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생략하는 법부터 배웠다
하얀 스커트의 여자가 광장을 가로질러 걸어간다 바쁜 걸음으로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다 바람이 그 뒤를 쫓다 맥없이 흐트러진다 그 일부가 카페 앞에 세워진 의자를 건드리고 의자는 덜그럭거린다 누군가 피웟던 담배꽁초가 그 와중에 중심을 잃고 길바닥으로 추락한다 나뭇잎이 흔들리고 자동차가 지나간다 리듬은 아무렇지도 않게 멈췄다가 시작되고 머뭇거린 흔적마저 순식간에 사라진다, 남은 것은 지나간 것들 뿐이다 그리고 지나간 것은 남겨지지 않는다 나는 네게 해야할 말이 많은 것이다, 라고 쓰고 소리내어 읽지 않는다 깊은 곳에 폐기한 잔해가 수면 위로 떠올라 바람에 날아 오른다 그 일부가 작은 바다를 건너 여기까지 다다른다 많은 것들이 비처럼 쏟아진다
빈 광장에는 비둘기가 몇 마리 종종거린다 보도블럭의 틈을 그러니까 빈틈을 쫀다 허술한 틈을 노린다 허공에서 몇 마리의 동료들이 지상으로 내려온다 트럭이 지나가고 출근길에 분주한 도시인들이 지나간다 그 중 하나가 머뭇거리며 차도로 내려간다 과속의 택시가 그를 친다 붉은 스키드 마크를 남기는 동안 검붉은 내장이 공중으로 흩어진다 비명과 욕설이 오가는 동안 검은 아스팔트에는 피가 흥건하다 노트는 붉은 색이고 나는 깜박이는 노트북의 붉은 램프를 바라본다 도시가 몇 초 멈춰있는 동안 비둘기들은 안녕하다 멈춰있는 택시를 바짝 따라붙은 버스에서 경적이 울린다 사람들은 지하철 입구로 빨려들어가고 택시는 다시 출발한다 채 식지 않은 작은 몸통이 버스 바퀴에 짓눌린다 붉고 선명한 스키드 마크가 새겨진다 리듬은 아무렇지도 않게 흐르다 멈추기를 반복하고 누군가 운전석에 앉아 성호를 긋는다 그 손가락 틈으로 바람의 일부가 피비린내를 옮겨 놓는다 네게 해야할 말이 많은 것이다 많은 말을 하지 못한 것이다 시간은 한 번도 자비롭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생략하는 법부터 배웠다
발자국들 자취들 냄새들 그리고 없어진 것들과 지워진 것들 강제로 들여보낸 것들과 임의로 놓인 것들 사이에서 도시는 어정쩡하게 탁한 몸을 웅크린다 바람이 그 허약한 틈을 노려 질주하다 예리한 모서리에 찢어져 흐트러진다 그 일부가 추락한 곳에서 비릿하고 뜨거운 것들이 태어난다 많은 것들이 삭제되었고 더 많은 것들이 대체되었다 네가 보는 것들은 내가 이미 본 것들 그러나 붉은 노트에는 어떤 것도 제대로 쓰여질 수 없었다 그저 붉은 표지가 말하는 것들 짐작하다가 실패한것들 네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해야할 말이 많았다 그러나 다 하지 못하였다 반복해서 실패할 따름이었다 바람의 일부가 마음의 일부를 건드리고 떠난다 조각조각 찟겨진 것들이 하나같이 떠올랐다 부딪친다 흩어진다 사라진다 잘게 썬 당근처럼 환하게 부서진다 리듬은 흔한 패턴으로 반복되고 멈칫거리고 바람이 그랬던 것처럼 많은 것을 건드리고 또 사라진다 비둘기 몇 마리가 지상으로 내려와 식어가는 핏속에 부리를 담근다 어떤 아침은 그렇게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