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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YB Dec 28. 2023

이 글을 읽고 나면 글쓰기가 취미가 될 것

글쓰기를 해야 하는 '진짜' 이유




남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한나 아렌트





전쟁은 사람이 사람을 죽일 수 있게 만들기 위해 어떻게 차별을 이용하였는가?


<공감의 반경>에서는 사회의 모든 갈등과 혼란을 야기하는 것은 단순 공감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선택적인 과잉 공감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사회 정체감 이론에 의해 더 설득력을 얻는다. 사회 정체감 이론은 사람들이 집단과의 동일시를 통해 자존감을 획득하고 유지한다는 이론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내집단으로 범주화하여 정체감을 얻고, 상호 작용한다. 집단의 위협이 마치 자신의 자존감과 지위가 위협받는 것처럼 느끼도록 한다.



우리의 행동 면역계는 생존에 위협이 될만한 공포스럽고 의심스러운 것에 대해 혐오하고 경멸하는 감정이 들게 하여 대상을 회피할 수 있도록 자동화했다. 이렇게 자동화된 감정과 직관은 이성보다 빠르고 효율적이다. 때문에 우리 삶에서 내려야 하는 95퍼센트 이상의 의사결정을 담당한다.

행동 면역계의 작동은 하나의 방어 기제의 작동으로 볼 수 있다. 행동 면역계는 심사숙고 없이 빠르게 혐오적인 감정을 불러일으켜 특정 집단이나 심지어는 국가 단위의 대상을 심하게 배척하도록 하는데, 이는 역사에서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사례다.


혐오나 경멸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특히 전염성이 심하다. 집단적으로 전염성이 강한 이러한 정서는 우리의 사고 체계를 지배해 끔찍한 결과를 낳게 만든다. 저자는 또한 어떤 특정인이나 집단으로부터 실제적, 가상적 압력을 받아서 자신의 행동이나 의견을 바꾸는 것을 ‘동조’라고 설명한다.



“한쪽에 극적으로 공감하는 순간 반대쪽 집단에게는 폭력이 된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그토록 극적으로 공감을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스스로를 대신해서 정당성을 끊임없이 부여해 주는 이데올로기의 파편에 숨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집단에 동조하고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어버리는 것의 극악무도함에 대해서 교훈을 주는 유명한 역사적 사건이 있다. 바로 홀로코스트, 유대인 대학살이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통해 이러한 잔혹한 역사적 이면에서의 ‘악의 평범성’을 잘 묘사하고 있다.




이 책의 배경인 예루살렘의 특별법정 재판엔 선 아이히만은 유대인 대량학살의 집행자였다. 그는 그 법정에 서서, 자신이 주도한 건 아무것도 없고 자신의 행위엔 선의든 악의든 아무 의도가 없었으며 자신은 그저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라 주장한다. 군인으로서 국가의 명령을 잘 수행한 것 자체는 아무런 죄가 없으며 오히려 직업적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면 그것이야말로 범죄라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1942년, 당시 독일 차-장관급 정상들만 참여하는 반제 회의에서 서기로 참석하게 된다. 그곳에 모인 독일의 장관들은 유대인 절멸을 논의하던 참석자들이다.

그들은 히틀러를 따라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에 대해 학살이라는 표현 대신, ‘최종적 계획’, ‘재정착’ 등 그들의 인간적 권리를 고려하지 않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살인이나 학살과 같은 범죄가 아닌 총통의 명령을 수행하는 , 국가를 위한 행위라고 생각하며 대하는 그들의 사상을 나타낸 단어였다.


법정에서 아이히만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살면서 유대인에게 딱 한 번 미안함을 느꼈던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한 유대인 공동체의 수장인 요제프 박사와 말다툼 끝에 따귀를 때렸던 사건이다. 그는 이 사건이 유일하게 자신의 양심에 걸렸던 사건이라고 언급했다. 아이히만은 심지어 밤에 잠도 못 잘 정도로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눈앞에 보이는 유대인은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집행자로서 유대인들의 학살을 진행할 때마다 자신이 느낀 것은 본디오 빌라도의 감정이라고 말했다. 본디오 빌라도. 즉, 유대인들의 성화에 못 이겨 예수를 처형해야만 했던 인물 말이다. 예수의 처형에 반대했던 그는 처형하기 전 손을 씻으며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 죄가 없다. 너희들이 직접 책임을 져라."


그러나 명백한 것은 아이히만은 유대인 학살의 최고위급 전문가라는 사실이다. 그는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수용소와 학살의 현장을 직접 확인하고, 여러 학살 장소에 나타나 학살을 직접 지시했다. 유대인을 학살하는 일에 있어 누구보다 적극적이며 효과적으로 일을 수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 1945년, 독일 친위대 전국지도자였던 하인리히에게 <유대인 학살중지령>을 지시받았지만 총통의 명령이 아니라는 이유로 아랑곳 않고 홀로코스트를 계속해서 수행했다. 자신이 따귀를 때리며 살아있는 인간임을생생하게 느낀 요제프 박사와는 달리 그가 사무적으로 대하며 사지로 내몰았던 수많은 유대인들은 도구나 물건 같은 존재로서 비인간화하여 차별하고 있었기에 그는 거기에 큰 의미를 두거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토록 잔혹한 학살을 오랫동안 일삼은 그의 정신 상태를 의심했으나 많은 전문가가 직접 들여다본 그의 정신 감정 상태는 지극히 안정적인, 좋은 친구와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는, ‘정상’에 가까웠다. 아이히만은 살면서 개인적으로 유대인을 원망하거나 미워한 적도, 본인이 직접 살인을 해 본 적 도 없었다고 밝혔다. 그렇기에 그는 스스로의 행위를 그저 사무적인 것으로, 군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복종의 의무를 다하는 행위로 생각했던 것이다.






평등이란 우리 모두가 온갖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간적 존엄성을 가진다는 의미이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차이를 개발할 권리가 있지만, 그 차이를 타인을 착취하는 데 이용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는 뜻이다."
- 에리히 프롬




이로서 우리는 두려운 교훈을 얻는다. 이 재판을 통해 밝혀진 거대한 악의 실체는 악마의 계략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사람이 저지른 악이었다. 한나 아렌트는 이에 대해 악의 평범성이라 이름 붙였다. 동기도 없이 행해진 악, 신념도 악의도 의지도 없던 악의 정체는 바로 생각의 부재이다. 즉, 말과 사고가 부재하는 곳에 피어나는, 가장 끔찍한 악에 대한 이야기이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가장 악한, 사람이기를 거부할 정도로 악한 인간의 행위를 낳는 모체였다는 진실이다.



책 공감의 반경에 소개된 사례 중에는 비슷한 역사가 있다. 이라크 포로들을 벌겨 벗긴 채 차곡차곡 쌓여있는 시체 옆으로, 포로의 목에 가죽 끈을 묶어 질질 끌고 다니는 미군들의 모습이 자료로 남아있다. 인간의 탈을 쓰고 같은 인간에게 어떻게 그런 취급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놀랍게도 가해자들은 괴물이나 악마가 아니었다. 과학적 심리 조사에 근거하여, 평범한 시민으로 진단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내집단을 해한 이라크 군인들에 대해 극도로 분노한 ‘보통’ 사람일 뿐이었다.



반인륜적이란 것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이러한 학살을 두고 반인륜적이라 칭하는가? 그것은 그들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외집단에 속한 인간 존재를 인간 이하로 지각하는 ‘비인간화’ 현상에 기반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라크인이 인간임을 부정하는 것, 유대인이 인간임을 부정하는 것, 외집단을 해충 또는 짐승 또는 전염병으로 인식하는 현상, 즉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모든 인식을 반인륜적이라고 한다. 나치와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의 미군들은 그들의 지위를 부인함으로써 그 잔혹함을 완성시켰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는 지위를 부정함으로써 그들을 잔인하게 짓밟을 권리를 얻었다. 그런 범죄의 정의를 우리는 반인륜적 범죄라고 부른다. 이것은 논쟁이나 싸움이 아니라 끔찍하고 질 낮은 인신공격에 가깝다.



놀랍도록 평범한 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일들을 할 수 있게 되었을까? 그 근원적인 이유는 가장 인간적인 특성인 생각하는 능력을 스스로 져버렸기 때문이다. 나 자신과 대화하지 않는,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자는 올바른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없다. 그렇게 지옥을 만들어 낸다. 그렇게 잔혹한 인간 역사의 비극을 창조해 낸다. 유례없는 크나큰 악행을 저지를 여지가 생긴다.

때문에 우리는 그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한나 아렌트는 누군가는 이 문제에 책임을 지고 논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따라서 그녀는 사람들이 생각의 힘으로 예기치 않은 일이 닥칠 때 일어나는 파국을 막을 수 있기를 바라며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썼다고 한다.







악의 어머니는 지식일 수 없고 정의는 무지함의 딸일 수 없다.
- 아그리파 도비녜






우리는 스스로가 악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서로의 지성을 견주어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기 위해. 자신의 무지를 방치하지 말자. 집단에 동일시하여 숨지 말고 스스로 일어나 생각해야만 한다.

더 알아서 악해지는 사람은 없고 멍청해서 더 정의로운 사람도 없다. 선과 악을 보는 눈을 키워 세상 전체를 보는 시야를 가지고 그를 통해 현명한 판단을 내리도록 해야 한다. 선과 악을 모두 보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 고유의 생각, 자신의 감정을 알면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인은 바로 그것을 모르고, 그렇기 때문에 익명의 권위에 의지하며 외부의 기대에 따라 만들어진 자아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점점 무력감을 느낀다.
이 모든 발전과 성취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은 깊은 무력감에 빠져 있다.
- 에리히 프롬





에리히 프롬은 사람이 스스로의 자아와, 또 환경과 연결되어 있는 상태의 ‘진짜 삶’에 대해 명료하게 정의하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경험할 때에만 진짜 삶을 살 수 있다고 힘주어 강조한다. 그는 삶은 자발적인 것임을 이야기한다. 자아는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만큼 강하다. 다시 말하면 자아는 활동하지 않는 만큼 무력해진다. 의식하건 안하건 자기 자신이 아닌 것보다 더 부끄러운 일은 없으며, 진짜 자기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는 것보다 더 큰 자부심과 행복을 주는 것도 없다. 항상 진실을 보고 진실만을 말하도록 노력하라. 진실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면 적어도 자신의 생각을 말하라. 생각이 없는 채로 자신을 방치하지 마라. 이것이 가능해질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우리는 인간을 상품과 도구로 취급하는 현대 사회의 비합리성에서 벗어나 목적으로서 사람들을 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당신이 작문을 통해 생각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당신의 정신은 더욱 잘 조직되고 효율적이며 쉽게 흔들리지 않고 확신에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이것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더욱 건강해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명료하지 못하고 무지하다는 것은 불필요한 스트레스가 생기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언어의 힘을 과소평가하지 말라.
에세이를 쓰고 있을 때 당신은 인류 문명이 지닌 권능 전부를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 조던 피터슨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악함을 자신의 생각대로 정리해서 말하는 능력이다. 조던 피터슨이 말했던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말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주장은 이런 뜻이다. 조던 피터슨은 생각하는 법과 주장을 구체화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한 사람에게 주어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자신의 주장을 일관성 있게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면 당신은 영향력 있는 존재가 되고 사람들은 당신에게 돈과 기회를 주기 시작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글로 표현할 수 있다면 당신은 아주 치명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스스로 생각하고 비판하고 논리적으로 말하는 능력이 더욱 중요하다.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의존적인 인간의 무력함을, 집단 뒤에 기대지 않고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그 나약함을 극복해야 한다.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생각할 힘을 기르고 글로 그것을 정리하고 있다. 우리 안에 존재할지 모르는 악마를 경계하며 공감의 반경을 넓히기 위해서, 생각 없이 집단과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관과 사상에 동조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정제하고 가다듬고 정리하여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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