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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YB Nov 30. 2023

모든 순간의 물리학

책 리뷰

추천사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 세상에 던져졌습니다.

던져진 세상은 '나'라는 의식 그 자체일까요? 아니면 '우주'라는 세상일까요?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까지가 세상인 걸까요?

그 단순한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로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더욱더 알지 못하는 타인들이 나와 다른 생각과 이념을 가졌다는 이유로,

나의 이익에 반한다는 이유로 서로를 배척하고 싸우기까지 합니다.

"I am 신뢰"라고 말하는 이들과 서로 속고 속이고 있습니다.


세상의 민낯을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속속들이 모두 알았더라면, 우리는 '태어남'을 선택했을까요?

우리는 우주적으로 찰나의 순간이 지나면 나라는 자아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조차도 기억할 수 없을 인생을 살면서, 아프고 상처받고 체념하고 좌절하고 또한 절망의 순간을 견딥니다.

무한한 우주에 비교하면 '나'는 한없이 작고 초라하고 나약하고 무의미한 존재 같군요.

과연 나의 존재는 이 우주에서, 티끌만큼이라도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그럼에도 우리는 태어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무엇이고, 세상이란 무엇인지,

우린 어디서 와 어디로 가는 것인지,

우린 왜 우리 자체로 행복할 수 없는지(feat. 김하온)를 어린 시절 잠깐 궁금해하다가

이내 답을 얻지 못하고 점차 호기심은 빛을 바라갑니다.


모든 게 궁금하고 신기했던 어린아이는

어느덧 하루 종일 좁은 상자에 갇혀 휴대폰과 컴퓨터의 화면만 바라보면서도

세상의 근본적인 것들이 더 이상 궁금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벌써 낯선 세상이 익숙해져 버린 바람에, 놀라운 기적들이 그저 당연한 일상이 돼버린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비롭고 경외로운 것들에 대한 설명이 어렵고 지루하기만 하게 느껴집니다.



우주는 왜 존재하는 것인지,

공간이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지,

왜 우리는 과거는 기억하지만 미래는 기억할 수 없는 건지,

이 모든 걸 느끼고 판단하는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세상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것인지,

우리 역시 그저 양자와 입자로만 만들어진 건지,

그렇다면 각자 개별적으로 존재하고 스스로를 나 자신이라 느끼는 이유는 뭔지,

우리의 가치, 꿈, 감정은 또 도대체 뭐란 말인지,

대체 이 거대하고 찬란한 세상에서 우리는 대체 무엇인지,


<모든 순간의 물리학>의 저자 카를로 로벨리는 세상이라는 공간에서 우리가 아직 모르는 것이 산더미처럼 많음을 다시금 느끼게 해 줍니다. 당연한게 당연한게 아님을, 우리의 직관이 이토록 어긋나있음을 포함하여 우주 미스터리의 대부분을 설명하면서도 어려운 과학 용어가 아닌 명확하고 명쾌한 언어들로 이를 풀어냅니다.

카를로 로벨리는 루프양자중력이라는 개념을 창시한 저명한 양자물리학자입니다. 그의 양자 물리학 저서들은 정말 아름답지만, 양자 역학의 흐름을 끝까지 따라가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born to be 문과분들에게, 먼저 <모든 순간의 물리학>을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특히나 항상 무궁무진한 시야에서 근원적인 것을 궁금해하는 (물리러가 아닌) 모든 N들에게 추천드리고 싶은 책입니다.



우리가 탐험한 이 화려하고 놀라운 세상,
공간이 하나하나 떨어져 있고,
시간이 존재하지 않으며
 사물이 어떤 공간에 있지 않을 수도 있는
이 세상은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 존재도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물들과 똑같이
별 가루로 만들어졌고,
고통 속에 있을 때나 웃을 때나
환희에 차 있을 때나
존재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존재할 뿐입니다.

무한한 우주를 궁금해하고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바로 당신이라는 존재가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여담 1. 결국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으려면 '우리'의 범위는 어디까지 인지를 산정해야겠군요.

이 질문에서의 '우리', 즉, 이 지구에서 살고 있는 식물이나 동물과 같은 다른 모든 생명체와 똑같은 조상으로부터 계승된 존재인, 우리 인간은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요?

어릴 적, 우리는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착각했습니다. 밤하늘을 보며 뛰다 보면 달이 나를 따라오는 것만 같았고, 태양도 내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돈다고 착각했죠. 모든 사건에 대해 자신을 중심으로 해석하는 사고에 대해 우리는 '유아기적 사고'라고 부릅니다. 어른이 되어, 이제는 세상이 오직 자신만을 위해 돌아가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죠.

이 우주에게 있어서, 나는, 아니 범위를 끝까지 확장시킨다 해도 인간은 사실 그리 특별하지 않은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을 풍경화에 담아낸다면, 인류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한 점도 되지 않겠죠. 자연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인류의 지식의 끝에 도달해도 도저히 알 수도 없는 형태로 저 무한한 우주 공간에 펼쳐져 있을 테니까요.


우리와 유전적으로 비슷한 사촌뻘 되는 종은 이미 모두 멸종했습니다. 카를로 로벨리의 의견대로, 제 생각도 역시 그렇듯 우리 종도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수명이 짧은 종에 속하며, 우리의 존재를 계속 존속하게 할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게다가 인간은 스스로 명을 재촉하기도 합니다.

책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공장식 축산업은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범죄 중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그저 동물이 불쌍해서 가 아닌, 최종적으로 지구와 인류를 멸종시킬 악영향을 끼치는 사업이기 때문이죠.

전 세계 농경지의 77%가 오직 가축을 위한 방목지 및 사료 생산을 위한 경작지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지구상의 담수 중 70%는 농축산업에 사용되고 있고요.

2020년엔 소 경작지 확보를 위해 대한민국의 면적 절반 크기의 열대 우림이 아마존에서 사라졌습니다.

우유 1L를 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물의 양은 1,000L, 소고기 1kg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물의 양은 평균적으로 15,500L입니다.

지구가 앞으로 더 해질 인간의 육식 습관을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군요.


또한 우리가 그동안 쉬지 않고 무분별하게 벌인 어획 활동으로 인해, 지난 1년 동안 2조 7천억 마리의 물고기가 포획되었습니다.

이 상태로 어획을 지속한다면, 불과 2048년에 모든 어종이 멸종하게 됩니다.

바닷속 생물이 줄어들면 탄소를 붙들어 줄 바다의 역할이 사라지고 그중 1%의 탄소만 지상으로 올라와도 9700대가 내뿜는 자동차의 배기가스 탄소량에 맞먹습니다.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것은 어쩌면 왕성한 우리의 식욕일 수도 있겠네요.


혹은 오펜하이머가 우려했던 대로 원자 폭탄의 개발로 전쟁의 끝이 앞당겨졌지만 그로 인해 평화가 아닌, 인류의 종말의 끝도 함께 앞당겨졌을지도 모릅니다. 아직도 원자 폭탄의 천배 가까운 살상력을 가진 핵무기는 세계에 1만 2천 개(추정치) 정도가 있고 지금도 세계 한쪽에서는 전쟁이 진행 중입니다.

우리가 도화선의 불을 붙인 결과 기후와 환경은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고, 이는 쉽게 회복될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인류에게만 심각한 이야기일 뿐, 우주적인 관점에서는, 아니 그 드 넓은 우주에서 작디작은 지구에게 있어서도 별일 아닌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어릴 적 우리는 "지구야, 미안해. 아프지 마." 하며 지구 환경에 대한 감성팔이를 통해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주입식으로 교육받아 왔습니다.

여기서 충격적 진실을 하나 밝힙니다. 사실 지구는 아프지 않습니다. 아픈 건 우리들이에요. 지구의 아마존 열대우림이 사라진 들, 바다의 어류들이 전부 사라지고 대기권이 탄소로 가득 차든, 지구에게 있어서는 알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 인간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남기고 말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지금까지 이룩해 낸 눈부신 지식의 성과를 기반으로 세상과 커뮤니케이션합니다. 이는 단지 세상을 바라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현상을 재조명하기도 하고, 서로 다른 사물을 상호작용하도록 하기도 하고, 스스로도 끝없이 다른 사물들과 서로 상호작용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리학은 그저 나(어떤 무언가)의 상태와 또 다른 너(어떤 무언가)의 상태의 관계를 규정하는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DNA에는 우리가 아버지를 닮은 그 이유에 대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고, 우리의 뇌에는 지금껏 우리가 쌓아 왔던 추억들, 행복하거나 슬펐던 기억들, 열심히 학습했던 지식,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여러 정보들이 무리를 지어 전기 신호를 통해 상호작용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우리가 지금도 상호작용하고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세상을 전부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구축해 왔고 우리를 이루고 있는 이 모든 것또한 우리의 현실이자 자연 그 자체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지구상에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자신이 속한 종의 멸종에 대해 자각하고 의식할 수 있는 유일한 종입니다. 우리의 행동의 결과를 의식하고 상호작용하는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종입니다.

과학은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질문의 범위를 넓혔고,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인간의 자유의 범위 또한 넓혔습니다. 이런 자유를 가진 우리가 욕망에 자유를 저당 잡히는 존재로서 마지막을 장식하게 될까요?

아인슈타인이 우주의 별들이 결국에는 수축되어 블랙홀이 되거나 아니면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며 붕괴될 수 있음을 안타까워했듯 저도 우리와 세상의 상호 작용이 종국에는 우리 스스로를 붕괴시키는 방향으로 흘러 모든 것을 빨아 당기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마지막으로 <창백한 푸른 점>의 저자 칼 세이건이 그의 저서에서 한 말을 인용하며 마치겠습니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보면 지구는 특별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류에게는 다릅니다.
저 점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저 점이 우리가 있는 이곳입니다.
저곳이 우리의 집이자, 우리 자신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당신이 아는, 당신이 들어본, 그리고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이 바로 저 작은 점 위에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기쁨과 고통이 저 점 위에서 존재했고,
인류의 역사 속에 존재한 자신만만했던 수 천 개의 종교와 이데올로기,
모든 영웅과 비겁자들이, 문명을 일으킨 사람들과 그런 문명을 파괴한 사람들,
왕과 미천한 농부들이, 사랑에 빠진 젊은 남녀들,
성자나 죄인들이 모두 바로 태양빛에 걸려있는 저 먼지 같은 작은 점 위에서 살았습니다.

우주라는 광대한 스타디움에서 지구는 아주 작은 무대에 불과합니다.

인류역사 속의 무수한 장군과 황제들이 저 작은 점의 극히 일부를, 그것도 아주 잠깐 동안 차지하는 영광과 승리를 누리기 위해 죽였던 사람들이 흘린 피의 강물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저 작은 픽셀의 한쪽 구석에서 온 사람들이 같은 픽셀의 다른 쪽에 있는, 겉모습이 거의 분간도 안 되는 사람들에게 저지른 셀 수 없는 만행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잦은 오해가 있었는지, 얼마나 서로를 죽이려고 했는지, 그리고 그런 그들의 증오가 얼마나 강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위대한 척하는 우리의 몸짓, 스스로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믿음, 우리가 우주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망상은 저 창백한 파란 불빛 하나만 봐도 그 근거를 잃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우리를 둘러싼 거대한 우주의 암흑 속에 있는 외로운 하나의 점입니다.
그 광대한 우주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안다면, 우리가 스스로를 파멸시킨다 해도 우리를 구원해 줄 도움이 외부에서 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지구는 생명을 간직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적어도 가까운 미래에 우리 인류가 이주를 할 수 있는 행성은 없습니다.
잠깐 방문을 할 수 있는 행성은 있겠지만, 정착할 수 있는 곳은 아직 없습니다.
좋든 싫든 인류는 당분간 지구에서 버텨야 합니다.
인류가 느끼는 자만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멀리서 보여주는 이 사진입니다.
제게 이 사진은 우리가 서로를 더 배려해야 하고, 우리가 아는 유일한 삶의 터전인 저 창백한 푸른 점을 아끼고 보존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대한 강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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