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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 후각으로 떠나는 여행

12. 남해(南海), 금산(錦山)을 품다

12. 남해(南海), 금산(錦山)을 품다     


 봄이 왔다. 연못물과 정원 묘목의 푸르름이 하오의 가벼운 바람에 녹아 흘러간다. 바람이 전과 같지 않다. 나른함이 전해져 온다. 귀를 기울이면 먼 곳으로부터 아득한 소리가 들려온다.


향을 맡지 않고 듣는다는 표현을 쓴다. 때론 향을 맡지 않고 들음으로써, 향기 그 자체를 넘어 깨달음으로 치달으며, 도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어느새 봄도 듣고 향기도 들으며 남쪽의 끝을 향해 내 몸은 달려가고 있다. 남쪽 바다 한가운데에 자리 잡아 예로부터 남해군이라 이름 지어진 남해. 68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이곳은 길이 660미터, 높이 80미터의 아름다운 현수교인 남해대교가 생기기 전까지는 섬이었다. 하오의 햇살이 먼바다로 긴 여행을 떠날 무렵, 나는 이 다리를 지나고 있었다.

다리를 지나 시작되는 도로는 구비 구비 산을 휘돌아가는 끝없는 길이었다. 벚꽃이 필 때 왔다면 장관이었을 텐데, 금방이라도 부딪칠 것 같은 산과의 끝없는 조우로 인해 내 속은 울렁거렸고, 어린 시절의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때는 이곳에 배를 타고 와서 보이스카우트 야영을 했었던 아름다운 추억이 있던 곳이다.


남해 공용 터미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크다는 선향 제조업체가 있다고 하여, 어둡기 전에 그곳으로 향하였다. 논과 밭이 있는 황량한 땅에 선, 약간은 누렇게 변색되어 버린 하얀 건물을 볼 수 있었다. 큰 기대를 걸고 사무실을 찾았지만 아무도 없다. 한참 후 사원인 것 같은 한 여인이 들어왔다. 미리 연락을 해둔 터여서 방문한 목적을 말하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 나가 버린다.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는다. 밖은 점차 어두워지고 바닷바람이 세차다. 누구 하나 차 한 잔 건네는 이가 없다. 한참을 기다리니, 어디서 한 잔을 하셨는지 얼굴이 발그스레한, 연세가 왜 드신 할아버지 한 분이 들어와 내게 손을 내밀더니, 인사도 하기 전에 향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앉으라는 말도 없고, 차도 건네지 않는다. 오랫동안 방치된 것 같은 연구실도 보여주고, 자재 창고, 생산 공장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만들어진 선향을 맡아보라고 권하지만 내게는 그 향이 와 닿지는 않았다. 선조들의 전통 향을 재현했다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이곳에는 다니는 차가 없어, 불러준 택시로 역한 향과 술 냄새를 뒤로하고 그곳을 떠나야만 했다. 맑고 시원한 바다에 끓어오르는 울분을 실컷 토해야만 했기에.   

  

향에는 향목과 연향의 두 가지가 있는데, 향목은 향나무를 잘게 깎아서 만들어 태웠으며, 연향은 향목을 가루로 만들어 조향 하여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들어 피웠다.

동양의 향은 향나무(香木), 백단(白檀), 침향(沈香), 정향(丁香)등 나무와 사향, 용연향(龍涎香)등 동물에서 채취한 것, 유향(乳香), 안식향(安息香)등 수지(樹脂)등을 재료로 사용하였다.


 근래에는 사용의 편리함 때문에 선향이 주로 이용된다. 국내의 향 산업 또한 선향 중심의 제품을 만드는데, 주로 사찰이나 제사 의식에 사용되며 최근에는 일반인들에게 도 향 문화가 파급됨으로써 고급 향 선호가 차츰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고급품인 일본 향과 저급품인 중국 향에 밀려 영세성을 면치 못하며, 향다운 향조차 개발하지 못하고 있다.


통영과 남해를 중심으로 지금의 향 생산이 이어지고 있지만, 좋은 향재를 구하기가 어렵고 조향 기술의 낙후로 인한 제품의 질 저하, 디자인 문제, 향 문화의 부재 등으로 인하여 그 맥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듣기는커녕 맡기도 싫은 냄새를 풍기면서 말이다.

전날 밤바다의 세찬 바람이 가시고, 상주 해수욕장의 아침 바다가 눈부시다. 내 어린 시절 딱 한 번 왔던 이곳의 기억 여행은 계속되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소금강산(小金剛山)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금산이 있다. 코트에 가죽 백을 맨 등산객은 나 혼자 뿐이다. 등산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나는 복장 때문에 바위에서 미끄러져 손목에 작은 상처까지 났다. 그래도 좋다.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을 더듬을 수 있으니 말이다.


한 참을 올라가니, 멀리 남해가 보이는 곳에 이른다.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바다인지 구별되지 않는 푸르름이 날 안고 금산을 안는다. 따스하다. 멀리서 치자향이 들린다.

하지만 어느 곳에도 치자 꽃은 없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추억이 날 포근히 감싸며 위로할 뿐이다. 두 개의 콧구멍 같은 쌍홍문 앞에 이르렀다.

아이비가 큰 바위를 타고 긴 수염처럼 나 있다. 쌍홍문을 지나자 코트가 들썩일 때마다 땀 냄새가 오랫동안 진동한다.


향기에도 혀가 느끼는 맛이 있다. 다만 그 자체의 성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맵다, 달다'라고 하는 물질이 자연 그대로 또는 가열에 의해 내는 향기를 말하며, 맛 그 자체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물질이 내는 향기를 취함을 말한다.

오미(五味)는 혀의 감각으로, 후각에 비유한다면 매운맛은 정(丁) 자의 매운맛, 단맛은 꿀을 넣은 단맛, 신맛은 매실의 신맛, 짠맛은 땀의 짠맛, 쓴맛은 노란 떡갈나무의 쓴맛으로, 이것을 후각의 오미라고 하며 향에 응용할 수 있는 것이다.


 내 몸에서 나는 짠맛의 향기를 느끼며 산에서 내려오는 길은, 잃어버렸던 그 무엇을 찾은 것처럼 허한 가슴을 가득 채운다. 산 아래쪽에 다다르자 남해의 작은 포구 미조항의 비릿 한 냄새가 주위를 감싸며 내 작은 땅의 후각을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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