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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현 Jan 26. 2017

2002년, 한국 인터넷 시장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차지하기 위한 각축, 그리고 유료화

최근 모바일이 한국 IT 시장의 화두로 떠오르기 전까지 포털은 한국 인터넷 시장의 최대 격전지였다. 포털을 점령하는 자가 한국 인터넷 시장을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익히 알려진 대로 포털 전쟁 10년의 승자는 네이버다. 현재 70%가 넘는 검색 점유율을 유지하며 한국 인터넷 시장을 호령하고 있다. 그것도 2, 3위와 현격한 격차를 보이며 말이다. 워낙 압도적인 차이로 시장을 독식하다 보니 서비스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많은 비판도 받는다. 어떻게 네이버는 이렇게 시장을 지배할 수 있었는가. 많은 전문가들이 현상의 원인을 찾아보고자 당시 시장의 상황을 다각도로 조명했다. 시장의 환경, 네이버와 다른 기업들의 전략적 차이 등을 들어 네이버 성장의 요인을 분석했다. 이 글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떻게 포털 시장이 변해왔는지 시계를 거꾸로 돌려보려고 한다. 단, 인터넷 판도 변화의 분수령이 된 2002년도 하반기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그리고 그 앞뒤 상황을 통시적으로 보면 좀 더 재미있게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2002년 이전, 혼란기


2002년 전 상황을 짚어보자. 1996년 무주공산이던 인터넷 검색 및 포털 시장에 가장 먼저 뛰어든 것은 한글과 컴퓨터의 ‘심마니’였다. 마땅한 경쟁자들이 없었던 당시, 심마니는 쉽게 시장을 장악하는 듯했다. 하지만 1997년 (주)지식발전소의 ‘엠파스’, 다음의 ‘한메일’(hanmail.net, 1999년 포털 다음으로 개명), 네이버의 ‘웹 글라이더’(1999년 네이버로 개명)가 차례로 도전장을 내민다. 나아가 같은 해 소프트뱅크 코리아는 미국의 최대 포털사이트 야후와 손잡고 야후 코리아를 출범시켜 한국 시장 공략에 나선다. 한글과 컴퓨터의 짧은 독주는 1년도 채 되지 않아 막을 내린다.

이러한 혼란기에서 첫 승기를 잡은 것은 야후 코리아였다. 야후 코리아는 2000년 시가총액 958억 달러 규모로 세계 최고의 인터넷 기업이 된 야후의 후광을 입고 탄탄하게 성장했다. 인터넷 트렌드를 선도하는 야후의 자회사가 세련된 UI와 비교할 수 없는 속도, 안정성 등으로 사용자를 매혹시켰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었다. 국내 기업들은 애국 마케팅으로 응수했다. ‘이순신 장군님 야후는 다음이 물리치겠습니다.’라는 자극적인 카피로 타도 야후의 의지를 불태웠던 다음은 국내 이메일 시장 점유율 70%라는 강력한 무기를 갖고 있었다. 한메일(hanmail.net)로 한국 이메일 시장의 절대 강자였던 다음은 이메일 시장에서의 영향력을 검색 및 포털 시장으로 확장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당시 다음의 광고 카피. 인터넷 자주권을 지켜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왔었다.


통계를 집계하는 방법과 기관에 따라 국내 포털 시장 점유율과 검색 시장 점유율은 다소 상이하게 나타난다. 검색 점유율에서는 2002년 전까지 야후가 1위의 자리를 굳게 지켰다고 하는가 한편 포털 시장으로 범위를 확대하여 추산했을 때에는 다음이 2000년 야후로부터 1위를 넘겨받았다는 통계가 있기도 하다. 한 가지 눈여겨볼 특징은 어느 통계를 보더라도 한 사업자가 시장을 독점하는 형태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코리안 클릭의 2001년 통계를 보면, 사이트당 체류 시간 기준으로 야후가 33.1%로 1위, 네이버와 엠파스가 18.8%와 18.1%로 2, 3위를 하고 있고 다음이 12.4%로 4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 시기는 태생이 조금씩 다른 서비스들이 각각의 장점을 무기로 검색/포털 시장에서 이용자들의 사랑을 나름대로 골고루 나누어 갖던 시절이었다.



패러다임 전환기의 도래


사용자들이 원하는 검색 서비스가 어떠한 형태인지, 사용자를 묶어둘 수 있는 플랫폼으로써 포털은 어떠한 모양인지 알아내기 위해 당시의 서비스들은 다양한 시도를 했다. 전체적인 레이아웃은 디렉터리 검색 메뉴, 키워드 검색 창, 뉴스의 구성으로 비슷했다. 사업자들은 특히 검색 결과를 차별화하여 경쟁우위에 서고자 하는 시도를 많이 했다. 이는 이용자들의 불만이 검색 서비스에 몰려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단순한 키워드 매칭과 정적인 검색 결과를 제공했던 서비스를 넘어 좀 더 편리하고 정확한 검색 서비스에 대한 요구가 높아져 갔다.


2002년 2월 야후 코리아의 초기 화면. 정적으로 구성된 화면과 분류별 디렉터리로 웹 검색을 지원했던 점이 특징적이다.


패러다임 전환의 신호탄들은 의외의 곳에서 쏘아 올려지기 시작했다. 그중 눈여겨볼만한 서비스는 한겨레 신문사의 디비딕(dbdic.com). ‘신문사가 검색 서비스라니’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2000년대 초반 인터넷 시장의 팽창기에는 많은 신문사들도 인터넷 시장의 패권에 도전하던 시기였다. 특히 뉴스 채널로써의 주도권을 포털 서비스에 넘겨주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한겨레 신문사도 그중 하나였다. 포털들이 제공하던 디렉터리 분류에 따라 웹페이지를 찾거나 단어 매칭으로 검색을 하던 기존의 방식을 넘어서고자 했다. 이때 한겨레 디비딕에서 내세운 방식이 질의응답 형 검색. 이용자들이 궁금한 정보를 올리면 한겨레 신문사의 기자들이나 직원들이 답을 다는 형태의 신개념 검색이었다. 서비스 초기부터 반응이 좋았다.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나가 이용자가 늘었고 사용자들이 올린 재미있는 질문들은 잘 추려져 책으로 냈다. 이 책도 인기가 좋아 2권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후 질문의 개수가 증가하면서 기자나 직원이 아닌 일반인들도 질문에 답을 다는 열린 플랫폼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렇게 새로운 검색의 실험을 성공하는 듯했다.


디비딕의 초기화면. 많은 이들이 네이버가 최초로 선보인 것으로 알고 있는 지식 검색의 원조는 사실 한겨레 신문의 디비딕이었다.


서비스가 커뮤니티 중심으로 변화한 것도 시대의 특징이었다. 이른바 ‘네트워크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여 이용자들 사이의 접점을 늘려 나간다는 전략. PC통신 시절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접점은 서비스가 제공하기보다는 이용자들의 기억에 의존해야만 했다. 나와 관계있는 사용자의 ID를 외우거나 기록하는 것이 관계를 맺는 방식이었다. 웹 서비스 초반에도 비슷했다. 이용자와 이용자, 그리고 서비스와 서비스는 독립적으로 존재했다. 그러던 것이 2000년대 초반에 들어서면서 점차 이용자들끼리 뭉쳐 커뮤니티를 형성하거나 그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서비스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용자와 이용자의 결합, 서비스 사이의 결합. 이러한 결합, 즉 네트워크화 현상은 한 서비스의 영향력이 다른 서비스로 전파되는 발판이 되었다. 강한 결속은 인기 있는 서비스에 이용자들이 폭발적으로 몰리는 현상을 만들기도 했지만 사용자의 외면을 받을 때에는 이용자가 급격히 감소하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이 영향으로 시장은 점차 승자 독식의 무대가 되기 시작하였다.



2002년 시장의 선두들이 선택한 전략 ‘유료화’


야후, 네이버, 다음, 엠파스가 옥신각신하며 시장을 나누어 가진 상태에서 운명의 2002년은 다가왔다. 2002년에서도 9~11월 사이에 많은 일이 벌어졌다. 그 시기를 요약하는 키워드는 유료화다. 인터넷 시장에서 유료화는 어떠한 형태로든지 소비자의 외면을 받는다는 교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기업이 유료화의 카드를 꺼내 들고 만다. 이미 90년대 말 PC통신 사업자들이 유료화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더군다나 대체 서비스로의 이동이 너무나 간편한 ‘one click away’ 환경에서 유료화는 무척 위험한 선택이었다.

가장 먼저 유료화의 카드를 꺼내 든 것은 프리챌이었다.

프리챌. 커뮤니티 서비스의 최강자로 네이버, 다음의 포털들의 카페 서비스를 넘어서는 인지도를 갖고 있었다. 커뮤니티의 수가(이용자 수가 아니다!) 100만 개를 넘어서자 프리첼은 이용자 수 증가에 따른 서버 및 인프라 운영비용에 쪼들리게 된다.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해야만 했고, 프리첼은 커뮤니티 운영자가 월 3,300원을 내면 5개의 커뮤니티를 운영할 수 있는 유료화 정책을 발표하였다. 2002년 10월 유료화 초반 프리챌 이용자들은 커뮤니티 운영자들만 돈을 내면 되는 것이니 그 정도면 납득할만한 수준의 정책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약간의 동요가 있긴 했지만 대부분의 커뮤니티는 일상적인 운영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조급증이 화를 부른다고 했던가. 프리챌은 속히 유료화 커뮤니티로 전환하지 않으면 해당 커뮤니티를 폐지한다는 강수로 짧은 시간 내에 유료화 전환을 추진하는 악수를 두고 만다. 이에 여론은 갑작스레 악화되었고, 포털들의 카페 서비스와 경쟁사였던 싸이월드의 클럽 서비스로 ‘이민’이 본격화되었다. 몇 달 사이에 100만 개이던 커뮤니티는 수만 개로 줄어버렸다.

디비딕. 대한민국 최초로 지식검색을 들고 나왔던 디비딕 역시 유료화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유료화를 선언한 2002년 9월 당시 디비딕은 하루에 등록되는 질문 수가 2000을 넘고 답변의 수는 8000개가 넘을 정도로 인기를 끌던 서비스였다. 사용자도 점점 증가하는 추세였다. 인명검색이나 프리미엄 뉴스, 뉴스 검색 등으로 유료화 전환을 꾀하던 다른 신문사들의 사례를 벤치마크 했던 것일까 아니면 이용자 증가에 따른 운영비를 충당하기 어려웠던 것일까. 디비딕을 운영하던 한겨레는 한창 성장기에 있는 사업을 섣불리 유료화 해버린다. 서비스를 시작한 지 2년 만의 일이다. 이용자는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안 그래도 이용자가 늘면서 전체적인 서비스 속도와 품질이 낮아진 상태에서 유료화를 단하여 이용자 체감 품질은 떨어졌다. 이용자들이 줄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용자 답변으로 검색을 대신하는 질의응답식 서비스였던 디비딕에게 이용자의 수는 서비스 품질을 좌우하는 근간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사용자가 줄어들기 시작하니 서비스 저하와 이용자의 추가 이탈이 반복되었다. 악순환의 시작이었다. 결국 디비딕은 유료화 3개월 만에 엠파스에 매각되고 만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디비딕이 열어 놓은 지식검색이라는 새로운 패러디임의 검색 서비스 시장을 2003년 2월 28일에 인수한 엠파스가 가져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신 네이버가 그 자리를 차지했는데, 네이버는 디비딕의 유료화 바로 다음 달인 2002년 10월 7일 ‘지식in’이라는 서비스를 출시해 디비딕으로부터 빠져나간 이용자들을 성공적으로 흡수했다. 이를 계기로 네이버는 지식검색은 지식in이라는 공식을 만들 수 있었고 네이버는 검색 시장에서 다른 서비스보다 한걸음 앞서 나갈 수 있었다.

한메일. 한메일을 운영하던 다음도 유료화에 뛰어들었다. 네이버 이전 포털 강자의 타이틀을 쥐고 있던 다음의 이용자 기반은 ‘전 국민의 이메일 한메일’로부터 나왔다. 한메일을 안정적으로 서비스하던 다음은 한메일로 발생하는 네트워크 효과의 덕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한메일 이용자들 불만 중 하나는 고질적인 스팸 메일이었다. 어느 메일 서비스도 마찬가지지만 한메일도 스팸이 많았고 지금처럼 스팸 메일 필터의 성능이 좋았던 것도 아니어서 사용자들은 ‘스팸 공해’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한메일이 꺼내 든 카드는 ‘온라인 우표제’였다. 기업 고객들의 메일 발송이 100통이 넘을 경우 통당 10원을 과금한다는 사실상 부분 유료화 카드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다음은 기업 고객의 광고성 스팸도 줄이고 이용자들이 겪는 스팸 문제도 해결하며 더불어 수익도 올릴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아마도 1석 3조의 묘수라 생각했을 것이다. 나아가 한메일 이용자들의 환영과 지지도 더해졌다. 다음의 자체 여론조사이긴 하지만 한메일 이용자들이 보인 온라인 우표 정책 찬성 여론은 시행 전 80%, 시행 후 71.9%에 달할 정도였다. 반면 기업들은 뿔이 단단히 났다. 대부분의 기업이 ‘메일 보낼 때마다 돈을 내야 하는 한메일’을 배제하기 시작했다. 이미 가입한 고객들에게는 다른 이메일로 갱신하기를 종용했고 신규 가입자를 받을 때에는 이메일 란에는 한메일을 아예 입력 못하도록 하였다. 다음은 어차피 국민 대 다수가 한메일을 쓰는 상황에서 기업들의 조치는 제한적으로 영향을 발휘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일까. 파트너들의 불평과 조치를 관망하기만 했다. 하지만 이 영향 때문인지 이용자들은 점차 다른 이메일에 가입하기 시작했다. 한메일 이용자 수가 정체에 접어든 반면, 메신저를 내세운 네이트가 약진하고 네이버 역시 꾸준히 가입자를 모으면서 2002년 70%가 넘었던 한메일의 점유율은 2008년 40%대로 꾸준히 하락하게 된다.


랭키닷컴의 사이트 순위 변화 통계. 유료화의 가장 거센 역풍을 맞았던 프리첼은 바로 다음 해 순위에서 밀려났다. 다음은 2003년 이후 패권을 내려놓아야만 했다.



독주의 시작


초기 포털 시장의 강자였던 야후는 야후 타이완의 간섭과 부침으로 특유의 자유로운 조직문화를 잃어가며 좌초하기 시작하였다.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2010년대에는 검색 점유율 1%를 기록했고 결국 2013년 야후 타이완의 일방적인 통보로 한국 시장에서 철수하게 된다. 유료화로 성장세에 제동이 걸린 다음은 검색 서비스 라이코스의 인수 실패와 소극적 마케팅 등의 이유로 포털 강자의 자리를 네이버에게 내준다. 자연어 검색으로 인기를 끌던 엠파스는 네이트에 합병이 되어 네이버-다음-네이트의 3강 체제의 한 축을 맡는다.

반면 네이버는 검색 서비스로 이용자들에게 긍정적으로 각인된 이후에도 블로그, 카페를 비롯한 다양한 서비스들을 포털이라는 카테고리 내에서 잘 버무렸다. 이용자가 네이버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오면 어떠한 서비스 이든지 안정적이고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느낌을 주었다. 그것도 무료로 말이다. 다른 서비스들이 부진했던 시기에도 꾸준하고 안정적으로 성장세를 이어가 포털의 왕좌에 앉게 된다. 한 가지 다소 아쉬운 점은 2007년 네이버의 독주체제가 굳어지고 시장의 승패가 결정 난 다음에도 경쟁자들은 주구장창 포털 시장에서의 영광을 되찾고자 노력했다. 탄도 네이버를 외치며 분투했다. 지도와 카페의 강자였던 다음, 메신저로 사랑을 받던 네이트, 글로벌 스탠더드였던 야후 모두 옛 영광을 쫓아 주구장창 포털 시장에서 승부를 걸었다. 이들이 개별 서비스에서 새로운 시장을 형성했으면 어땠을까…


2002년 이후 네이버의 상승세는 가파르다. 코리안 클릭의 이용자 체류시간 통계에 따른 비교



시장의 지배자로 등극하는 것은 인식의 문제다. 이용자들의 보편적 인식 속에 새로운 개념의 편리함, 새로운 개념의 기술, 새로운 개념의 안정성을 갖고 최초로 자리매김하는 기업이 시장을 지배하는 유리한 고지에 오르게 된다. 이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기업은 지속적으로 제품과 서비스를 광고하고 개선해야 하며 새로운 디자인을 선보여야 한다. 흔히들 우리는 이러한 활동을 마케팅 활동이라고 부르는데, 앞서 이야기 한 대로 단순히 광고나 홍보에 그치지 않고 모든 기업활동에 걸쳐있다. 필립코틀러가 이야기한 것처럼 마케팅은 전사적 활동이다. 마케팅은 R&D나 디자인처럼 기능적 활동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경영, 전략, 기획, 홍보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서 기업 활동이 마케팅 활동인 것이다. 즉, 기업 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이 사용자의 인식을 점령하기 위한 행위인 것이다.

2002년 그때 그 기업들은 치열했다. 실행에는 이유가 있었으며 전략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유료화를 전면에 내세웠던 것도 치열한 기업 활동의 산물이었을 것이리라. 논리적인 이유로 행해졌을 유료화를 비롯한 일련의 활동들, 하지만 이 활동들은 제품/서비스에서의 우위를 상쇄시키고 나아가 소비자들의 인식의 중심에서 제품/서비스를 밀어내는 행위였던 것이다. 반면 같은 맥락에서 네이버의 전략을 바라보자. 네이버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지속적인 갈구가 있었다. 초기 검색 시장을 대체할 패러다임은 무엇인지 찾아내려 애썼다. 무엇보다도 고객의 인식 속에 깊게 자리 잡으려는 노력을 지속했던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후 네이버의 행보를 봐도 같은 점을 목격할 수 있다. 포털의 시장이 저물기도 전에 네이버는 글로벌과 모바일이라는 목표를 재 설정하고 다음 먹거리를 치열하게 찾아다녔다. 그 결과 라인과 밴드, 스노우 등을 성공적으로 시장에 내놓았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이제는 모바일 다음 시장은 어디일지 궁리하고 있다. AI, 로보틱스 등을 들여다보고 있다.

네이버가 잘 한 것은 크게 보았을 때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 그 안에서 서비스를 실행에 옮겼고 그렇게 서비스들이 사용자들의 인식의 반석 위에 자리를 잡았을 때 이를 지켜낸 것이었다. 어쩌면 네이버는 문제 자체에 집중하는 것을 넘어 ‘시대의 전환’을 찾아 돌아다녔기에 지금의 위치에 있게 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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