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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현 Apr 07. 2017

KODAK을 위한 변명

과연 KODAK을 '비혁신으로 저물어버린 별'이라 이야기할 수 있는가?

후배가 어린 나이이긴 했다. 하지만 코닥(KODAK)은 알 것이라고 생각했다. 후배는 코닥을 어떻게 모를 수 있냐는 나의 질문에 ‘어린 시절 아버지가 필름을 쓰셨던 기억은 나요…’라는 답을 했다. 이거 참 괜히 머쓱해진다. 필름을 모른다니... 고등학교 때부터 디지털카메라만 썼다고 한다. 그러니 코닥을 모르는 것이 이상치도 않다. 더욱이 2012년도 파산보호 신청을 한 이후 대중들의 인식 속에서 코닥이라는 이름은 더 희미해졌다. 요즘 들어 코닥은 간간히 뉴스에서 '혁신의 지연이 기업에 미치는 악영향'의 사례로만 등장할 뿐이다. 디지털 시대에 대비하지 못한 코닥 결국은 파산했다는 내용으로 말이다. 필름의 제왕으로 100년을 호령하다 디지털이 등장하자 한순가에 아스라이 사라진 회사. 많은 이들이 코닥을 잘 나간다고 방심하다 망해버린 회사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미지는 코닥 입장에서는 분명 억울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부터 변명을 해보고자 한다. 어린 시절부터 코닥 필름을 써오고, 코닥으로 현상을 하고, 코닥의 디지털카메라를 사용했던 팬으로서 말이다. 하나하나 꼼꼼히 짚어보도록 하자.



혁신기업 코닥

오늘날 흔히 코닥을 아날로그 시장에 안주하다 뒤쳐진 기업이라고 이야기한다. 즉, 필름 시장에 안주하다 디지털카메라의 시류를 타지 못하고 가라앉았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코닥의 디지털 기술력이다. 디지털카메라를 최초로 만든 기업은 어디일까? 놀랍게도 세계 최초의 디지털카메라는 코닥이 만들었다. 필름에 안주했다는 누명(?)을 쓴 그 코닥이 말이다. 카메라뿐만 아니라 디지털로 이미지를 저장하고 재생할 수 있는 시스템을 인류 최초로 개발했다. 그것도 무려 1975년도에... 그 카메라는 페어차일드 반도체가 1973년에 개발한 100X100 픽셀의 CCD(Charge-Coupled Device) 센서를 장착했다. 상용제품을 목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지만 나름 충전지를 채용하여 휴대할 수 있도록 하였다. 무게는 3.6Kg에 달했다.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1만 화소밖에 기록하지 못했고 사진은 무려 카세트테이프에 기록했다. 당연히 촬영 시간도 오래 걸렸다.


최초의 디지털 카메라. 오른쪽 상단의 카세트 테이프가 인상적이다.


사진 재생 장치. PC 크기의 거대한 리더가 필요했다.


흑백 사진밖에 찍지 못하고. 화소수도 적었지만 당시로써는 필름을 쓰지 않고 찍을 수 있는 최첨단의 기술을 선보인 셈이었다. 코닥의 디지털 기술력은 독보적이었다. 1975년에는 코닥을 제외한 어떠한 회사도 디지털 영역의 근처도 접근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필름 시장의 헤게모니를 연장시키기 위해서 디지털에 대한 투자를 줄였다는 일반의 상식도 사실과 다르다. (물론 상용 제품 출시를 미루긴 했지만...) 디지털 센싱 기술에 대한 투자는 줄어든 바 없다. 당시 워낙 독보적인 디지털 이미지 셍싱 기술을 갖고 있던 터라 코닥의 디지털카메라는 군사용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NASA의 천체 촬영에 사용되기도 했다. 특히 NASA의 천체 사진의 대부분은 코닥의 필름과 디지털 센서, 렌즈를 통해 촬영된 것이다. 천체 관측의 대명사 허블 우주망원경의 경우도 핵심 부품인 반사경 모듈을 이텍(Itek)과 코닥을 통해 공급받았다. (결국 우주로 날아간 것은 Itek의 모듈뿐이었지만...) 코닥의 연구비 투자는 매출액의 6~7%로 굉장히 높은 편이었다. 특히 코닥은 연구원 채용에 정성을 들이는 기업이었다. 창업 초기부터 연구원 채용과 처우는 달든 기업들보다 남달랐다. 1886년 정직원이라는 개념 조차 희미했을 때 코닥은 정규직 연구원을 선발했을 정도였다. 지금이야 구글과 페이스북이 최고의 직장이라 찬사를 받고 있지만 코닥은 1990년대 초까 100년 동안 연구원들에게 최고의 직장이라는 타이틀을 지켜왔다.


디지털 분야에서 코닥이 선보인 다른 제품들도 살펴보자. 2000년 디지털액자를 출시하였다. 이 제품은 세계 최초의 디지털 액자였다. 사용자 편의를 위해 이 제품은 Storybox online photonetwork과 연동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액자에 이어 코닥은 2001년 'KODAK Gallery'라는 온라인 갤러리를 선보였다. 온라인 상에서 사진들을 공유, 감상할 수 있는 서비스였다. 지금의 구글 피카사, 야후 플리커와 같은 서비스였다. 이 역시 세계 최초의 서비스였다. 또 소자 분야에서도 코닥이 이뤄낸 혁신은 독보적이다. 1987년 코닥의 연구원인 탕친왕과 스티븐 반 슬레이크는 '적층 기능 분리형 디바이스 발광소자'라는 것을 개발한다. 이것이 흔히 우리가 OLED라고 알고 있는 유기 발광 다이오드이다. 그렇다. 그 유명한 OLED를 발명한 것도 코닥이다. 코닥이 디지털 기술에 기여한 부분은 생각보다 많다. 그렇기 때문에 코닥을 디지털 시대에 기술 혁신에 실패한 기업으로 분류하기에는 그 면면이 참 혁신적이다.



디지털 시장에서의 고전?

그럼 이제 코닥이 디지털카메라 시장에서 고전했다는 이야기는 맞는지 살펴보자. 코닥이 1990년대 초까지는 디지털카메라 기술을 상용화시키지 않고 미뤄왔던 것은 사실이다. 당시 필름 사업이 잘 나가고 있었고 디지털 기술은 사용화 되기에는 너무 비싼 기술이었기 때문이었다. 대중적인 디지털카메라로 출시하기보다는 대부분 고부가 의료기기나 천체 관측, 군용 장비 등의 분야에 활용되었다. 다른 회사도 상황은 비슷했다. 1981년 소니가 최초의 상용 디지털카메라 ‘마비카’를 출시하였으나 사업은 지지부진했다. 이미지를 저장할 저장 매채가 마땅치 않았고 센서 기술도 신통치 않아 도통 시장에서 호응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던 것이 90년대 중 후반 메모리 기술의 등장과 고화소 CCD, CMOS가 등장하면서 바뀌었다. 디지털카메라 시장의 태동이 시작된 것이다. 코닥도 이때를 맞춰 준비해둔 기술로 시장에 뛰어든다. 결과는 어땠을까? 알려진 바와 달리 코닥은 승승장구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 코닥은 그야말로 디지털카메라 시장의 강자였다. 전 세계 디지털카메라 시장 점유율 1위를 달성한 해도 많았고 2005년도에는 한해 60억 달러의 수익을 올리며 디지털카메라 사업의 정점을 찍었다. 


픽스프로와 'C시리즈'로 한때 보급형 디지털 카메라 시장의 왕좌에 올랐던 코닥



코닥의 선전은 보급형 카메라 시장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고급기 시장에서도 코닥은 독보적이었다. 그중에서도 유명했던 것이 다른 회사의 아날로그 바디에 디지털 센서 기술을 접목시켜 만든 ‘코닥 프로페셔널 DCS’ 시리즈였다. 센서 기술이 타사 대비 월등했기 때문에 코닥의 고급기 카메라는 많은 프로 사진가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1991년 니콘의 F3를 기반으로 만든 DCS를 시작으로 1993년 DCS 200, 1995년 DCS EOS 등 다른 회사가 DSLR 출시를 엄두조차 내고 있지 못할 시기에 코닥은 매년 한 개 이상의 모델을 출시했다. 고급기 라인업인 DCS 시리즈의 퍼포먼스와 인기는 독보적이었다. 1998년 당시 한대에 100만 원이 조금 넘었던 캐논의 EOS-1n을 기반으로 만든 DCS 560 모델은 출시가가 4,500만 원이 넘었지만 없어서 못 사는 카메라였다. (450만 원이 아니다. 4,500만 원이다!) 600만 화소에 뚱뚱한 디지털 백을 달고 있어 지금 기준으로는 별것 아닌 카메라였지만 90년대 중반 DCS는 사진 기술의 결정체 중의 결정체였다. 




지금까지도 명맥을 유지하는 코닥의 이미지 센서 기술

디지털카메라를 개발한 회사답게 코닥은 아직까지도 좋은 이미지 센서를 선보인다. 2000년 대들어서 많은 회사들이 디지털카메라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독자 센서 기술을 지닌 회사는 흔치 않았다. 많은 회사들이 코닥의 이미지 센서를 자사의 제품에 채택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품질만큼 가격도 높아 섣불리 사용하기가 어려웠다. 간혹 새로 출시되는 어느 회사의 카메라가 코닥 센서를 채택했다는 루머가 돌기라도 하면 사진 커뮤니티가 술렁대곤 했다. 코닥이 이미 10년 전 디지털카메라 사업을 접다시피 했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코닥의 이미지 센서를 기다리고 있다. 일례로 코닥 센서를 자주 채택하는 라이카의 경우 새로운 제품을 출시할 때마다 고객들에게 센서에 대한 문의를 받는다고 한다. 이번에 출시하는 M 라인업의 신제품이 코닥 센서를 사용하는지, 여전히 좋은 품질의 사진을 뽑아내 줄 것인지 말이다. (아쉽게도 코닥의 이미지 센서 부문은 2012년 사모펀드사 플래티넘 에쿼티에 매각되었다. 그리고 라이카의 이번 신제품에는 코닥 센서가 쓰이지 않았다고 한다.)




사업의 다각화의 실패?

코닥의 파산을 언급할 때 꼭 등장하는 비교 상대가 후지필름이다. 전 세계 필름 시장을 코닥과 양분했던 회사 후지필름. 이 후지필름을 언급하면서 나오는 이야기가 ‘성공적인 사업의 다각화’이다. 후지필름 그룹이 제약과 화장품 영역에 뛰어든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후지 필름은 다각화에 성공했지만 코닥은 그렇지 못한 것이 파산의 원인 중 하나’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코닥은 정말 주야장천 필름만 팔았을까? 사실 후지 필름의 사업 영역은 놀랍도록 코닥과 닮아있다. 카메라, 필름, 광학기기, 화학, 소비재 필름, 의료기기, 이미지 처리 시스템과 프린터 사업 등 코닥의 사업 영역을 후지 필름이 벤치마크 했던 사례가 많다. 단,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코닥은 1990년대 이후부터 화학, 프린터, 이미징 사업을 분사하여 독립기업으로 정리 해왔던 반면 후지필름은 대부분의 회사를 ‘후지 필름 그룹’이라는 카테고리 내에서 유지해왔다는 것이다. 코닥에서 독립한 많은 수의 기업이 아직도 건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코닥에게 필름만을 고집하다 파산에 이르렀다는 딱지를 붙여 버린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코닥에 뿌리를 둔 기업들의 사업 영역도 후지필름 못지않게 넓었기에, 그렇게 쉽게 결론 내릴만한 문제는 아닐 듯하다. 일례로 우리가 흔히 선팅의 대명사로 알고 있는 루마(LLUMAR) 필름도 코닥의 자회사가 개발, 생산하는 제품이다. 후지필름이 필름에 쓰인 콜라겐을 활용하여 만든 화장품이 다각화의 상징처럼 다뤄진다. 그런데 코닥이 기존의 필름 제품의 역량을 갖고 만든 루마는 왜 다뤄지지 않는 것일까. 다각화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이 둘의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그러면 왜 코닥은 저물어 갔는가?

코닥이 사업에서 판단 착오를 한 부분은 분명히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이렇다. 1998년 코닥은 중국의 모든 국영 현상소를 떠안고 대신 중국의 필름 시장 독점권을 인정해 달라고 했다. 이른바 '98 협의'로불리우는 이 조치는 당시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던 후지 필름의 입지를 극적으로 좁힐 수 있는 조치로 여겨졌다. 실제로 코닥은 중국 시장에서 중국의 토종 필름 기업 ‘러키 필름’을 누르고 3년 만에 시장 점유율 1위에 올랐고 8000개의 현상소를 운영하게 되었다. (이후 코닥은 국영 필름사 럭키 필름의 지분도 획득) 하지만 국영 현상소의 운영 정상화는 어려웠다. 밑 빠진 독에 물 붇는 상황이 발생했다. 2000년대 초까지 코닥은 무려 12억 달러를 중국에 쏟아부었다. 하지만 현상소 상황은 점점 더 안 좋아졌다. 결국 12억 달러는 손실로 돌아왔다. 중국에서의 몰빵 베팅은 회사 전체를 흔들기에 충분했다. 설상가상으로 2000년대 초 디지털카메라의 보급이 급속화 되면서 필름 산업은 본격적인 하향 그래프를 그렸다. 중국 시장에서의 손해를 메우지 못한 데다 주력 사업의 이익률이 급감한 채로 시간은 흘러갔다. 디지털로의 전환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듯했지만, 기존 사업에서의 손해가 워낙 컸다. 2000년대 초 보급형 디지털카메라 시장에서 선전했지만 경영 실적은 악화일로였다.


코닥의 디지털카메라 제품 라인업은 매우 저렴하고 다루기 쉬운 보급형 카메라와 초 고가의 전문가용 카메라로 양분되어있었다. 이른바 중급기라 불릴만한 라인업은 캐논이나 니콘의 일본 회사들이 점령한 상황이어서 이 시장에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2000년대 후반 들어 카메라 시장의 양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저가의 카메라 시장은 휴대폰이 점령하기 시작했고 중급기로 분류되었던 DSLR 카메라가 고급기 시장으로 영역을 넓히면서 코닥이 발붙일 수 있는 곳이 점점 줄어들었다. 다른 회사들이 고화소의 보급기종, 초소형의 미러리스 등 새로운 개념의 디지털카메라를 속속 출시할 때 코닥은 변변한 제품 하나 내놓지 못한 채 포지셔닝 실패를 거듭했다. 그렇게 코닥은 저물어 결국 2012년 파산 보호 신청을 내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볼 때, 과연 코닥은 혁신을 이루지 못해 망한 기업인가? 시장의 향방을 예측하는 것이 혁신 기업의 필수 조건이라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2013년부터 회생 절차를 겪으면서 애플,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등에게 자사가 갖고 있던 특허들을 판매하면서 얻은 수익이 5.25억 달러에 이른다는 점만 보더라도 코닥은 인류 역사상 손에 꼽을 수 있는 기술 혁신 기업임에는 분명한 듯하다. 


코닥은 파산보호 신청 이후에도 재기를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CES에 대형 부스를 차리고 자사의 새로운 기술을 홍보했다. 단, 아직도 부스에서 필름이 사라지지 않고 다른 기업들이 이미 선보인 기술들을 코닥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제품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이 불안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다시 살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이다. 2016년 기준으로 1600만 달러의 손해를 기록해 경영이 정상화되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어쩌면 다시는 예전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비록 다시 재기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사진이라는 기술과 서비스, 문화로 많은 이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덕 코닥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2017 CES에서 코닥 부스. 가운데는 CEO Jeff Clarke. 그가 들고있는 것은 사진에 특화된 스마트폰이다. (하아... 스마트 폰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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