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인생은 아름다워
‘인생은 아름다워’
이 영화는 1930년대 말부터 시작된다.
1943년 9월 8일 전 까지는 적어도 이탈리아와 독일은 동맹국으로 서로 우호적이었지만, 무솔리니 제거 후 이탈리아가 연합군과 동맹을 맺음으로 서로 적대국이 되었다.
그로 인해 독일이 이탈리아를 정복하였고, 나치는 이탈리아에 살던 유태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1945년 4월 독일이 항복함으로써 이 영화는 끝이 난다.
수많은 유태인 학살에 대한 영화가 있었지만 ‘인생은 아름다워’는 다른 영화와는 달리 제목부터 특이하다. 철저히 반어적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유태인 학살의 이야기를 다른 각도에서 본 것인지, 인생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극단적인 유태인 학살의 이야기를 도입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러시아의 혁명가 트로츠키Leon Trotskii가 암살당하기 직전에 남긴 글처럼 “그래도 인생은 아름답다”는 사실이다.
많은 영화 비평가들은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인류의 최대 불행이라는 유태인 학살을 코미디 영화로 만들었다는 점에 대해, 그들의 불만과 우려는 영화의 개봉과 함께 베니니에 대한 찬사로 이어졌다. 인류사 최악의 비극 중 하나인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오히려 유머스럽게 묘사함으로써, 비인간적인 상황을 더욱 강조하고 동시에 살아남은 어린아이를 통해 베니니가 주장하려던 '그래도 인생은 아름답다'는 희망을 보여준 것이다.
이 영화는 전반부가 1930년 말에서 1943년 9월이고, 후반부는 그로부터 1945년 4월 나치의 항복 때까지를 다루고 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독일과 동맹국으로 지냈지만 그가 축출되면서, 이탈리아가 연합군과 동맹을 맺게 되고 나치는 1943년 9월 이탈리아를 점령하여, 이탈리아의 유태인 학살은 그 서막을 올리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히틀러는 왜 유태인을 미워하고 대학살을 자행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첫 번째, 종교적인 것으로 기독교 문명을 앞세운 유럽 세계는 예수를 못 박아 죽인 주체인 유태인을 멸시하는 풍조가 만연했다. 특히 인종 혼합주의와 엘리트 기득권을 유지하는 유태인들에 대한 견제와 시기로 인함이다.
두 번째, 우수 민족과 열등민족 등을 구분하는 생리학적 인종주의의 일환으로 유대인의 우수성을 말살하고 게르만과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높이기 위해서 이다. 이 내용은 주인공 귀도의 가짜 장학사 연설 중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설명하는 페이소스적 장면에 잘 나타나 있다. 세 번째, 히틀러의 정치적 집권을 위한 반사회주의, 반유태주의, 반공산주의의 기치 아래 자행된 정치수단의 한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경제적 이유인 유럽의 경제권을 쥐고 있는 유태인들에 대한 보복 심리 등이다.
나치는 유태인들의 탈무드식 삶의 방법과 유럽을 휩쓴 페스트에도 살아남은 그들만의 공간(게토)에 모여 살며 청결함을 유지하는 생활에 대한 모독으로, 특히 히틀러는 냄새에 관한 인종차별적 정치론을 통해 유태인들에게 악취의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이 악취를 육체적. 도덕적 타락과 연관시킴으로써, 유태인들을 혐오스럽고 사회에 위험한 자들로 낙인찍고자 하였다. 가난하고, 무지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들은 악취가 난다는 사회적 관념을 히틀러는 유대인의 주거환경을 통한 삶의 한 방식에서 찾아냈던 것이다. 주1)
아우슈비츠를 포함한 유대인 포로수용소들의 후각적 환경은 짐승의 우리나 도축장과 같았다. 그들은 자신의 배설물과 씻지 않음으로 몸에서 나는 냄새, 시체를 태우는 냄새 등으로 스스로 무너져 버리고 스스로 자기 비하에 빠져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나치는 많은 것을 숨겼고, 비공개화 했지만, 냄새만은 막을 수 없었다. 냄새는 담을 넘어 경계를 지나 끝없이 흘러감으로 말이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유대인의 냄새를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하였다.
도덕적인 면과 또 다른 측면에서 유태인을 정화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겉모습만 보아도 그들이 물과 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괴롭게도 종종 눈을 감고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중에 나는 카프탄을 입고 있는 사람들의 냄새만 맡아도
메스꺼움을 느끼게 되었다.
...
이 모든 것들은 결코 매력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육체적 불결함에 덧붙여 이들 ‘선민’들의 도덕적 오점을 발견하고 나자,
단연코 혐오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주2)
지독한 냄새에 길들여지면, 인간은 그것으로부터 절대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스스로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극한의 삶 속에서...
삶의 의미는 늘 변할지 모르지만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로고테라피의 중심 명제이다. 로고테라피(의미요법)에서는 세 가지 다른 방식으로 삶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첫 번째,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행위를 함으로써, 두 번째, 무엇을 경험하거나 누군가를 만남으로써, 세 번째, 회피할 수 없는 어떤 고통에 대해서 우리가 취하게 되는 태도에 의해서이다. 우리는 책임을 져야 하고 자기 인생의 드러나지 않은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고 자꾸만 되뇌는 이유는, 삶의 참다운 의미는 고립된 개인의 내면 속에서가 아니라 이 세상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자세를 일컬어 '인간 존재의 자기 초월'이라고 부른다. 어쩌면 냄새도 자기 초월 통하여 진정한 내면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자기 아닌 무엇 혹은 타인─그것은 충족시켜야 할 의미일 수도 있고 내가 만나는 타인일 수도 있는데─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때만 나도 인간다워질 수 있다는 역설이 여기 숨어 있다. 불의에 맞서는 사회 운동에 뛰어들거나 누군가와의 사랑에 빠져 스스로를 망각하게 되면 될수록 그는 더 인간다워지고 더 많은 성취감을 맛보게 된다. 자기실현이라는 것은 손으로 움켜잡을 수 있는 표적이 아니다. 갈구하면 갈구할수록 그것은 자꾸 멀리 달아나기만 한다. 요컨대 자기실현은 자기 초월의 부산물로서만 나타나는 것이다.주3)
냄새도 그것을 맡는 인간의 후각 없이는 스스로를 충족시킬 수 없다. 결국 냄새의 자기실현은 인간의 후각을 통해 사라짐으로써 기억하게 되는 부산물로 충분한 것이다. 사실 냄새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 같지만 그 주체인 사람의 후각 없이는 존재할 가치가 없다. 요컨대 냄새는 인간의 삶과 감성의 충족을 위한 후각의 객체라는 것이다.
저는 세상에 있는 냄새를 전부 알아요. 파리에 있는 모든 냄새를요.
이름을 모르는 것들이 좀 있기는 하지만요.
그러나 그 이름들도 배울 수 있어요. 이름이 있는 냄새는 전부 다 말입니다.
그건 그렇게 많지 않거든요. 기껏해야 수천 개 정도지요.
저는 이제부터 그걸 전부 배우겠습니다.
여기 이 향유의 이름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을 겁니다.
안식향이라고 했죠. 안식향, 안식향...”주4)
세상의 냄새는 모두 이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름 붙여지지 않는 것이 훨씬 많을 것이다. 냄새는 언어나 기호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어서, 하나의 이름으로 짓거나 설명할 수 없다. 맡는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기 때문이다.
빅터 플랭클 박사는 유태인으로서 나치 치하의 강제 수용소의 삶을 3년이나 체험했다. 강제 수용소에서는 죄수가 자신을 지탱할 힘을 모두 상실하도록 모든 상황이 꾸며진다. 삶에서 친숙했던 모든 목표가 빼앗겨 버린 것이다. 이제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자유-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뿐이다. 고통 속에서도 고통의 의미를 찾고 살아남고자 노력하거나, 또는 보다 쉬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강제 수용소에서 아주 훌륭한 사람이나 연약한 사람은 수용소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그러나 저자를 비롯한 평범한 보통 사람들은 이런 죽음의 고난 속에서, 자신의 고통의 가치를 선택함으로써 죽음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초인도 아니고 영웅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서, 굶주림과 혹독한 노동 속에서도 웃을 수 있었고 감사도 했으며 심지어 문화까지 향유할 수 있었다. 이 평범한 사람들이 절망 가운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또 생존할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 절망은 후각에 이르러 극에 달한다. 숨을 쉬지 않고 살 수 없기에 후각은 공간에 남겨진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생존을 위해 끝없이 호흡하는 그들에게 수용소는 마치 지옥의 냄새 같은 악취를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냄새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아니 일종의 유희처럼 즐겼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변화시킬 수 없는 환경이었기에 말이다.
‘금발의 천사’로 알려졌던 나치 장교 이르마 그리제라는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유대인 포로수용소를 방문할 때에 늘 진한 향수를 뿌렸다. 그녀는 어디를 가든지 귀한 향수 냄새를 동반했다. 머리에는 관심을 끌게 하는 향기를 고루 갖추어 뿌렸으며, 때론 그녀는 자신만의 향수를 조제하기도 하였다. 거리낌 없이 향수를 쓰는 것은, 아마도 그녀의 잔인성의 정수라고 할 것이다. 그녀가 나타나면 건강이 악화될 대로 악화된 유태인들은 기쁜 마음으로 그녀의 향수 냄새를 들이마셨다. 그러나 그녀가 떠나고 나면, 수용소 전체를 마치 담요처럼 덮고 있는 곰팡내 나고 구역질 나는 육신의 냄새가 다시 찾아들고, 주위 환경은 전보다 훨씬 더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주5)
그녀의 향기는 포로들을 고문하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냄새를 통해 그들과 구별하려는 혹은 자신만의 독자적인 후각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수단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학살의 망각도 학살의 일부이다. 왜냐하면 학살의 망각은 또한 기억의 학살이며, 역사의 학살이고, 사회적인 것들의 학살이기 때문이다. 이 망각은 우리에게는 그의 진실 속에서 찾아질 수 없고, 접근할 수도 없는 것이다. 주6)결국 냄새의 망각 또한 학살의 일부라는 말이다.
나치는 종말이 오자. 그들이 저질렀던 수용소의 모든 불법과 악행을 묻기에 급급했다. 시체를 없애고, 모든 시설을 파괴하고 문서들을 소각하였다. 나치의 학살은 냄새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냄새만은 지울 수가 없었다. 그것은 지나간 슬픈 추억의 잔재로 후각의 기억 속에 영원히 망각되지 않은 채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반어적이다. 즐거움과 아름다움 속에서 진정한 추함과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죽음 속에서 삶을 바라본다. 또한 삶 속에서 진정한 죽음을 알게 된다. 나치의 만행에 의한 유대인의 더러운 냄새에서 인간의 참다운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것이다. 조수아는 말한다.
“그래도 인생은 아름답다. 아버지의 희생으로 나에게 준 선물”
그것은 바로 냄새였다.
Olfactory Director
1) 콘스탄스 클라센, 데이비드 하위즈, 앤소니 시노트저.『아로마 냄새의 문화사』.김진옥 역. 현실문화연구, 2002, p228.
2) Ibid., p228.
3) 빅터 프랭클.『죽음의 수용소에서』. 청아출판사, 이시형 역, 2012.
4) 파트리크, 쥐스킨트.『향수』. 강영순 역. ㈜열린책들, 2009.
6) 콘스탄스 클라센, 데이비드 하위즈, 앤소니 시노트저.『아로마, 냄새의 문화사』.김진옥 역. 현실문화연구, 2002, p231.
6) 장 보드리야르.『시뮬라시옹(Simulacres et Simulation)』. 하태환 역. 민음사, 2002, p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