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앤'의 오마주 | 더블유코리아(W Korea) 2009.10
2009년, 더블유코리아 10월호에 실은 글. "줄 수 있는 게 이야기뿐이다"라는 카피 아래 필자 4명이 각각 유명한 이야기를 오마주했다. 서진(소설가), 깜악귀(눈뜨고 코베인 보컬), 황선우(W 에디터), 그리고 나. 서진은 <노르웨이의 숲>을, 황선우는 <캔디 캔디>를, 깜악귀는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에 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새로 썼다. 내가 고른 건 <빨강머리 앤>인데 소설이 아니라 애니메이션을 원본으로 했다.
빨간머리 앤을 좋아한다. 그런데 아무튼, 앤 설리는 살짝 좀 미친 것 같지 않나...
<2009년 9월 1일 오전 8시 09분에 저장한 글입니다.>
정말정말 보고 싶었던 일기장아. 비로소 2학기가 시작되었어. 그건 여름방학에 내려가야 했던 지긋지긋한 촌구석 애번리로부터 마침내 해방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단다. 여름 내내 인터넷도 없는 그곳에서 매일매일 달구지를 타고 논에 물대러 다니던 걸 생각하면 아아... 말은 안했지만 마씨 아줌마는 비싼 등록금이 여전히 아까운 눈치야. 생활보호대상자로 지정된 덕분에 반밖에 내지 않았으면서! 뭐 동네 사람들의 수근거림에도 날 호적에 올려주신 건 내내 고마워하고 있어. 마씨 아저씨는 여전히 술에 취해 운전하신단다. 애번리로 내려가고 얼마 안 되서 또 음주운전 단속에 걸렸지만. 면허가 정지되어서 포터 대신 달구지를 타고 다니셔. 언제나처럼 막걸리 두어 통을 드시고... 아아 내가 그 동네를 떠나려고 어떤 각오를 했던지... ㅠ.ㅠ
하지만 기쁜 일도 있었어. 그토록 바라던 외국인 친구가 생겼단다! 동네 노총각에게 시집온 베트남 여자인데 쑹인가, 흐엉인가, 하여간 새까만 머리가 정말 예쁜 아이란다. 보자마자 우린 진실한 우정을 나누리란 걸 알았지. 논일하러 갔다가 몇 번 얘기도 나눴는데 이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내 말에 그렇게 귀 기울여 준 사람은 그 애가 처음이었어(까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집중했다니까!). 사실 마씨 아줌마는 예전부터 “어린년이 뭐 즈리 시끄러운겨, 안설희 이년아!”라고 소리치기 일쑤였지만 괜찮아. 그 좁은 동네의 누구도 내가 갖고 태어난 무한한 상상력과 꿈과 같은 이상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연하니까.
서울로 오기 전날 나는 그 애를 데리고 반짝이는 저수지에 앉아 영원한 우정의 맹세를 나눴어. 그 애의 손을 꼭 잡고 반짝이는 저수지로 가는 동안 몇 번인가 어눌하게 "사...살려주세요..."라고 말했던 것도 같지만 우린 사실 즐거웠단다. “해와 달이 있는 한 우린 마음의 친구인 서로에게 충실할 것을 엄숙하게 맹세합니다”라고 말할 땐 그 애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말을 한 마디 한 마디 새겨들었으니까. 아아 얼마나 낭만적인지. 게다가 내 푸석한 갈색머리와 깨알 같은 주근깨에 비하면 새까만 머리의 그 애는 너무 예뻐서 쑹인지 흐엉인지 하는 촌스런 이름 대신 애번리의 다이아나란 이름을 새로 지어줬단다. 외국인 친구가 생기면 꼭 그런 이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주님께서 드디어 구원의 선물을 내려 주신거야. 아멘!
2009년 9월 15일 오후 5시 28분에 저장한 글입니다
일기장아, 이젠 너도 네게 어울리는 이름이 필요하지 않을까, 오래도록 생각했단다. 그래서 오늘부터 너를 ‘눈의 여왕’이라고 부르기로 했어, 그래서 [눈의 여왕] 주인공인 성유리 스킨도 붙였잖니. 이건 동아리 동기 길병두가 톡으로 보내준 선물이란다. 물론 내가 간호학과 게시판에 올린 “길병두, 제발 좀 귀찮게 하지마!”란 글을 지우는 조건이었지만 뭐 그 애가 날 좀 은근히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조회수가 2였지만 뭐). 남자애가 간호학과란 게 좀 걸리지만 난 장차 교사가 될 몸이니까 둘의 수당을 합하면 그럭저럭 집 한 칸 마련할 수 있지 않겠니? 아아 눈의 여왕님, 이런 날 너무 속물이라고 타박하진 말아주세요. 졸업하고 학자금대출을 갚으려면 어쩔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왜 스킨은 만들어주면서 블로그 주소는 안 물어봤을까? 이미 알고 있는 건가? ^^* 처음 봤을 때 찌질이 고딩처럼 내 머리 갖고 ‘마대자루!’라고 놀렸지만 괜찮아. 남자애들은 군대 갔다 오기 전엔 다 어린놈의 애새끼라고 마씨 아저씨가 그랬거든. 병두도 어서 군대 가서 사람돼야할 텐데.
오늘의 기도: 주님, 저를 미인으로 만들어주세요.
2009년 9월 30일 오전 3시 54분에 저장한 글입니다.
나의 아름다우면서도 진실한 벗 눈의 여왕에게.
500에 30짜리 내 하숙방, 초록 지붕 집에도 어느새 가을이 찾아왔단다. 창밖 사과나무에는 예쁜 단풍이 들었고 기쁨의 하얀 골목길에는 벌써부터 낙엽이 굴러다니지. 서울의 10월은 참 고즈넉하고 아름답구나. 가을 기분에 취해 나도 모르게 몇 블록이나 떨어진 빵집에서 레어 케이크를 사왔단다. 마을버스 비를 빵 사는데 다 써버려서 걸어올 수밖에 없었지만 도심에서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그것도 근사했단다. 하지만 오븐이 있었으면 더 근사한 레어 케이크를 직접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친구들을 초대해 파티를 열고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밤새 아름다운 밤의 뮤직에 대한 얘기를 나눌 수도 있었을 텐데! 오븐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부엌 하나 없는 처량한 신세가 나로 하여금 다시금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만들었지만 뭐 상관없어. 어차피 다들 동아리 일이나 남자친구와 데이트나 모의 토익 같은 걸로 바빠서 올 수도 없었을 거니깐. ^^*
오늘의 기도: 주님, 여러 가지로 바쁘시겠지만 저를 미인으로 만들어주세요.
2009년 10월 12일 오전 5시 23분에 저장한 글입니다.
나의 아름답고 진실된 벗, 눈의 여왕에게.
요즘 대학생들은 너무나 바쁜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니? 1학기 때도 그랬지만 다들 너무 바빠서 2학기 중반이 지나가는 지금도 내게 말을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단다. 블로그 댓글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괜찮아. 추운 곳에서 불어온 바람에게서 신비한 이야기를 들으며 혼자 걷는 캠퍼스도 낭만적이고 또 나 홀로 눈의 여왕과 마주하는 이 시간이야말로 내게 가장 중요하니까. 그리고 어차피 내 타고난 지성과 상상력으로 가득한 이상 세계를 이해할 만한 사람도 거의 없단다. 사실 나는 뱀이나 두꺼비가 우글거리는 구질구질한 토굴 속에 나를 밀어 넣고 맨밥과 물만 줘도 괜찮다고 생각해. 생각하기에 따라서 세상은 더럽고 위험한 곳으로도, 나만을 위해 주님이 만들어주신 조용한 곳으로도 보이니까. 어차피 인생이란 그런 거니까. 모든 게 다 괜찮단다. 점점 더 괜찮아질 거야.
오늘의 기도: 주님, 저를 미인으로 만드시는 김에 어깨가 불룩한 원피스도 주세요.
2009년 10월 29일 오후 3시 13분에 저장한 글입니다.
눈의 여왕에게.
슬픈 소식이야. 내 마음의 친구 다이아나가 애번리를 떠났데. 통장과 인감을 들고 사라졌다는데 이 예쁜 아가씨가 어딜 갔을까. 다이아나, 비록 우리가 뿔뿔이 흩어진다고 해도 난 언제나 내 마음의 벗에게 충실할 것을 해와 달에게 다시금 엄숙하게 맹세할게. 너 주려고 예쁜 편지지도 샀는데 주소를 몰라 겨울방학에 가져가려고 했는데 넌 어디로 갔니. 세상은 참으로 불공평하기도 하지. 이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날 꺼내줄 방도는 아무리 주님이라도 짚단 속의 바늘을 찾듯이 어려울 거야. 오늘은 아무 것도 먹지 않았어. 너라면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을 때 뭔가 먹을 수 있겠니?
오늘의 기도: 그런데 주님, 제 기도를 잊으신 건 아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