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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퇴사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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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lee Sep 11. 2016

퇴사 일기 14. 메인 업무는 퇴사준비(2)

회의는 회의를 낳고... 난 그저 결재가 필요할 뿐이고...

앞서도 말했듯이 '면담자=결재권자'이지만, 한번 더 생각하라는 의미로 회사는 면담과 결재 절차를 분리시켜 놓았었고, 그룹장, ER 그리고 인사과와의 면담이 끝난 후에야 서류를 들고 결재를 받으러 다닐 수 있었다. 번거롭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렇게 서류 들고 왔다 갔다 하다 보니 뭔가 하는 일도 있는 것 같고 시간도 잘 갔다. 거의 9년 만에 말년 병장 시절이 돌아온 것 같았다.

총 3명의 결재가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대부분 부재중이라 결재를 받기가 쉽지 않았다. 그만큼 결재권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늘 바빴던 것이다. 간부나 임원들은 늘 회의로 가득 찬 일상을 지내고 있기 마련이었다. 심한 경우엔 회의들이 다 끝나면 오후 4~5시가 되었고, 그 이후부터 개인 업무를 보는 경우가 생기기도 했다. 회사에서는 때때로 불필요한 회의를 줄이라는 공지를 하기도 했지만, 그때그때 잠시만 줄어들 뿐, 다이어트 후 원상 복귀되는 몸무게처럼 회의 숫자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가 퇴사할 시점은 워낙 비상 상황이었기에 회의가 평소보다 훨씬 많았다. 비상 상황일수록 상부에서는 시시각각 현황 보고를 받기를 원했던 것 같다. 이로 인해 생겨나는 문제가 있었다.

회의의 의미는 '여럿이 모여 의논한다.'로, 회사에서 여럿이 모여 의논을 하게 되면 그에 따른 실행 과제가 따라오기 마련이다. 회의에서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잡는다거나 사고를 수습할 방법 등을 궁리하고, 의논을 통해 정리된 결론은 납기를 가진 일종의 '숙제'가 되어 부서 혹은 개개인에게 할당된다. 이런 과정이 없다면 전혀 가보지 않은 나라에서 지도와 이정표 없이 길을 헤매는 여행자와 똑같은 신세의 직원들이 늘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회의는 업무 진행에 있어 '기초 공사'와도 같은 것으로 없어선 안될 필수 절차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회의는 회의를 낳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회의를 준비하기 위한 회의'가 발생하는 것이다. 임원급 참여의 회의는 단순히 임원과 함께 의논을 하여 앞으로 갈 방향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현 상황에 대한 보고가 우선으로 이뤄진다. 그 보고 자료에 포함될 것과 제외되어야 할 것들을 우선 선별해야 하고, 현재 안고 있는 문제점에 대한 회의라면 상황 보고뿐 아니라 그에 대한 대책 등이 미리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회의는 준비 절차가 필요하고, 그 회의에 참여하는 임원의 직급이 높으면 높을수록 '준비 회의'의 숫자는 늘어나게 된다.

예를 들어, 사장급이 참여하는 회의에 팀장이 발표를 해야 한다고 가정하면, 팀장이 관리하는 각 부서들이 우선적으로 회의 자료들을 작성한다. 부서 내에서의 리뷰 회의 등을 거쳐 자료의 초안이 탄생하고, 부서장들과 상위 관리 조직인 그룹의 장이 모여 만들어진 초안들을 놓고 다시 회의를 하여 자료를 수정한다. 이후 수정된 자료를 팀장과 그룹, 부서의 장들이 모여 다시 한번 리뷰하고, 자료 일부분을 수정하여 회의에서 발표할 내용을 가다듬는다. 즉, 기본적으로 사장급이 참여하는 회의는 적어도 3번 이상의 준비 회의가 필요하고, 개개의 준비 회의들은 보통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일주일 내내 회의 자료와 씨름만 하는 간부들이 생겨난다. 하지만 그 자료와의 씨름에서 그들이 주로 하는 것은 문장의 어미, 조사 등의 수정인 경우가 매우 많았다. 근본적인 뼈대의 수정이야 어느 정도 이해가 갔지만,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에 너무 집착하는 나머지, 자료 구석구석의 한 단어, 한 글자 수정 등을 요구하는 리뷰 회의는 시간을 낭비하는 걸로 밖엔 안 보였다. 야구 선수 스즈키 이치로가 했던 '준비를 준비한다.'라는 말은 굉장히 멋있고 존경할 만했는데, 내가 회사에서 본 '회의를 준비하는 회의'들은 하나도 멋지지 않았다.

이렇게 '탁상공론'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회의들이 난무했던 그 시기에, 난 그저 내 퇴사 서류의 결재를 받기 위해 고개를 빼꼼히 들어 기웃기웃 거리고, 수시로 결재권자들의 메신저 로그인 상태를 확인했다.

그런데 첫 번째 결재자인 팀 내 ER이 계속 보이지 않았다. 알아본 결과 그는 휴가를 간 상황이었고 대신해서 결재해 줄 사람을 지정해주었다. 팀 내의 행사와 봉사활동 등의 업무들을 맡아 진행하던 한 책임이 ER을 대신해서 결재해 줄 사람이었다. 그래서 난 그에게 찾아갔고 서류를 내밀었다. 그러자 그는 굉장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왜...? 무슨 이유로 퇴사를 하는데? 뭐 많이 힘든 거 있었어?"

평소에 얼굴은 익히 알던 사이였지만, 직접적으로는 아는 사이가 아니었던 그가 내게 보인 반응은 조금 놀라웠다. 갑자기 면담이라도 한번 시작할 것처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대했기 때문이다. 대충 둘러댄 나는 잘 되라는 격려를 들었고, 그토록 필요했던 1차 결재도 받았다. 사무적인 반응을 보일 것 같던 사람이 감정적으로 반응을 하는 걸 보니, 내 또래에 퇴사를 하는 게 흔치 않고 큰 일인 것임은 분명하게 느껴졌다.

2차 결재를 위해 난 다시 그룹장을 찾았고 비어있는 그의 자리를 보고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몇 시간이 지난 후 잠시 자리에 온 그룹장에게 찾아가 서류를 내밀었다. 아무 말도 안 하면 어색할 것 같아서,

"너무 자주 찾아뵙는 것 같네요."
라고 말하며 웃었고,

"그러니까 이렇게 복잡한 걸 왜 굳이 하려고 해."


라는 그룹장의 마냥 가볍지만은 않은 농담을 들을 수 있었다. 그때 이미 그룹장은 그냥 아는 형님이 된 것 같았다.

공란이었던 세 칸의 결재란 중 두 칸을 채운 나는 마지막 결재자인 팀장이 오기를 기다렸다. 팀장 자리와 인접한 곳에 자리를 갖고 있던 서무에게 '팀장님 오시면 메신저 좀 주세요.'라는 말을 건네 놨고, '팀장님 오셨어요.'라는 답장을 받은 시각은 오후 5시 반쯤. 역시 오후 5시까진 본인의 자리로 올 수 없는 것이 팀장의 하루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바쁜 일과를 방금 마치고 온 그에게 퇴사 서류를 들고 찾아간 게 그의 어깨를 조금 더 처지게 하는 행동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당시의 나로선 그저 빨리 서류 절차를 마치는 게 우선이었다.

"퇴사한다고? 왜?"
"아... 미국에서 누나랑 매형이 의류 관련 사업을 하는데, 같이 하려고 합니다."
"브랜드가 뭔데?"
"아... 뭐 한국에서 하는 사업은 아니고요..."

본래의 내 모습처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거짓말을 내뱉고 있었다. 팀장은 더이상 길게 묻지는 않았다. 이런 사안에 있어서 그는 그룹장 선의 결정을 믿고 결재만 해 줄 뿐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조금 씁쓸한 분위기는 느껴졌다.

"잘 되길 바랄게."

라는 그의 마지막 한마디는 더욱이 그렇게 느껴졌다. 

팀장의 결재를 받는 것으로 나의 하루 일과는 끝이 났다. 결재가 완료된 서류를 들고 다음날 인사과에 찾아갈 일이 남아 있었지만, 팀 내에서의 모든 절차는 다 밟은 상황이었다. 다음날의 스케줄을 대강 머릿속에 그리며 책상 서랍에 서류를 넣어 놓은 채 퇴근을 했다. 퇴근 못하고 계속 일하고 있는 선배, 동기, 후배들이 있었지만, 그 누구의 눈치도 안 보고 사무실 밖으로 걸어나갔다. 부서 내의 사람들을 뒤로하고 나오는 건 이미 익숙해진 터였다. 다만, 잘 되길 바란다던 팀장의 한마디가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멀리 보이는, 유난히 파티션 벽이 높은 팀장의 자리를 바라보며, 그리고 그곳을 응시한 채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지금도 나의 퇴사가 팀장의 머릿속에 맴돌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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