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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현 Feb 17. 2017

내 주위의 또라이들로 부터 초연하기

직장 내 스트레스 유발자 감별법과 대처법

같이 근무하던 사람이 아침 댓바람부터 버럭 한다.

“아니 글쎄 아내가 회사를 그만뒀는데, 실업 급여를 받지 뭐예요?”

의아한 마음에…

“회사 그만두면 실업급여를 받는 거야 당연한데 뭘 그렇게 발끈하세요?”

“우리 와이프 건물주란 말이에요!”

무슨 일인가 싶어 의아하게 쳐다보던 사무실 사람들이 '그럼 그렇지...'하는 표정으로 눈을 돌린다.

그의 얼굴에 으쓱한 표정이 비친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건물이나 갖고 있는 사람이 실업 급여를 받는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매일 이런 식이다. 마치 무언가 화가 나서 분개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만, 내용을 들어보면 결국 자기 자랑이다.


처음 같이 일하게 되었을 때에는 그저 밝고 사교성 좋은 사람인 듯했다. 무난한 사람이어서 일하기 나쁠 것 같지 않았다. 단점이라면 잘난 척이 너무 심하다는 정도? 근데 그 잘난 척이 문제였다. 시간이 갈수록 도를 더해갔다. 자신의 학교, 사는 동네, 부모의 재력은 기본이었다. 나중에는 자랑할 거리가 부족했던 것인지 자신의 성생활 빈도와 배변량까지도 자랑의 소재로 삼았다. 자랑에서 멈추었으면 좋았으련만, 주위 동료들을 습관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재력, 사는 곳, 학교로 등급을 매겼다. 어린 친구나 직급이 낮은 이들을 무시하는 것은 다반사였다. 자신이 조직의 중앙에 서기를 원했다. 그의 나르시즘 성향에 비례해 권위주의적인 모습도 늘어만 갔다. 나의 피로감도 더불어...



결국은 인간 관계

2016년 4월 잡코리아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직장 내 스트레스의 가장 큰 원인으로 상사/동료와의 관계를 꼽았다. 과다한 업무량이나 낮은 연봉, 직무 불만족에서 오는 스트레스 보다도 관계로 인한 스트레스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는 이야기다. 다들 느끼고 있지 않는가, 회사 생활에서 제일 어려운 건 인간관계인 것을… 그렇다면,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줄이는 해법은 없을까? 아니 해결하지 못한다면, 적어도 나를 힘들게 할 만한 사람, 나쁜 조직 분위기를 만들 법한 사람을 가려내는 방법은 없을까?



로버트 서튼 교수는 ‘또라이 제로 조직’, ‘굿 보스 베드 보스’ 등 조직 내 인간관계와 관련된 책들로 유명하다. 스탠퍼드대학에서 리더십에 대한 연구를 하는 그는 직장 내에서 다른 사람들의 정서를 파괴하는 사람들을 가려내고 개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서튼 교수는 저서들을 통해 주위 사람 혹은 나 스스로가 또라이 인지를 파악하고 고쳐 나가는 방법에 대해서 알려준다. 이른바 좋은 리더로 나아가는 이정표를 제시해 주고자 한다. 그런데, 로버트 서튼 교수는 자신의 직업상-리더십 연구가이기 때문에- 상황을 너무 긍정적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아닐까? 어떠한 상황이든지 ‘개선할 수 있다’고 전제하니 말이다. 나는 이러한 종류의 개선이 현실에서는 거의 일어나기 어렵다고 본다. 실제로 내 주변에서는 요주의 인물들이 개과천선 하는 모습을 거의 목격한 바 없다. 또라이들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 대부분은 자기가 또라이 임을 인정하지 못한다. 아니 인식 조차 하고 있지 못한다는 말이 더 맞겠다. (자신이 또라이 임을 자각하는 사람은 애초에 또라이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설령 스스로 또라이 임을 어렵게 알아차렸다고 하더라도 그 상태를 벗어나는 것은 무척 어렵다. 거기다 우리 사회는 또 어떠한가? 내가 또라이들이 사라지지 않고 또 고쳐지지 않는다 여기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의 사회-직장, 학교 등이 경쟁과 갈등에 매우 호의적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또라이들을 양산하는 좋은 텃밭일지도 모른다.



Ubiquitous - 언제나 어디서나 존재하는

우리 주위의 또라이들은 어떻게 실재하는지 보자. 다른 사람을 험담하거나 시기하는 것은 기본이고 본인이 처한 어려움을 남들도 덩달아 겪기 원하는 심통을 부리기도 한다. 원하지도 않았는데 남이 처한 어려움을 굳이 나서 해결하려 하기도 하고 반대로 자기 일을 막무가내로 떠넘기기도 한다. 작은 일에 쉽게 흥분하여 폭언하거나 집단 따돌림을 조장하기도 한다. 다른 이의 잘못에는 지나치게 엄격하여 타인을 쉽게 모욕하는가 하면 반대로 자기가 받은 작은 모멸감에는 분노한다. 오죽 우리 사회에 이런 사람들이 많으면 ‘또라이 보존의 법칙’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그것이 상사가 되었건, 동료나 후배가 되었건 간에 또라이들은 늘 우리 곁에 있다.


이런 스트레스 유발자들을 어떻게 찾아낼까?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으로 단정 짓기는 어렵다. 내성적인 사람, 외향적인 사람, 소심한 사람, 대범한 사람 가리지 않고 누구든지 또라이일 수 있다. 업무를 추진하는 능력이 뛰어나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꼼꼼하고 신중한 사람 중에서도 스트레스 유발자는 있다. 즉, 외부로 보여주는 행동 양식으로는 그 사람이 또라이인지 카테고리화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어떨 때에는 합리적이고 배려심 있어 보여 다가갔다가 다른 상황에서 보인 괴팍함에 당황하기도 하고, 강한 자기주장에 멀리했던 사람이 의외로 배려 깊은 사람인 경우도 있다. 그래서 나는 이들을 가려내는 요소를 찾아내고자 했다. 그것은 바로 ‘열등감’이다.



리트머스 시험지 - 자존감과 자존심

어떤 이의 열등감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그가 갖고 있는 자존감과 자존심을 관찰하면 좋다. 그렇다면 자존심과 자존감은 무엇인가? 흔히들 비슷한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고 혼용하는 사람도 많다. 많은 이들이 자존감과 자존심은 정비례 관계라 보기도 하던데 나는 오히려 반비례 관계에 가깝다고 본다. 자존감이란 자기 스스로를 바라보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자신의 자아를 인지하는 정도에 대한 척도다. 반대로 자존심이란 다른 사람과 나의 비교하면서 얻어지게 된다. 즉, 자존감이 자기 객관화를 통해 쌓이는 것이라면, 반면 자존심은 남들보다 비교 우위에 서면서 느껴지는 감정이다.

스스로 나는 어떠한 사람인지, 어떠한 성향을 갖고 있는지, 나의 심리 상태는 어떠하며, 나의 꿈과 욕망은 어떠한지를 파악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존감을 구축하는 과정이다. 반면, 남과 나의 실력을 비교하거나 재산, 직급, 지위 등을 비교하면서 심리적 만족을 얻는 것은 자신감을 얻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존심에만 익숙하다. 또, 자존심을 높이는 것에 더 능숙하다. 이는 경쟁사회에서 평생을 살아온 우리들 에게는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주위를 둘러보자. 아니 스스로를 한 번쯤 돌아보자. 나는 자존감이 높은 사람일까? 자존감을 구축하는 행위는 바다 가운데 섬을 만드는 것과 같다. 섬을 만드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워서 깊은 바다에 많은 노력과 세월을 들이부어도 바다 위로 솟을 듯 말 듯 하다. 하지만 한번 섬이 바다 위로 솟아오르면 넓디넓은 바다 가운데 ‘나’라는 존재를 흔들림 없이 지켜낼 수 있게 해준다. 반면 자존심을 세우는 것은 부표를 띄우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부표는 뷰유한다. 절대적인 위치를 잡아내기 어려우니 스스로의 위치를 가늠하는 방법은 다른 사람과의 위치를 비교하는 것 밖에 없다. 나아가야 할 방양과 거리를 모르기 때문에 끊임없이 남과 나를 비교해서 위치를 확인한다. 남들보다 뒤처졌다 생각이 들면 쉽게 속이 상하고 절망스럽다. 이를 보상하기 위해 나보다 못한 사람을 찾아 나선다. 찾지 못할 때에는 만들어낸다. 가장 간편한 방법 중 하나는 자기가 갖고 있는 권위를 무기 삼아 남을 깎아내리는 것이다. 사회는 이러한 과정을 경쟁이라는 단어로 포장한다. 회사는 직원들이 서로 경쟁하고 비교하기를 장려한다. 직원들이 이 경쟁으로 힘들고 불안해하면 그렇게 해야만 남보다 앞설 수 있다고 다독인다. 이는 마치 목마른 이들에게 바닷물을 떠 먹이는 것과 같다.


다시 열등감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비교에 쉽게 상처받지 않는다. 열등감, 피해의식, 관심에 대한 갈구 등은 낮은 자존감에서 기인한다. 같이 일하는 동료나 상사의 행동에서 그들의 자존감을 추측할 수 있는 증거들을 찾아보자. 또, 얼마나 쉽게 자존심에 상처를 받는지 알아보자. 

탐지 메커니즘은 간단하다. 우선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사람, 나르시즘에 절어있는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 역설적으로 자기 자랑은 열등감의 표출이다. 남과의 비교에서 얻은 우위를 만끽하는 사람일수록 열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나르시즘에 빠진 사람일수록 작은 모멸감에도 어쩔 줄 몰라한다. 그들은 자기 우위를 확인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자랑을 해야 하고 남들을 깎아내려야 하는 굴레에 빠져있다. 따라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칭찬하는 사람은 언제고 남에게 상처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스펙에 관심 갖는 자들을 경계하자. 상대가 어떠한 사람인지 삶 자체에 궁금해하기보다는 상대가 다니는 회사, 출신 학교, 재력으로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 같다면 조심하자. 그 사람의 가치를 인덱스로 판단하는 사람 치고 사람 하나하나를 존중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이러한 판단의 척도는 조직으로 확장해도 유효하다. 자존감이 낮은 리더가 이끄는 조직을 경계하자. 본인의 위치와 지위에 특별히 민감한 자들은 자신이 조직의 가운데에 서있기를 갈망한다. 주목을 받기 위해 권위에는 순종적이고 타인에게는 야박해진다. 동료의 권한과 의견을 무시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 자신을 좀 더 무대의 중심에 설 수 있게 해준다고 믿는다. 이런 사람들은 타인의 삶을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간편하게 사회나 회사가 제시하는 기준과 관념으로 타인의 삶을 판단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구성원들의 각각을 이해하고 관용하기보다는 기준 밖의 사람들을 관리하려 한다.

이들이 중심이 되는 조직은 유연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황지우 시인은 권위주의가 다양성을 거세하는 사회를 ‘관절 없는 신체’에 비유했다. 구성원들의 다양성이 무시된 채로 우두머리의 지시에 순응하는 획일화된 조직의 모습을 ‘무관절’이라 칭했다. 많은 회사에서 조직의 유연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실상은 많은 조직이 한 방향에 순응하는 무관절 신체가 되어가는 아이러니가 벌어지고 있다.



거리 벌리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주위에 스트레스 유발자가 있다면, 로버트 서튼 교수의 또라이 제로 조직이라도 선물해줘야 할까? 만일 그랬다면, 이후의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상상에 맡긴다. ‘네가 감히 건방지게 나를 미친놈 취급을 해?’라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까? 두고두고 괴롭힘을 당할 것이다.


회사의 조직 문화가 바뀌기를 기원해야 할까? 조직문화 역시 쉽게 바뀌지 않는다.


사실 가장 이상적인 해결책은 또라이들이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고 스스로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의 욕망과 심리, 성격에 대해서 고민하고 스스로 원하는 삶에 대해서 고찰하는데 시간을 쓸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또라이들은 그런 고찰을 원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회사도, 그리고 사회도 그런 것을 원치 않는다. 많은 이들이 어렵고 긴 자기 성찰에 시간을 쓰기보다는 짧고 간편한 비교로 자존심을 높이는 방법을 택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 그러한 자성의 변화는 현실에서는 일어나기가 어렵다.


그렇다... 피하는 수밖에 없다. 조금 고상하게 이야기하면 ‘심리적 거리를 확보’해야만 한다. 회사에서 어떻게 심리적 거리를 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사람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니 이 방법이 만병통치약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또라이들과 최대한 심리적 거리를 두자. 마주치는 일을 줄이거나 업무를 바꾸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혹은 부서를 옮기거나 아니면 아예 회사를 옮겨 버리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적어도 예전에도 그랬으니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그 사람한테 맞장구 쳐주거나 그들의 비난을 받아들이며 속 썩이지 말라는 것이다. '회사 생활이 다 이러니까...'라고 포기해 버리고 학습된 무기력에 빠지지 말자. 그들이 왜 그러는지 알면 조금씩, 담담하게 거리를 늘려 나갈 수 있다.



반대편으로 한 발자국

처음 예로 들었던 그 사람 역시 그런 행동이 열등감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의 대처는 한결 쉬워졌다. 왜 그러한 행동을 보이는지 아는 것만으로도 대처는 쉬워진다. 권위주의 적인 모습이나 간혹 적대적으로 보였던 그런 행동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아가 왕성한 성행위를 자랑하는 것이 사실은 본인의 단점을 가리기 위한 심리적 위장이었음을 알았을 때에는 측은하기까지 했다. 나의 행복이 손상된다고 느낄 때 적극적으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 사람과의 잡담을 줄이고, 업무상 필요한 대화 이상은 하지 않았다. 그 사람의 어그로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자 삶의 만족도는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대처가 꼭 긍정적인 결과로 나타난다고는 보장할 수는 없다. 적어도 현재의 상황에 순응하고 포기해버리지는 말자는 것이다. 나와 더 잘 맞는 사람들과 더 우호적인 분위기의 조직은 어느 곳에든 있으니 그쪽으로 다가가자. 현실 안주는 어떠한 변화도 가져올 수 없다. 용기를 갖고 그들의 반대 방향으로 한 발자국 내디뎌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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