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도 마음도 잠시 휴업

쾰른-본-코블렌츠 3박 4일 여행

by woogeun



쾰른-본-코블렌츠(3박 4일) 여행을 마치고 베를린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는 순간부터 이상하게 “자신감”이 몰려왔다.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감정. 도파민이 미친 듯이 분비되는 느낌이었다.




일말의 의무감 없이 자유로운 여행이었다. 파리의 에펠탑이나 이탈리아의 콜로세움 같은 것이 없는. 발길을 강철 자석처럼 끌어들이는 목적지가 없었다. 그렇기에 소박했다. 베를린과 서울보다는 작은 도시들을 옮겨 다니며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그저 지켜보았다. SNS가 마치 이 도시에서는 사회기능망으로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사람들은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지하철은 소리로 붐볐지만 기분 나쁜 소음은 아니었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파는 스타벅스가 내 여행지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숙소였다. 에어비앤비의 캐치프레이즈인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를 처음으로 몸소 느끼게 해 준 숙소에 이틀간 신세를 졌다. 무심하게 쌓아 올려진 책들. 스타워즈 광팬인 걸 자랑하는 듯한 포스터들. 편안한 매트리스 그리고 높은 천장. 책상 위의 현미경과 DJ기계까지. 자신의 취향을 물질로 환원할 수 있는 능력 있는 30대 중반 남자의 집 같았다. 숙소를 처음 들어선 순간부터 호스트의 모습이 너무 궁금했고 이 소원은 체크아웃할 때 호스트를 우연히 마주칠 수 있어 이룰 수 있었다. 상상하던 대로 정말 멋있는 분이었다. 이분의 숙소가 아니었다면 이 여행은 정말 다른 궤적으로 흘러갔을 수 있었을 텐데. 불편한 UX와 호텔보다 낮은 만족도를 주는 객실들로 에어비엔비에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는데 이 숙소가 되살렸다.


높은 천장은 안정감을 준다



하이라이트가 숙소였다고 집돌이만을 한 것은 아니다. 사실 이 여행은 같이 교환학생을 온 한국 친구들끼리 본에 잔뜩 만개한 벚꽃을 보려고 기획된 것이었다. 하루만 일정을 공유했고 이후에는 각자 스케줄대로 뿔뿔이 흩어졌다.




본의 벚꽃은 묵직했다. 한국의 벚꽃과 비교하자면 더 짙은 분홍색이었고 봉오리 근처를 잎들이 방패처럼 둘러싸고 있어 벌크업한 큰 형님들처럼 보였다. 이런 묵직한 벚꽃들이 500m가량 쭉 펼쳐진 거리를 걷고 있다 보니 벚꽃 동굴을 통과하는 것만 같았다. 벚꽃엔딩을 들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수많은 사진을 찍었지만 한 장을 건지지 못해 아쉬울 따름이다. 사진사의 잘못은 아니다. 수많은 사진사가 있었는데 마음에 들지 않다는 건 내게 문제가 있다는 거니깐. 다이어트 해야겠다.


묵직 벚꽃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여의도 거리가 더 마음에 든다. 벚꽃은 본디 연약하여 비바람이 조금이라도 불면 다 지는 것이고, 매우 민감하여 시기를 조금이라도 늦추면 자취를 감추어버리는 존재라고 내 마음속에 자리 잡아 있다. 이런 까다로운 성격이 벚꽃을 더욱더 매력적이게 한다. 하지만 본의 벚꽃은 강인한 전사 같아 비바람을 견뎌내고 언제든지 볼 수 있을 것만 같다. (실제로는 아니지만) 벚꽃엔딩을 들으며 상상했던 벚꽃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본의 벚꽃은 여전히 그 자체로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굳이 본의 벚꽃을 보러 독일 이외의 지역에서 힘들게 올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본 주위에 있다면 한 번 정도는 꼭 보는 건 추천드린다.



벚꽃 거리의 시작이지만 마지막에서야 보았다




벚꽃을 제외하면 이후에는 정해진 게 없었다. 쾰른에서 저녁을 먹고 시간이 남아 라인강을 걸으며 쾰른 대성당이 보여 무작정 걸어가서 밤에 사진을 찍었다. 즉석으로 나온 생각이었다. 코블렌츠에서도 같이 갔던 동생이 꼭 먹고 싶다던 유럽 2위의 젤라토 집을 제외하면 꼭 해야만 하는 것은 없었다. 먹어본 결과 베스킨라빈스보다 맛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쾰른 대성당



되돌아보니 내 짧은 여행사 중 처음으로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쉰 여행이 아닌가 싶다. 휴양지에 가서 몸이 쉰 여행은 있었지만 뇌는 끊임없이 미래를 설계하기 바빴고 무엇인가로 가득 차 있었다. 인생이나 진로 같은 무거운 건축물일 때도 있었지만 당장 여행 중에 한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어디를 가야 할지도 부담스러웠다. 다만 이번 여행은 정해진 게 없었다. 내킬 때 생맥주를 한 잔 시켜 밖에서 들이켰고 잠이 오니 그냥 잤고 맥주를 잔뜩 먹고 늦잠을 자고 좋은 숙소에서 일어나지 않고 킹덤을 봤다. 어렸을 때의 내가 보면 하늘에 돈을 뿌리는구나 라고 생각했을 것 같을 정도로 평소의 나와 맞지는 않았다.



아마 마음이 쉬었더니 이제 다시 달리고 싶나 보다. 옛날 기차가 증기기관으로 칙칙 소리를 내며 증기를 내뿜듯이 자신감이 미친 듯이 올라왔던 이유도 잠깐 한숨 돌렸기 때문 아닐까. 하루라도 빨리 일상을 다시 시작하고 싶었고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던. 항공기에 오르기 전 이 심정을 저장하여 언제든지 꺼내고 싶은 생각이 마구 들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지금 내게 다쳐온 문제와 혼란은 아무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비행기에 오르고 목표 메모장 맨 위에 “자신감 가지기”를 슬쩍 밀어 넣었다.



코블렌츠에서 본 두 강이 한 곳에서 만나는 모습



솔직히 이런 여유로운 여행을 계속 반복하지는 못하겠다. 집보다는 밖이 더 좋고 못 본 게 아직 너무 많다. 하지만 이런 몸과 마음이 둘 다 휴식할 수 있는 여행을 알아서 너무 기쁘고 이 여운을 계속 길게 이어나갈 수 있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



언젠가 이번 여행을 떠올리면 벚꽃, 대성당, 숙소가 생각나겠지만 가장 소중한 순간은 돌아오는 비행기 탑승 전 가슴이 벅차오르던 그 기분일 것이다. 여행의 또 다른 매력을 찾게 되어 행복하다.


본에는 하리보스토어도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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