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것들에 대하여]

1장 [시간] 2. 사라진 계절의 향기와 습도

by 박동욱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면

먼저 기억나는 건 사람도, 사건도 아니었다.

늘 그 순간을 감싸던

계절의 향기,

습도의 밀도,

그리고 살결을 스치던 바람이었다.

어느 여름날,

햇살이 잎사귀를 투과하며 떨어지던 골목,

그늘 아래 머물던 짧은 정적,

차가운 아이스커피의 결로와

그 위로 스쳐 지나가던 라벤더 향수의 흔적.

그건 '기억'이기보다는

감각이었다.

기억은 말로 떠오르지 않았고,

감정은 의미보다 먼저

온도와 냄새로 되살아났다.

한때는

매 계절이 선명하게 내 안에 쌓여갔다.

가을은 책 냄새였고,

봄은 귤껍질을 말리는 햇살이었다.

겨울은 첫 입김 속에 녹아드는 말 한 마디,

그리고 여름은 창문 사이로 몰래 들어온 바람 한 줄기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 계절들이 조금씩 사라진다.

정확히는,

나의 몸이 기억하던 계절의 채취가

점점 희미해진다.

사람이 나이 들어간다는 건

그 계절을 덜 느끼게 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같은 여름이어도,

어릴 적 그 ‘여름’과는 다르다.

같은 빗소리인데도,

그때처럼 마음이 젖지 않는다.

그런데도

가끔,

정말 가끔—

바람 한 줄기 속에서

그 시절의 냄새가 스친다.

아무 이유 없이 기분이 뭉클해지는 날엔

언젠가의 여름이

잠시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는 신호일지도.

그럴 때면,

나는 조용히 눈을 감는다.

사라진 계절을 떠올리며,

아직도 내 마음 어딘가에

그 잔향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감사해진다.

마치 오래된 향수처럼,

이미 다 쓴 줄 알았는데

뚜껑을 열면 아직 마지막 한 방울의 향이 남아 있는 것처럼.

이전 02화[사라지는 것들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