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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현 Jan 13. 2017

그때 그 기업들은 지금...

PC 통신 시절을 주름잡았던,

드디어 부모님이 방에 들어갔다. 주무시는 듯하다. 저녁 식사 이후 이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일주일 전부터 채팅으로 이야기를 주고받던 친구는 이미 접속해 있을 텐데 그 친구가 아직 나가지 않았기를 빌어본다. 얼마 전 새로 구입한 US Robotics社의 56,600bps 모뎀, 흔히 56K 모뎀이라 불리는 그것에 전화선이 꽂혀 있는 것을 보니 괜히 으쓱하다.

“치이익~ 띵~ 딩~”

디지털 음이 전화선을 타고 가는 접속의 순간은 늘 설렌다. 아무리 빠른 모뎀이라지만 접속이 완료까지 30초는 족히 걸린다. 그 시간 동안 접속하고 나서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머리 속으로 꼽아 본다. 학과 게시판에 어떤 글이 올라왔는지 확인도 해야 하고 얼마 전 직접 써서 유머 게시판에 올린 글의 추천수가 얼마나 올랐을 지도 확인해야 한다. 채팅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그 친구에게 오프라인에서 만나보자고 ‘번개팅’을 제안해 볼까. 해야 할 일이 많지만 너무 많은 시간을 쓰지 않는다고 다짐을 한다. 지난달 3만 원이 넘은 고지서를 흔들며 역정을 내시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른다. 

–  


PC통신의 시대

90년대 후반, 아직 World Wide Web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전의 이야기다. 흔히 PC 통신이라 불리었던 이 서비스들은 인터넷 브라우저도 없이 VT(Virtual Terminal)을 통해 텍스트 서비스만 제공할 수 있었다. 이 PC통신 시장은 하이텔, 나우누리, 천리안, 유니텔이 사분(四分) 하였는데 각각의 서비스 별로 커뮤니티의 성격이 미묘하게 달랐다. 원조 PC통신 고수들은 천리안과 하이텔로, 상대적으로 어린 연령의 사용자들은 나우누리에 몰렸으며 전용 에뮬레이터로 미래적인 UI 제공하던 유니텔에는 삼성그룹 임직원들과 고등학생들이 많은 식이었다. PC통신 시장의 본격적인 확장 시기인 1996년 9월을  기준으로 봤을 때 하이텔과 천리안은 각각 100만과 50만의 사용자를 확보하여 시장을 주도하였으며 뒤늦게 시장에 뛰어든 유니텔과 나우누리가 각각 22만과 18만의 사용자로 그 뒤를 바짝 쫓고 있었다. 


PC통신 서비스는 주요 서비스들을 주로 주제별 ‘게시판’을 통해 제공했다. 이는 SNS 이전 커뮤니티 중심의 인터넷 서비스들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는다. 자유게시판, 유머 게시판, 뉴스와 같은 일반 주제의 게시판부터 시작해서 증권, 금융, 홍보, 쇼핑, 부동산, 경제에 이르는 주제 중심의 게시판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를 아울렀다. 물론 이러한 게시판 형태의 서비스 이외에도 채팅, 전자우편, 홈쇼핑 등과 같은 커뮤니케이션 서비스도 사용자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특히 채팅 서비스는 익명의 낯선 사람과 이야기할 수 있는 최초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으로 사용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ID 이외에는 아무 정보도 없는 상대를 알아가는 설렘과 관심사를 나누고 정보를 공유하는 소통에서 오는 만족감은 많은 이들을 전화요금 폭탄을 불사하며 채팅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영화 접속의 주인공이 되기를 꿈꾸며 말이다.



영화 접속의 포스터. PC통신이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지만 PC통신이 창작의 장이 되기도 했다. PC통신은 바야흐로 온라인 창작의 시대를 열었다. 엽기적인 그녀, 퇴마록 등이 대표적인 작품.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포스터. 엽기적인 그녀는 김호식 씨가 견우74라는 아이디로 나우누리 유머 게시판에 올린 경험담을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다.  




시대의 전환

웹 환경은 PC통신 환경과는 확연히 달랐다. 주로 이미지로 구성되어있는 웹서비스를 이용하기 위기에 전화선을 이용한 모뎀은 너무 느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터넷을 하기 위해 PC방으로 달려가야만 했다. 그런데 1999년 기점으로 가정에도 빠른 회선이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두루넷이 동축케이블을 이용한 인터넷 접속 서비스를 제공했던 것을 기점으로 라이벌 격인 하나로 텔레콤이 ADSL 기술을 내세워 시장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당시 두루넷과 하나로 등이 제공했던 인터넷 접속 서비스의 가격은 설치비 8~10만 원에 월 사용료도 3~4만 원이었다. 당시 물가를 고려한다면 저렴한 서비스라 보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몇몇 이유로 시대의 물결을 빠르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스타크래프트. 1998년에 출시된 이 게임은 게임 자체의 재미도 재미지만 온라인 대전의 묘미를 사용자들에게 선사하였다. 배틀넷이라는 온라인 대전 시스템을 통해 한번에 최대 8명의 사용자가 겨룰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베틀넷의 사용자 경험을 좌우하는 것은 통신 속도였다. 8명의 사용자가 게임에 참여했을 때 게임의 사용자 경험(UX)은 참여자 중 가장 느린 통신속도를 갖고 있는 사용자를 기준으로 결정되었다. 그래서 베틀넷 사용자들은 대전 상대를 고를 때 필사적으로 전화 접속자를 배제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니 전화 접속자들은 PC방으로 달려가거나 초고속 인터넷에 가입할 수밖에…


동영상. 복제가 자유롭지 않고 한번 재생하면 되감아야 했던 비디오테이프 사용자들은 디지털 비디오에 환호했다. PC로 재생하는 비디오는 많은 복제에도 화질 열화가 없고 재생이 간편했다. 하지만, 스트리밍 서비스는 언감생심 아무리 짧은 동영상이라도 전화기 모뎀을 연결한 채 다운로드해야만 했다. 이러니 월말 전화요금 고지서에 놀란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고 느리고 비싼 전화 접속을 포기하고 같은 가격이라면 빠른 초고속 인터넷 가입을 결심했으리라. 혹자는 이러한 동영상에 대한 요구 증가가 한국 인터넷 인프라 성장에 큰 기여를 했다고 평하기도 했다.


MP3. 가요 테이프 하나에 6천 원. CD 한 장을 구입하려면 1만 원이 필요했던 시절.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의 자료실에는 MP3 음악 파일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 곡당 3~5메가바이트씩 하는 음악 파일을 받으려면 10여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것도 통신 환경이 좋을 때 이야기다. 공들여 다운로드한 파일이 95% 언저리를 지날 때 어머니가 전화기를 들어버려 PC통신 접속이 끊어져 버린다면, 원망과 스트레스 속에 이런 결심을 했으리라. ‘내 지금 당장 초고속 인터넷을 설치하리라!’ 


지금은 추억이 되어버린 ADSL 광고. 당시 인기 연예인들이 앞다투어 통신사 광고에 출연했다. 



초고속 인터넷의 시대로의 전환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시장에 뒤늦게 뛰어든 한국통신이 이미 구축된 전화 인프라를 활용하여 인터넷 접속 서비스 시장의 강자로 부상했고, 한국데이터통신(데이콤), 하나로텔레콤, 두루넷이 경쟁하면서 국민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높은 품질의 서비스를 누릴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 이에 인터넷 기반의 서비스들도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1997년 한메일을 출시한 다음(Daum), 1999년 검색 서비스를 앞세워 등장한 네이버 등이 인터넷 포털 시장을 양분하기 시작하였고 2000년대 들어서 등장한 프리첼, 아이러브스쿨, 다음 카페, 네이버 카페 등이 온라인 커뮤니티 환경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등장한 웹 서비스들은 플랫폼으로부터 더 자유로웠고, 저렴한 이용요금을 갖고 있었으며, 빨랐다. 많은 PC통신 서비스들이 유료 서비스로 구축한 캐시카우에 올라 타있는 사이 이용자들은 터전을 옮기기 시작했다. 더 빠르고 쉽고 저렴한 곳으로…  




골리앗의 대응

왜 이용자들은 이동했는가. 사용자들이 PC통신 시대에 느꼈던 불편함을 월드와이드웹은 이렇게 소거하였다.

Easy – 무엇보다도 웹은 사용이 편했다. 컴퓨터를 켜면 바로 접속이 가능했으며 브라우저만 있으면 클릭 몇 번에 원하는 웹페이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페이지 구조를 외우거나 명령어를 숙지할 필요가 없었다.

Free – 모든 것이 무료였다. 처음 인터넷이 나왔을 때, 모든 것이 무료이기 때문에 인터넷은 곳 붕괴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전문가들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그 반대였다. 웹은 모든 것들을 미친 듯이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Rich – 사진, 일러스트, 동영상, 음악 등을 다운로드할 필요가 없었다. 월드와이드 웹은 별도의 프로그램 없이 웹브라우저에서 다양한 미디어를 동시에 소비할 수 있는 새로운 경험을 제공해 주었다.

Borderless – PC통신 시절에는 한 서비스에 접속해 있는 한 다른 서비스를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서비스 사이의 경계도 명확해서 마치 각각의 서비스가 다른 나라의 서비스인 것 같았다. 하지만 웹은 이 모든 경계를 허물었다.


시대의 전환은 시작되었다. 임계점을 넘자 걷잡을 수 없었고 PC통신의 강자들은 급박해졌다. 

하이텔. 하이텔은 한국경제신문이 1989년 만든 KETEL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이후 한국통신이 중심이 되어 만든 한국PC통신에서 KETEL을 인수하게 되고 1993년 하이텔이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으로 서비스를 시작한다. 월 사용료가 9,900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용자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천리안과 더불어 PC통신 서비스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다. 1999년 초고속 인터넷의 본격 보급에 따라 이용자들이 급감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한국통신은 시대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KT114 서비스와 검색 서비스 ‘정보탐정’을 합쳐 포털 서비스 ‘한미르’ 를 선보였다. 하지만 이미 다음과 네이버가 인터넷 포털 시장의 주도권이 나눠진 가진 상태에서 후발 주자로서 입지를 다지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한국통신은 2002년 민영화 이후 인터넷 포털 한미르와 PC통신 하이텔을 합쳐 파란(Paran)을 출시하여 재차 반격을 노렸다. 역시나 실패. 뚜렷한 상승세를 보이지 못한 KTH는 2012년 파란 서비스를 종료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만 같았던 KTH는 KT의 IPTV 사업 호조에 힘입어 새로운 기회를 맞는다. 대용량 영상 콘텐츠가 중심이 되는 시장 환경에 맞춰 콘텐츠 유통 사업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현재 KTH는 KT그룹의 콘텐츠 유통 전문회사로 부활하여 B2B 시장에서 자리를 잡았다. 



KTH의 기업 소개 페이지. 디지털 콘텐츠 유통 이외에 커머스 및 플랫폼 사업도 진행 중이다. 



천리안. 천리안은 다른 PC통신 서비스에 비해 빠른 서비스 속도로 유명했다. 쾌적한 사용 환경을 제공하는 대신에 압도적으로 비싼 분당 요금제를 책정했다. 이 때문에 ‘하이텔은 너무 늙었고, 나우누리는 철이 없고, 천리안은 돈이 많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천리안은 한국데이터통신주식회사가 1985년 시작한 비디오텍스 서비스에 그 기원을 둔다. 1986년 ‘천리안’이라는 이름으로 정식 서비스를 시작하고 1991년 회원 1만 명 돌파, 본격적인 서비스 확장기에 접어든 1994년 말에는 회원 20만 명 돌파를 달성한다. 90년대 중후반 지속적 성장기를 이어가 1997년 하이텔에 이어 회원 100만의 시대를 열어 전성기에 접어든다. 그나마 천리안 경영진들은 다가올 웹서비스라는 대세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 편이었다. 1998년과 1999년 ‘천리안98’과 ‘천리안2000’이라는 PC통신 겸용 웹브라우저 출시하고 무료로 배포하였고, 1998년에는 한글과 컴퓨터에서 만든 검색엔진 심마니를 인수하기도 했다. 다른 업체와 비교하면 상당히 기민하고 다각적인 대응이었던 것이다. 천리안은 전략적 다양성을 구사하고자 했다. 단 한 가지 ‘유료서비스’라는 것을 제외하고 말이다. 인터넷 포털사들이 모든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는 상황에서 유료화를 고집한 대가는 뼈 아펐다. 사용자들은 외면했다. 뒤늦게 2002년 천리안 운영사 데이콤은 포털과의 전쟁을 선포하며 세계적 검색업체 잉크토미 및 통신사 하나로와 제휴하며 부단히 양대 포털사 위주의 시장에서 살아남으려 했지만 허사였다. 이후 LG U+에 인수된 천리안은 chol.com이라는 웹서비스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아직도 운영되고 있는 천리안 웹서비스. 제법 다양한 분야에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나우누리. 나우누리는 ‘젊은 PC통신’으로 통했다. 90년대 후반 고학번/저학번의 구분은 나우누리를 쓰느냐 아니냐의 차이로 구분된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였다. 서비스 시작 시점이 1994년으로 하이텔, 천리안보다 10년 가까이 느렸지만 저렴한 이용 요금과 ‘나우지기’라 불리는 운영자들의 적극적인 관리를 장점으로 내세워 젊은 층을 중심으로 이용자들을 빠르게 불려 나갔다. 특히 공개 자료실과 동호회 자료실이 다른 PC통신에 비해 활성화되어 있었다. 나우누리는 90년대 중후반 절정의 인기몰이를 하며 ‘나우 폐인’이라는 용어까지 만들어 낼 정도였으나 초고속 인터넷 보급에 따른 대세는 거스르지 못했다. 처음 나우누리를 운영하던 나우콤은 ‘별나우’라는 웹 기반 서비스를 출시하며 PC통신의 헤게모니를 이어나가고자 했다. 하지만 이러한 포털화(化) 시도가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특정 서비스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PC통신 시절 이용자들이 좋은 자료실 서비스에 열광한다는 점에 착안해 피디박스와 클럽박스라는 웹 자료실 오픈하고 개인화된 멀티미디어 콘텐츠의 중요성에 부응하여 교육 서비스, 게임, 동영상 서비스 등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러한 전략적 결정은 결실을 맺기 시작하는데, 그중 동영상 서비스 ‘아프리카TV’ 는 시장에 잘 알려진 개인화 동영상 플랫폼으로 성장한다. 이렇게 동영상 시장에 한 획을 그은 나우콤은 내친김에 사명까지 아프리카TV로 바꾸고 최근까지 가파른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1] 


개인 방송 시대를 주도하고 있는 아프리카TV. 별풍선이라는 유료 모델을 성공적으로 안착시켰다.   

헤게모니의 확장과 연장보다는 탐험을



세 서비스의 최대 회원수는 하이텔 225만, 천리안 265만, 나우누리 151만이었다. 당시 PC통신 서비스의 전체 이용자 수가 지금의 인터넷 이용 인구에 비해 현격히 적다는 것을 고려하면 사장을 지배하는 강력한 사업자들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10년의 성장-호황기를 누리며 보인 각 회사의 대응은 상이했고 그 결과도 참 달랐다. 어떤 기업은 PC통신 시장에서 누리던 주도권을 웹 시장에 그대로 누리기를 원했고 이에 PC통신 서비스들을 이식하기 시작하였다. 문제는 ‘데이터당 과금’이라는 과거의 패러다임까지도 옮겨오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골리앗들은 새로운 시장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기존 시장의 언어로 새로운 고객들과 대화하려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러한 기업들의 사례들을 돌이켜 보며–상당히 결정론적인 사고이기는 하지만– 패러다임 전환기 기업전략의 중요성이 새삼스레 느껴진다. 영국 정경대 게리 해멀 교수는 기업이 스스로 처한 불가피한 운명을 직시하고, 예상 가능한 미래에 대비하는 한편, 비주류에서 배워야 한다는 다소 뻔해 보이기까지 하는 주장을 했다. 덧붙여 격변기에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 기업은 통념에 도전하고, 유전적 다양성을 고취할 뿐만 아니라 전략적 유연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부연했다. 참으로 교과서적인 이야기이다. 하지만 과거 기업들의 역사와 현재 기업들의 경영에서 이러한 상식적인 일을 실천에 옮긴 기업은 얼마나 되는가. 기존 시장에서 얻은 문법과 통념으로 새로운 시장과 대화하려 하고 있는 않은가, 성장에 집중한 채 시대의 전환에 발맞추지 못하고 교과서적인 대응마저 하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재차 자문하게 된다. 기업은 한 곳에 정착하여 지력(地力)이 다할 때까지 버티는 농부가 아니라 늘 푸른 초지를 쫓는 목동처럼 움직여야 한다는 격언이 떠오른다.  



[사족]

앞서 언급했던 모뎀 제조사 US Robotics는 재미있게도 아직까지 전화 모뎀을 생산하고 있다. 90년대 후반 안정성과 속도를 모두 갖춘 명품 Dial-up 모뎀으로 명성을 떨쳤던 US Robotics는 여전히 56 Kbps 모뎀을 생산하고 있다. 이들 제품은 PC통신을 위한 것은 아니고 인터넷 인프라가 취약한 지역에 있는 점포들의 POS(Point of Sales) 단말의 통신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US Robotics는 인수를 거듭하여 현재는 UNICOM Global의 자회사로 있다.


[1] 2016년 10월 15일 유안타 증권은 아프리카TV의 유료 아이템 별풍선 매출이 연평균 30% 넘게 증가하고 있다고 추산하였다. 아프리카 TV의 영업이익률은 작년 12.1%에 이어 올 상반기 19.5%로 7.3% 포인트 상승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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