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선 속의 이슈
“요즘 애들은 말이야. 뭐든 자기 생각대로 판단하고 행동해. 잘하면 상관없겠지만, 대충 해놓고 지적하면 자기가 맞다며 우겨. 근거도 없어. 자기애는 또 얼마나 심한지, 자기 자신을 너무 믿고, 소신과 뻔뻔함도 구분 못 해. 감정만 앞세우면서도 꼭 존중해달라고 해.”
이런 말, 한 번쯤 회사 복도나 회의실 어귀에서 들어본 적 있을 거다. 겉으론 'MZ세대 인성 특징' 같은 얘기로 포장하지만, 결국 이렇게 바꿔도 별 차이 없지 않을까.
“나는 이런 후배들이 불편하다.”
정작 먼저 생각해볼 건 후배의 인성 자체가 아니라, 도대체 왜 이런 모습이 ‘문제’처럼 느껴지는지다.
“본인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실행한다”는 말만 따지면 사실 칭찬처럼 들린다. 예전에는 이런 걸 ‘주도성’이라고 부르면서 인사평가에 좋게 썼다. 하지만 지금 이 문맥에선 이 말이 이런 뜻으로 들린다.
“내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닌 방법으로 할 때가 있다.”
한국 회사 문화는 오랜 시간 “보고 받고, 지시 내리고, 다시 보고하는” 패턴으로 흘러왔다. 윗사람이 생각하고, 아래사람이 움직인다고 여겨왔다. 그런데 이제는 후배들이 스스로 판단해서 움직인다. 진짜 문제는, 사실 회사가 그런 자율성을 감당할 시스템을 만들지 않았다는 데 있다. 권한이나 책임의 범위는 제시하지 않은 채 “알아서 해봐”라고만 하고, 막상 내가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오면 “왜 내 뜻대로 안 했냐” 묻는다.
문제는 후배의 자율성 자체가 아니라, 그만큼의 자율성을 조직이 감당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는데 있다.
“자기애가 강하다. 자신을 과신한다”는 말도 비슷하다. 기존 세대는 오랫동안 “회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이야기를 당연하게 여겼다. 야근, 철야, 회식, 윗사람 눈치 보기. 내 시간과 몸을 회사에 바쳤지만, 대신 회사가 날 책임져줄 거란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이 깨졌을 때, 많은 사람들이 상처만 지닌 채 회사를 떠났다.
그러나 이제 후배들은 처음부터 그런 믿음을 갖지 않는다. 회사보다 자기 커리어나 삶이 더 중요하다. 우리는 그 태도를 ‘자기애’라고 표현한다. 사실은 “우리가 회사에 쏟았던 것들을, 이들은 굳이 회사에 주려 하지 않는다”는 불편함이 더 가깝다. 그래서 ‘과신’이라는 단어도 쉽게 붙인다. 사실 그들은 자신을 과대평가한다기보다는, 회사를 과대평가하지 않을 뿐이다.
“소신과 뻔뻔함을 구분 못 한다”는 말은 언제 등장할까? 보통 이런 장면에서다.
“이게 제 일인가요?”
“왜 제가 이걸 해야 하죠?”
예전엔 이런 질문 자체가 금기였다. 궁금해도 못 물어보고, 억울해도 속으로만 삼켰다. 그런데 요즘 후배들은 이런 질문을 한다. 본인이 궁금해서이기도 하고, 일이 어디까지가 내 책임인지 선을 확인하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정말 문제는, 회사가 이런 질문에 대해 제대로 답해본 적이 없다는 점이다.
‘원래 그래왔어’, ‘다 그렇게 하는 거야’라는 식으로 버텨온 구조에선, 이런 질문이 일종의 금 같은 균열이 된다. 그래서 ‘소신’이라 부르기보다는, ‘뻔뻔하다’는 꼬리표를 더 쉽게 붙인다. 사실 뻔뻔한 쪽은, 설명도 없이 일을 맡기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려는 기존 시스템일지도 모른다.
“감정에 충실하다”는 지적도 마찬가지다. 기성세대는 감정을 숨기고 버티는 게 미덕이었다. 화가 나도, 억울해도, 다 삼켰다. 몸이 부서져도 “괜찮아요”가 자동으로 나왔다. 감정을 감추는 힘을 ‘프로정신’이라고 불렀다.
요즘 후배들은 다르게 자랐다. 힘들면 힘들다 말하고, 불편하면 불편하다 말한다. 필요하면 쉬기도 하고, 눈물도 보인다. 우리는 그 모습을 보며 “감정에 너무 충실하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회사는 오랜 시간 사람의 감정을 공짜 자원처럼 써왔다. 고객 응대, 감정노동, 상사 비위 맞추기 등, 직원들의 감정으로 버텨온 체계가 더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진짜 문제는 감정이 아니라, 감정을 갈아넣어야만 유지되는 구조다.
마지막으로 “존중받기를 원한다”는 것. 사실 이건 특별할 것도 없다. 누구나 존중받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하다. 다만 우리는 존중을 기본값으로 두지 않았다. 성과, 직급, 연차에 따라 존중이 나뉘었다. ‘먼저 고생한 사람’이 존중을 독점하는 문화에서는 후배가 존중받을 차례가 늘 한참 뒤에나 돌아왔다.
하지만 후배들은 이렇게 묻는다.
“왜 사람 대접은 차례로 받아야 하죠?”
MZ세대가 존중을 지나치게 요구하는 게 아니라, 어쩌면 우리가 그 존중을 너무 늦게 건넸던 걸지도 모른다.
결국 이 다섯 문장은 MZ세대를 설명하는 글이기보다는, 오히려 이렇게 읽힌다.
“나는 내가 통제하기 쉬운 후배가 좋다.
내가 희생했던 방식 그대로 후배도 희생하길 바란다.
설명도 안 되는 규칙을 아무 말 없이 따라주면 좋겠다.
감정을 숨기고 묵묵히 버티는 걸 미덕이라 생각해왔다.
존중은 내가 손에 쥐고 있다가 필요할 때만 나눠주고 싶다.”
이런 마음이 솔직히 드러난다면, 이 칼럼의 제목도 이렇게 되는 게 맞겠다.
“나는 이런 후배들이 불편하다.”
불편함 자체는 죄가 아니다. 누구나 낯선 세대와 마주하면 자연스럽게 어색하고 불편하다. 문제는 그 불편함의 원인을 오로지 후배의 인성 때문이라고 생각할 때 생긴다. 세대는 바뀌었지만 조직은 그대로고, 규칙은 낡았지만 권력은 그대로 남아 있다. 이런 틈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이 바로 “요즘 애들은…”이다.
후배의 인성을 함부로 판단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 이런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나는 지금 변화하는 세대 앞에서 어떤 어른으로 서 있는가?”
“나는 후배를 평가하는 데만 익숙한가, 아니면 함께 일하는 방법을 배우려는가?”
MZ세대 분석 리포트보다 더 시급한 건, 내 리더십을 점검해보는 일이다.
후배의 인성을 먼저 따지기 전에, 나부터 내게 물어봐야 한다.
나는 지금,
멋지게 나이 들어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