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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YB Sep 20.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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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에 대해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책을 읽을 때면 읽고 싶은 책들을 한가득 가져와 이것저것 뒤적여 본다. 이리저리 휘리릭 넘기다 꽂히는 말이 있으면 공감하며 메모해 놓기도 하고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적기도 한다. 문득, 여러 활자들로 둘러싼 지금의 광경이 마음에 들고 흡족해서 손가락을 움직여 기록을 남겨 본다. 책에 빼곡히 적혀있는 글자들로 가득한 방에 있으면 맛있는 진수성찬을 앞에 두고 있는 느낌이다. 어릴 때부터 그냥 글자 그 자체가 좋았다. 특히나, 한글은 예쁘기도 하고 둘러싸여 있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다. 아니 사실 알파벳도 좋고 일본어를 배울 때의 히라가나, 가타카나, 한자, 심지어 숫자도 좋았다. 어릴 때부터 한결같은 취향이 있는데, 옷이나 가방 등의 물품에 영어로 몇 글자 쓰여있기만 해도 그 옷이나 물건이 굉장히 특별하고 예뻐 보였다. 영문자가 쓰인 청바지를 처음 본 날, 알바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바지를 입고 온 손님에게 물어내 바지의 출처를 알아냈다. 사람들로 빼곡한 강남 한복판 거리에서 글자가 새겨진 가방을 메고 걸어가는 사람을 따라가다 놓친 적도 있다. 친한 친구는 나의 이런 레터링성애자 같은 면모를 잘 알고 그런 물건을 볼 때마다 내 생각이 난다며 종종 선물을 사다 주곤 했다.


내 시야를 가득 메우는 글자가 뜻을 미처 파악하기 전부터 아름다워 보인다. 엄마가 말해주었던 어린 시절을 상기시켜 보면, 글을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책을 펼쳐서 보고 있었다고 했다. 유치원에 다닌 지 얼마 안 되어서 친구를 데려와 책을 읽어주고 있었다고도 했다. 어릴 적 집에는 오래된 책들이 많았고, 굉장히 두꺼운 백과사전도 많이 있었는데 커다란 백과사전을 꺼내 그 쿰쿰한 냄새와 얇은 종이의 재질을 느끼며 자음 모음 순서대로 나열된 글자의 뜻풀이를 종종 들여다보곤 했다. 그 책이 아마 우리 집에서 글자가 가장 많은 책이 아니었을까? 지금도 보면 뜻을 읽고 파악하는 것에 앞서 그냥 글자를 보고 있는 그 자체가 아름답고 좋은 것 같다. 어쩌면 책을 읽을 때 사실 무언가 배우고 습득하는 것을 즐기는 게 아니라 그냥 글자에 둘러싸여 있는 그 자체를 즐기는 것 같다. 무언가 남고 배우는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책을 펼쳐 드는 것만으로 이미 기분이 좋다. 그래서 사실 머릿속에 내용을 넣는 것이 아니라 글자만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을 때도 꽤 있었다.


어릴 땐 판타지 소설을 좋아했다. 나와 마찬가지로 책을 좋아하고 자주 그리고 많이 읽는 친구와 서로 돌려 보곤 했다. 그 친구의 읽는 속도에 맞춰 책을 교환해야 했으므로 덩달아 나도 책을 많이 그리고 빨리 읽게 되었던 것 같다. 판타지 소설의 내용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 글자들을 눈에 담으며, 그 글자들이 묘사하는 찬란한 풍경을 상상하며 보았던 광경이, 그 느낌이 참으로 아름다웠다는 기억만은 강렬하게 남아있다.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휘어지고 구부러지고 틀에 맞게 각이진 그림들을 보며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새삼 신기한 일인 것 같다. 문득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우리의 삶이 이토록 많은 글자로 둘러 쌓여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글을 배워 나의 상념들을 이렇게 아름다운 형태로 남길 수 있는 환경과 문명에 감탄하고 감사한다. 언어라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의 저서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프롤로그에서 말한 것처럼, 나한테 특별한 어떤 의미가 있는 것도 공들여 그에 관해 글을 써보지 않으면 그것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 보지 않게 되는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경우에는 달리기였고, 나의 경우는 지금 이야기하는 글자, 그리고 앞으로 말하게 될 여러 가지 주제가 있을 것이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무언가에 대해 정직하고 성실하게 숙고해서 쓴다는 것은 결국 나에 대해 정직하게 쓰는 일인 것 같다. 내가 무엇을 어떠하다고 여기는지,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으며 어떤 느낌을 주었는지 찬찬히 생각해 봄으로써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 오늘의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글자'였다. 어떤 사물에 대해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나는 그 사물을 통해 나를 보고 있다. 우리는 전부 모든 것에서 나를 보고 있다. 나를 둘러싼 세상을 어떻게 느끼는 가가 또한 내가 된다. 이런 측면에서 모든 것이 결국 나라는 말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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