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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YB Sep 11. 2023

⚡️언급하지 않는 것들

감사일기

몇 년 전에 보았던 VR 고화질 콘텐츠&솔루션으로 각광받고 있는 알파서클이라는 회사의 CEO가 했던 인터뷰 내용 중 아직까지도 굉장히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는 말이 있다.

알파서클 CEO는 처음 VR을 접하고 최초로 VR콘텐츠를 봤을 땐 세팅을 잘못한 건가 싶을 정도로 화질이 조악해서 오랫동안 감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게 왜 미래를 이끌 콘텐츠라고 이야기하는 거지?'라는 의문이 들정도였다. 영상 미디어의 핵심은 화질이라는 것을 파악했던 그는 VR에서 실제 사용자들이 체감하는 퀄리티를 높이려면 가장 근본적으로는 화질을 개선하는 솔루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연구 끝에 VR이라는 세상을 열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해 창업했다고 한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화질을 극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알고리즘을 개발해 콘피니티(기술 결과물을 시연해 보는 프로젝트)에 지원할 수 있었고, 결과물의 퀄리티가 굉장히 좋아서 실제 시장에 출시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꽤 많은 수익과 업계의 반향을 일으켰던 성공적인 제품이었다.


"와~! 화질이 너무 좋아요!"

"어떻게 이렇게 선명할 수 있죠?"

당시 알파서클 회사의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시장 반응을 기대했다고 한다. 알파서클이 출시한 제품 위에 올라간 콘텐츠를 좋아하는 팬들이 당연히 화질에 대한 칭찬을 할 것이라고. 그러나 그 어떤 리뷰를 봐도, 커뮤니티에 잠입해 제품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살펴봐도 정작 기대했던 '화질'에 대한 거론은 전혀 없었다.


"XX언니 너무 예뻐요!!!"

"내 가수들이 너무 가까이 와서 흥분돼요>___<"

.....

말 그대로 아무도 화질 얘기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모두가 콘텐츠의 좋고 나쁨만을 논의하고 있었다.

상심도 잠시, 그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이제야 비로소 사람들은 기술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고 온전히 '콘텐츠'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들이 개발한 엔진 덕분에!

화질 때문에 불편감을 느끼고 어지러웠다면 콘텐츠 얘기는커녕, 감상조차 불가능해 VR이라는 기술 자체에 대한 신뢰도가 하락하고, 불평이 난무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화질이 아닌 콘텐츠에 대한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하기 시작한 것, 오히려 그것이 그에게는 가장 쾌감을 느끼게 해 준 사건으로 기억되어 있다.



오늘 이 일화를 다시 상기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집에서 선풍기와 공기청정기를 틀고, TV로 넷플릭스를 틀어놓고 밥을 먹으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갑자기 정전이 돼버린 것이다. 집안 곳곳에서 동시에 기기의 종료를 알리는 알림 소리가 울려 퍼졌고, 전기 가스도 전자레인지도 쓸 수 없었던 나는 어쩔 수 없이 냄비를 다시 되돌려 놓았다. 요즘 같은 세상에 정전이라니 상상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네트워크도 끊겨 버렸던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항상 연결되어 있는 삶을 살았던 것을 끊기고 나서야 깨달았다.


와중에 생리현상은 참을 수 없으니 화장실을 갔다 왔는데, 아뿔싸 전기뿐만이 아니라 수도도 끊겨 버렸다. 물이 안 나와서 손을 씻을 수가 없었다. 언제든 깨끗한 물이 제공되는 쾌적한 환경에서 살고 있었음을 물이 끊기고 나서야 깨달았다. 다행히 정전, 절수는 오래가지 않았고 대략 5~10분 이내에 다시 돌아왔다. 경비실에서 복구를 알리는 안내방송이 울려 퍼졌고 집안 곳곳에선 다시 기기의 시작을 알리는 알림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주 잠시동안이지만 당연한 것들과의 단절을 통해 불편함을 경험하면서 내가 굉장히 많은 것들을 누리고 살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후에 친구들과의 단톡방에서 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랬더니 한 친구가 자신이 10일이나 정전을 겪었던 경험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 친구는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방에서 불편함을 감수하였고, 집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매일 PC방으로 피난을 갔다고 했다. 그 친구의 말을 듣고 나는 또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는데, 내가 이제야 고마움을 느끼게 된 전기와 물을 잃었던 순간에도, 여전히 나에게 빛은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직까지 한밤 중은 아니었고, 우리 집은 남향의 채광이 잘 들어오는 아파트라 자연광이 실내를 밝혀 주어서 나는 아무 불편함 없이 냄비를 제자리에 가져다 놓을 수 있었고 화장실을 갔다 올 수 있었고, 물 대신 물티슈를 불편함 없이 찾아 그것으로 손을 닦을 수 있었다.


특별히 거론하고 있지 않은 모든 것들은 이미 내가 축복처럼 받아서 누리고 있는 것들이다. 이 순간에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공기, 온도, 습도, 소리, 조명, 아프지 않은 몸, 당연하게 이용하고 있는 네트워크, 맥북, 당연하게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지능과 교육환경까지도. 근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것들이 내 삶을 지탱해 주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위에서 내 삶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과 콘텐츠에 대해 조망하고, 때론 불평하고, 때론 기뻐하며 다른 것들을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던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숨 쉬듯 감사할 것들 투성이다.


여담으로 예전에 인터넷 기사로 잘생긴 배우 중에서도 잘생긴 것으로 정평이 난 원빈이 "나는 내 얼굴이 잘생겼는지 모르겠다. 얼굴보단 마음을 가꾼다."며 망언을 한 것이 화제가 되어 많은 이들의 빈축을 산적이 있었다. 그에 대해서도 나는 이렇게 얘기하고 싶다. 외모를 계속해서 신경 쓰지 않고 마음을 가꾸는 것에 집중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당신이 축복처럼 받은 것이므로 감사할 정도로 잘생긴 것이라고... 스스로의 외모에 큰 불만이 없다면 당신은 잘생긴/예쁜 것이다!


우리가 미처 언급하고 있지 않은 모든 것에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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