을 이용한 온라인 채팅의 만남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접속'이란 영화를 보며 한석규와 전도연의 순수한 사랑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채팅을 통해 만남을 갖기도 했습니다.
대학시절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끝나는 시점은 비디오테이프를 6개 정도 빌려와 하루 종일 끼니도 잊은 채 어두운 방에서 혼자 보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영화 6편을 보면 어느새 새벽이 오고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습니다.
어린 시절 영화에 관한 추억들이 갑자기 되살아 나는 것은 나이 들어감에 대한 아쉬움에서 온 현상인 듯합니다. 아이와 이야기를 하다가 '시간이 정말 빨리 흘러가네'라는 말을 제가 던졌습니다. 아이도 자신이 중2라며 초등학교에서 벌써 중학교 2학년이 되었다고 맞장구를 치어 줍니다. 그러면서 정말 시간이 빠른 듯하다고 말해 줍니다.
벌써 50대 초반이 되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고 아들에게 말합니다.
과거는 흘러갔고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렇지? 그럴 땐 바로 신경 끄고 사는 게 상책이야 <라이온 킹>
"아직도 아빠 마음은 젊지만 신체적으로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부정할 수 없네. 이제는 너하고 운동을 해도 내가 다 지니. 꼬마일 때는 아빠가 다 이겼는데 이젠 아들에게 지는 나이가 되었네"
나이 들어감을 인정하지만 기억하고 싶던 어린 시절의 추억들은 가슴속에서 움직입니다.
불을 끄고 잠에 들려고 할 때 어린 시절 보았던 영화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갑니다. 아직도 영화들이 기억나는 이유는 그때의 강렬함과 낭만이 아직도 살아 있고 그 시절의 빈곤 속에서도 작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을 지워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바로 이 세상이야 <캐스트 어웨이>
옛날 어린 시절의 영화는 부족하고 투박하지만 낭만이 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지금의 현란한 기술과 특수효과가 작용하는 OTT의 영화는 풍요 속의 빈곤감이 더 크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에는 영화를 보고 싶은 애착이 강했고 한 편을 보기 전의 설레는 마음은 이루 말할 수도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지금은 대형스크린이 있는 영화관도, 편안하게 볼 수 있는 OTT도 그다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불편하고 부족했던 과거의 영화 사랑이 더 간절했던 것 같고 부족했기에 더 많은 추억들이 만들어졌던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어 이런 생각이 드는 듯합니다.
소중한 순간이 오면 따지지 말고 누릴 것. 우리에게 내일이 있으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영화에 대한 추억을 잊지 않고 싶습니다. 간혹 예전 영화가 TV에서 나오면 넋을 잃고 보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 있기도 합니다. 지금의 현란한 액션도 좋지만 과거 성룡의 취권이 더 재미있고 현란한 SF의 대작보다 터미네이터와 다이하드의 둔탁한 액션이 더 흥미롭기도 합니다.
특수효과 없는 날 것의 록키가 인생의 쓴 맛을 보며 챔피언을 위해 훈련하는 장면들이 지금은 더 맛갈집니다. 과거의 영화 장면들이 아직도 기억에 남고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나의 어린 시절이 그런 영화와 같이 나이를 먹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도 나이를 먹습니다. 영화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추억이 됩니다. 그렇게 내 주변의 것들이 나이 들어가는 것은 분명 내가 시간을 거스를 수 없이 시간의 흐름을 타고 흘러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어린 시절의 순수함이 아직도 내 마음을 울릴 때 그 순수함이 지켜주는 추억들은 아직도 내가 살아 있음에 감사함을 느끼게 하는 순간들입니다.
오늘은 옛 영화 한 편을 꺼내 울고 웃고 그리고 어린 시절의 '할리우드 키즈'가 되고 싶습니다.
사랑이 처음부터 풍덩 빠지는 줄만 알았지. 이렇게 서서히 물들어 버리는 것인 줄은 몰랐다. <미술관 옆 동물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