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칼 같은
누나와 매형의 회사(이하 회사로 표기)는 LA 패션 디스트릭트의 한 건물 안에 있었다. 패션 디스트릭트는 말 그대로 패션 관련 업종이 모인 구역이었으며, 우리나라로 치면 동대문을 연상케 하는 곳이었다.
나는 그곳에 일을 하러 간 적은 없었지만, 누나와 매형이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회사에 갔던 적은 여러 번 있었다. 주로 저녁 식사를 함께 하기 위함이었는데, 갈 때마다 본 두 가지의 광경은 다음과 같다.
i) 다른 시간 때에는 볼 수 없는 교통체증(내가 회사로 찾아간 시각은 주로 오후 5시경)
ii) 텅 비어 있는 (회사들이 모여 있는) 건물
오후 5시쯤 글렌데일(집)에서 패션 디스트릭트(회사)로 갈 때는 늘 10번 프리웨이를 이용하곤 했다. 서울로 치면 내부순환로, 동부간선도로 등을 이용하는 셈인데, 이때만큼은 LA에 자동차가 얼마나 많은 지를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전 차선이 꽉 막혀 버리는 이 체증은 오후 5시부터 7시까지 딱 2시간 정도 이어지는데, 이는 그만큼 칼퇴근이 많다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미국에 얼마 안 있어 본 내가 이런 추측을 할 수 있었던 건 회사가 있는 건물은 내가 도착했을 때마다 늘 텅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광경을 보며 난 누나와 매형에게
"건물이 왜 이렇게 텅텅 비었어요? 다 퇴근들 했어요 설마?"
"응, 당연하지. 여기선 이렇게 안 하면 업주들 다 잡혀가."
매형의 대답을 듣고 한국에서의 회사 생활이 생각났다.
아마 2015년쯤이었던 것 같은데, 내가 기록한 잔업시간에 문제가 있어서 부장에게 불려 간 적이 있었다. 잔업과 특근 시간에 제한(법정 근로 시간)이 있었는데, (내 기억이 맞다면) 잔업은 주 12시간, 특근은 월 40시간 이내로 해야 하는 것이 규정이었다. 나의 잔업 시간이 문제가 됐던 이유는, 토요일 특근을 11시간으로 등록함으로 인해 그 주의 총 잔업 시간이 규정 시간을 초과했다는 것. 월~금, 5일 동안 잔업을 총 10시간으로 기록했던 나는, 특근은 잔업과 별개라 생각하고 토요일 정규 근무 시간인 8시간보다 3시간이 초과된 11시간을 시스템에 등록했었다. 이로 인해 토요일에 발생한 3시간의 근무 시간이 주 잔업시간에 포함되어, 총 13시간의 잔업 시간이 한 주에 등록된 것이다.
며칠 후, 휴무를 마치고 야간 근무로 복귀한 내게 한 회사 동기가 했던 말은, '근태 잘못 올렸어? 윗사람들이 아주 아마추어 같은 실수를 했다고 뭐라고 그러던데?'였다. 늘 규정 잔업 시간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고 더 기록한 적은 없는 터라, 그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고 나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일 더 했으면 칭찬을 해줘야지, 일 한만큼 사실대로 기록한 것만 갖고 아마추어 같다고 해? 그럼 아예 일을 덜 시키면 되는 것 아닌가?'라는 하나마나한 푸념을 마음속에 떠올릴 정도로, 당시엔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한 상태였다.
그날의 야간 근무가 끝나가던 이른 아침 무렵, 부서 사람들이 한 두 명씩 출근을 하기 시작했다. 늘 출근과 동시에 '라인에 별 일 없나?'라고 묻던 한 책임은, 라인 상황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 것처럼 '너 근태 작성 어떻게 된 거야?'라며 물었고, 늘 인사만 받고 별 말없이 출근하던 부장은 자리 착석과 동시에 나를 불러 근태 기록에 대해 물었다. 이 질문들에 대해 난
"아, 제가 특근이랑 잔업을 좀 착각해서요. 바로 근태 수정 결재 올리고 퇴근하도록 하겠습니다."
라며 (다른 잔소리가 날아오지 않을) 대답을 했다. 그러자 부장은 '어 그래, 그렇게 해라. 그거 수정 안 하면 사장님 잡혀 가.'라는 말을 했다. 나는 퇴근 준비를 하며 근태를 수정하는 결재를 올렸고, 그 후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법정 근로 시간을 초과하면 업주가 잡혀가는 건 동일한 것 같지만, 내가 느낀 건 매우 달랐다. '같은 옷, 다른 느낌'이랄까. '같은 법, 다른 현실' 정도?
글 초반에 언급한 두 가지 중, 저녁 시간 때 퇴근 차량들로 인해 차가 막히는 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니 아래 사진만 갖고 한번 생각해보자.
이 사진은 누나와 매형의 회사가 있는 건물이다. 휴대폰에 기록된 사진 상세 정보에 의하면, 이 사진은 오후 5시 4분에 찍은 사진이다. 하지만 지나다니는 사람 한 명 볼 수 없고, 사무실들의 조명은 이미 많이 꺼진 상태이다. 벌써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으로 출발한 상태인 것이다. 한국에서 회사 다닐 때 경험한 '오후 5시 4분'이란 시각은 라인에서 한숨 반쯤 섞인 목소리로 '이제 나가자.'라고 하며 슬슬 걸어 나올 때이다. 사무실에 나온 후 업무 정리 메일을 쓰거나 다른 업무를 해야 했고, 간혹 상사의 부름을 듣고 달려가 '아... 지금요? 네, 알아보겠습니다.' 하던, 그런 시간들이었다. 물론 라인에 갇혀 있거나, 회의를 하기도 했고, 다시 라인에 들어가기도 했던, 그런 '오후 5시 4분'들이었다. 그래서 미국의 오후 5시 4분이 내 눈엔 그렇게도 신기하게 보였던 것 같다.
물론 나의 경험은 한국에서든, 미국에서든 '일부분'일뿐이다. 한국에도 칼퇴근하는 회사들이 많이 있을 것이고, 미국에도 밤늦게까지 퇴근 못하고 일하는 회사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미국에선 사장님 잡혀갈까 무서워(혹은 혼이 날까 두려워) 잔업 기록 수정을 최우선적으로 시키는 문화는 없지 않을까. 이게 나의 미국에 대한 환상이자 기대였으며, (일부의) 현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던 미국의 '오후 5시 4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