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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YB Dec 22. 2023

어린 시절의 부모를 이해하는가?

책 리뷰

<책 '어린 시절의 부모를 이해하는가?' 추천사>


당신은 당신의 부모를 알고 있는가?


부모와의 관계는 한 인간이 최초로 맺는 인간관계이다. 부모와의 관계가 이후에 그 사람이 만나는 모든 사람과의 관계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친구, 연인, 직장 동료나 상사를 포함하여 자녀와의 관계에까지 최초로 형성된 기준이 영향을 미친다.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지만, 현재 당신이 겪고 있는 모든 관계의 어려움은 부모와의 관계에서부터 기인했다.


어린 시절의 부모를 기억하는가?

어린 시절 나에게 얽힌 기억을 치워두고 바라보았을 때, 당신의 부모가 객관적으로 어떤 사람인지 말할 수 있는가?

당신의 부모는 어떤 배경과 환경에서 태어나 어떤 문제를 안고 성장했는가?

상처를 극복하지 못해 아직 정신이 아이에 머물러있는 사람은 자신의 부모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 그 사람이 성인이 되어 가정을 꾸려 같은 입장이 되었다고 한들, 어린 시절의 관점에 사로잡혀 부모를 바라본다면 부모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살아가면서 오는 크고 작은 사건들로 인해 정신적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에서 형성된 '왜곡'이 다양한 형태로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한다. 부모와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고, 온전히 그들을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오는 정신적 문제와 어려움은 불행하게도 본인의 몫이다. 최초에 형성된 왜곡과 편견을 바로 잡지 않으면 마음의 평온을 누릴 수 없다.

스쿼트를 할 때, 습관이 되어버린 잘못된 자세를 고치지 않으면, 스쿼트를 할수록 오히려 허리가 망가지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내면에 왜곡되어 있는 가치관과 감정을 느끼는 방식을 재점검하지 않으면, 앞으로 살아가는데 함께할 소중한 관계와 삶의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까지 제대로 돌보고 처리할 수 없다. 극복하지 못하면 되풀이된다. 알게 모르게 내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규범, 사람에 대한 평가 기준, 견해, 믿음등 살아가는 전반에 강하게 영향을 주는 것들에는 아직 들여다보지 않은 부모로부터의 경향성이 짙게 묻어 있다.

폭력적인 부모로부터 자란 아이가 또다시 자신의 자녀에게 폭력을 되풀이하거나, 지배적인 성격의 부모에게 자란 아이가 또다시 지배적인 연인을 만나 엄격하게 통제받으며 괴로워한다. 그러면서도 '말을 안 들으니까 어쩔 수 없다' 혹은 '원래는 다정한 사람'이라며 애써 묻어두고 최초의 인간관계를 반복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얽매이게 한 부모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자. 지금 내가 인간관계에서 겪고 있는 고통이 과거의 반복은 아닌지 돌이켜보자. 변화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에서부터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나의 주관은 잠시 뒤로하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부모를 관찰했을 때, 미처 몰랐던 것들을 깨닫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부모는 가벼운 정신질환을 앓았거나, 심한 우울증이나 강박증에 시달렸을 수도 있다. 혹은 그런 문제는 아니더라도 심각한 생활고에 시달려 당신을 잘 보살필만한 정신적 여력이 없었을 수도 있다. 혹은 어릴 때 학대를 당했거나 가족으로부터 천대받았거나 사회에서 따돌림을 받은 경험이 있었을 수 있다. 이런저런 사건이 없더라도 편견과 차별을 당연시 여기는 분위기에서 비판 없이 그릇된 가치관을 답습하며 살아왔을 수도 있다. 부모가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를 파악해 보는 것만으로도, 그 지식은 당신에게 있어 그 자체로 치유의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부모를 책망하지도, 자신을 비난하지도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파악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곧 치유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부모상'이 바뀌면 '자아상'도 바뀐다. '내가 나쁜 아이라그래', '난 살아갈 자격도 없어'하고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꼭 객관적으로 부모상과 자아상을 점검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나의 부모는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탐구하며 기억을 객관적으로 재정립해 보는 일이다.


당신의 부모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문제를 겪었는가?

이 질문에 종이와 펜을 들고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며 충분한 시간을 들여 적어 내려 가 본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점은, 자녀의 관점으로 부모가 '나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적는 게 아닌,  한 명의 인간 대 인간으로서 그를 이해해 보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해도 당신이 가지고 있는 기억과 상처가 여러 필터를 덧씌워 이 작업을 어렵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어렵더라도 이해하려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다면 당신은 해낼 수 있다.


어린 시절 누구나에게 부모라는 존재는 최초로 의지할 대상이자 동시에 한계를 규정하는 벽과 같은 존재다. 어린아이에게 있어서 부모는 저항할 수 없는 강력한 존재이자, 뭐든 해주는 크고 대단한 존재이다. 우리는 그 거대한 존재에게 본능적으로 애정을 갈구했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원하는 만큼 그 애정이 부모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그건 어린 당신에게 있어서 커다란 상처로 남을 것이다. 그렇게 어른이 된 후에,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이해할 수 없을 때마다 부모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면 편리하다. 자신의 문제와 직면하여 객관적인 이해를 도모하는 것보다 훨씬 편한 것이 타인을 원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모가 뭘 잘못했는지 샅샅이 파헤치는 것은 당신의 성장과 감정을 매듭짓는 데 있어 별로 효과적이지 않다. '나쁜 부모로 인해 내가 고통받았다'는 이미 정해진 결론으로는 잠깐의 공감과 치유 이상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할 수가 없다.

이미 커버린 '어른 아이'들에게 있어 그 부모가 여전히 대단한 존재이든, 맞서야 할 강력한 적이든 그 어느 쪽도 사실은 실제보다 훨씬 과장되고 왜곡된 모습이다. 여기서 왜곡을 벗겨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면 자동적으로 의미 부여하는 일을 멈추고 있는 그대로의 본연의 상태로서 현실을 바라보아야 한다. '무섭다', '두렵다', '억압하는 존재'등의 의미 부여를 떼고 최대한 그 사람 자체로 과연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자. 뿌연 안개과 같은 감정에 가려서 있어 흐릿하던 실제 모습을 명확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정보를 파악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  조부모의 직업

- 부모의 가정환경, 조부모 및 형제자매와의 관계

- 부모의 고향환경, 분위기

- 그 세대의 유행과 문화, 상식

- 부모가 만난 과정, 결혼-출산 당시 나이

- 부모의 지적 수준

- 부모의 전문성, 직업, 소속 업계의 분위기

어린 시절부터의 부모를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분명히 누락된 정보가 있음을 눈치챌 것이다. 혹은 그렇게 가깝게 느꼈던 부모에 대해 사실 잘 모르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혹은 그냥 알고 싶지 않아 구체적인 정보를 외면해 왔을 수도 있다. 불편해서 마주하지 않았던 거라면 오히려 좋다. 부모, 혹은 그를 아는 친척이라도 좋으니 그에 대에 물으며 객관적 정보를 파악해 보자.

'부모는 무조건적으로 아이를 사랑한다.' 이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명제다. '부모는 응당 이러저러해야 한다.', '아이는 대게 이렇다'등등 많은 명제들이 우리를 여러 의무감, 도덕적 부채감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상식에 '언제나 예외는 있다'라는 인식이 더해지면 자신과 부모, 타인을 볼 때 객관성을 가지고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혹시 나의 부모가 우울증이 아니었는가 의심해 보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우울증 환자에게 흔한 증상이 자신의 부모로부터 나타났다면 당신은 엄청난 불안감에 시달리는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부모가 망상에 빠져 소란을 피우거나, 죽고 싶다는 말을 하거나, 계속해서 잠만 자는 것을 보면 아이의 내면은 극도로 혼란스러워진다. 주변 어른들이 "엄마는 마음에 병이 생겼어."라고 설명해 줘도 아직 뇌가 다 발달하지 않은 상태의 아이는 상황을 종종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하며 자기 자신과 연결해 확대 해석하고 상처받는 일이 흔하게 일어난다. 대수롭지 않은 말 한마디에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하고 부모가 실제로 아이 탓을 할 수도 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과 생각들이 당신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쳐왔을 것이다. 자기중심적 사고의 결과로 상처받고 괴로워하지 않게 그 당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지금이라도 스스로에게 설명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관계의 문제는 무엇 하나가 그 원인이라고 꼽기 어려울 정도로 복합적이다. 정신 질환 또한 단 하나의 이유로 발병하지는 않는다. 정신 질환 발병은 타고난 여러 유전자의 영향과 자라난 환경과 경제력,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 트라우마, 직업, 사회적 관계 등 인생을 결정하는 수많은 요인들이 인생의 주요한 국면에서 불행의 연속으로 겹쳐질 때 나타나게 된다. 이 정도의 불행이 계속해서 연달아 나오는 것은 굉장히 희박한 확률로 안 좋은 패만 갖게 되는 경우와 같다. 정신 질환의 발병은 당사자나 주변인 누구 한 사람의 탓이 아니다.

"그럼 저는 단지 운이 안 좋아서 그런 일을 겪게 된 건가요?"

억울하고 서러울 수 있다. 그를 이해함에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한마디 건네고 싶다.

"당신이 받은 피해와 상처는 당신의 부모의 불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자책에서 벗어나, 그 상황을 제대로 알게 된다면 당신의 어린 시절의 불우한 경험을 보는 관점이 달라질 겁니다."

 

'부모'는 당신이 지금까지 다뤄왔던 그 어떤 주제보다 거대할 것이다. 집중력과 에너지가 소모되는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 번 그 거대한 주제를 이해하고 나면, 자신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하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내가 되어가는 길을 걸어갈 수 있다. 무의식적으로 붙들고 있던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머릿속에 자리 잡은 통념에게 자유롭게 당신의 생각을 들려줄 수 있다. 당신에게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본능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이 아니라, 의식하여 선택하고 결정하는 '대응'을 할 수가 있다.









극도로 무력한 존재가 절망에 패배하면서도 진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에 인간의 존엄이 있다.
- 파스칼

매일매일 뼈아픈 불행 속에서도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매일 자신에게 진실하게 대하는 것은 자기만족 때문이 아닌 필수적으로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진실하게 자신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과 집착의 근원을 들여다보는 그 시도는 무엇보다 존엄하다. 진정으로 과거를 밟고 일어서서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려고 있는 당신의 존재 자체에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존엄성이 깃들여 있다.

그 누구도 우리가 왜 이런 고통을 겪게 되는지 명확하게 설명해 주지 않는다. 부조리하다. 삶은 부조리하며 세상은 부조리하다. 아무도 부당하게 당한 인생의 고통을, 괴롭게 지낸 나날들을 보상해주지 않는다. 그것이 부조리한 세상에서의 삶이다. 그렇기에 거기에 우리의 존엄이 있다.

고통 속에서도 분노와 슬픔에 잠기게 된 원인에 대해 의문을 품고 그를 이해하려 하는 모습에서 인간의 존엄을 발견할 수 있다.


최근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작품을 봤다.

그 작품에서 나에게 다가온 메시지는 너무도 명쾌했다.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고 다그치는 잔혹한 세상 속에서 도무지 살아갈 이유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완전무결한 세계를 창조해 내기 위해 탑으로 도망쳤고 그곳에서 완전한 세상을 꿈꿨다.

그러나, 탑을 몇 번이고 다시 쌓아도, 흠결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만들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주인공 마히토가 현실에서 겪은 상실감과 괴로움 또한 결국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직시할 수밖에 없다. 나 자신조차도 모순과 악의를 지니고 있는 존재이며 그 아픔을 있는 그대로 간직하고 그로부터 나의 현실을 창조해 내야 하는 것이다.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그토록 부조리한 아픔과 불행의 연속, 그 잔혹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살아가야 하는가?

그에 대한 대답은 죽음이 뻔히 예정되어 있음에도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고자 하는 히미의 선택으로부터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죽는 것 따윈 두렵지 않아. 널 만나는 건 기쁜 일인걸."

히미는 자신에게 아픔을 주는 선택을 해야만 기쁨을 주는 존재인 마히토를 만날 수가 있다. 그래서 그녀는 주저 없이 원래 있던 세계의 문을 열고 기쁜 얼굴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진격의 거인에서 지크와 아르민의 대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지크: 결과적으로 생명이 남아있는 이유는, 생명이 증식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야. 생명은 증식하기 위해 모습과 형태를 바꿔나갔고, 온갖 환경에 적응한 결과 오늘날의 우리에 이르렀다. 더 많이, 더 널리, 더 풍요롭게. 즉, 삶의 목적은 증식에 있어. 이 모래도, 돌도, 물도 증식하려고 하지 않아. 하지만 생명은 오늘도 필사적으로 증식하려 하지. 죽음이나 멸종은 증식이라는 목적에 위배되는 것, 그렇기에 '공포'라고 하는 벌칙이 있고, 그 아이도 그 공포에서 벗어나려고 필사적이었지.

아르민: 알려주세요. 여기서 나가는 방법을. 전 아직 포기하지 않았어요.

지크: 어째서? 아직도 증식하기 위해서? 종을 존속하는 게 너에게 있어 그렇게 중요한 건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공포에 대한 생명의 참상이라고 할 수 있지. 정말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생명 활동에서 비롯된 공포말이야.

아르민: 동료들이 싸우고 있어요. 지금이라면 아직 많은 사람을 공포에서부터 구할 수 있으니까 공포와 싸우고 있다고요!

지크: 왜 지면 안 되는 거지? 살아 있다는 건 언젠가 죽는다는 거잖아. 의외로 죽을 때는 마음이 놓일지도 몰라.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증식을 위해 놀아났던 날들을 끝내고 드디어 자유로워졌다고 말이야.

아르민:... 해가 질 무렵, 언덕 위에 있는 나무를 향해 셋이 달리기를 했어요. 말을 꺼낸 에렌이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고, 미카사는 일부러 에렌의 뒤로 달렸죠. 역시 제가 꼴찌였고요. 그날은 바람이 포근해서 그저 달리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어요. 낙엽이 잔뜩 휘날렸죠. 그때, 저는 문득 이렇게 생각했어요. '여기서 셋이 달리기를 하려고 태어난 게 아닐까'하고. 비 오는 날, 집에서 책을 읽고 있을 때도, 다람쥐가 제가 준 나무 열매를 먹었을 때도, 다 같이 시장을 돌아다닐 때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 아무것도 아닌 순간이 너무도 소중하게 느껴졌죠. 저에게 있어 이런 것들은 증식하기 위해 필요한 것도, 아무것도 아니지만 무척 소중해요.

지크:... 그래, 맞아. 그저 던지고 받고 또 던지고. 그저 그걸 되풀이할 뿐. 아무런 의미도 없지. 하지만 맞는 말이야. 난 그냥 계속 캐치볼을 하는 것만으로도 좋았어.

지크는 인간의 존재 이유에 대해 '증식'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어떤 의미를 가지고 삶을 존속해야 하는지를 느낄 수 없었다. 여기에 아르민은 이렇게 대답한다. 인간의 존재 이유보다는, 자신의 존재 자체로 느꼈던 가장 행복하고 좋았던 기억들, 즉 스스로 실존하며 느꼈던 경험들이 더욱 소중하다고. 이에 지크도 생각을 바꿔 캐치볼을 하며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자신의 삶의 이유를 재정립하기 시작한다.

그저 살아가면서 우리가 느끼는 보잘것없는 사소한 실존의 경험들이 그 어떤 의미와 이념보다 존엄하고 가치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스스로를 속박해 온 통념대로 주어진 인생을 답습하며 살아하는 것이 아닌 현재를 직시하고 명확히 인식함으로써 자신이 개척하며 책임지는 삶에 대한 태도를 갖출 수 있다.


우리는 고통과 불행이 없는 삶을 꿈꾸고 가끔은 처절한 삶에 괴로워하지만, 사실 고통과 불행은 기쁨과 행복의 토대가 되고, 또한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조차도 누군가의 불행과 슬픔, 고통을 딛고 이 자리에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도 또한 고통과 슬픔, 그 역경을 이겨내고 삶을 얻어내어 또다시 누군가의 기쁨을 위한 토대가 돼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일련의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삶이 가진 진정한 아름다움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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