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로주, 제이미 벨로주

3분 소설

by 차우진

* 2009년, 카페 벨로주(지금은 공연장 벨로주)의 오픈에 맞춰 정용이 형에게 써준 이야기. "난 언제나 밥 딜런 or 탐 웨이츠 같은 싱어송라이터가 되길 꿈꿨어."라는 얘기에 영감을 받은 글. ㅋㅋ


* 사실 '프렌차이즈 카페 노블'은 기부와 창작을 엮은 프로젝트였다. 이걸 몇년 뒤 [빅이슈]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로 발전시켰지만 효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늘, 다시 해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함.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nar75/60055310795 여기서 확인. (물론 귀찮아서 누르진 않겠지만- ㅎㅎ)


DSC_4228.jpg 벨로주에 바침: 추억의 벨로주 시즌1...


갓 서른이 된 제이미 벨로주는 언제나 불만이 많았다. 무식하고 뚱뚱하고 게으른 주제에 직원들을 닦달하는 걸 취미로 삼은 공장장은 제이미를 부를 때마다 기타 치는 흉내를 냈다. 몇 개월 전 어디선가 카에타노 벨로주의 포스터를 봤을 것이다. 개자식. 제이미는 그때마다 생각했다. 개자식. 배가 불룩하게 나온 공장장을 노려보며 그렇게 생각하면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처음엔 경찰에 신고할까라는 생각도 해봤지만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손잡이나 벨, 경칩 같은 가구의 철제 부속품을 만드는 작은 공장은 그의 유일한 직장이자 이 동네의 유일한 직장이었기 때문이다. 컴퓨터가 노동자를 대신하는 21세기에도 이 작은 공장은 시대의 변화에 뒤쳐진 채 아직도 사람의 힘으로 거의 모든 공정을 해냈다. 제이미로서는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는 공립학교를 간신히 졸업했다. 이민 3세여서가 아니라 성적이 개판이라서였다. 다른 친구들이 대학에 가고 기술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준비를 하는 동안 제이미는 빈둥거리며 동네 양아치들과 어울렸다. 삼십 평생 그가 배운 기술이라면 마리화나를 반듯하게 마는 법과 몇 개의 기타 코드를 외운 것뿐이었다. 제이미는 그래도 자랑스러웠다. 그 동네에서 마리화나를 반듯하게 마는 인간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기타 치는 놈팽이들도 없었다. 그는 "My Way"와 "Tears In Heaven"을 악보 없이 연주할 수 있었다. "Stairway To Heaven"이 아니라 "Tears In Heaven" 말이다.


제이미 벨로주는 이민 3세대였다. 브라질 농장에서 일하던 그의 조부는 70년대 브라질에 경제 불황이 시작되자 별다른 고민 없이 영국으로 이민을 결정했다. 하고많은 유럽 국가들 중에 왜 하필 영국이었는지 그는 정말로 궁금했다. 제이미는 아마도 007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일 거라고 생각했다. 괴팍한 성격의 늙은이. 할아버지는 성격은 좋았지만 그건 언제나 술에 취했을 때뿐이었다. 술에 취하면 언제나 영국에는 제대로 된 노래가 없다는 푸념을 늘어놓으며 인터내셔널 가를 불렀다. 노조 근처에는 가보지도 않은 주제에. 제이미는 차라리 할아버지가 사회주의가 충만한 네덜란드 같은 곳으로 이민을 갔다면 자신은 더 행복했으리라 생각했다. 더 많은 마리화나를 피우고 더 많은 여자와 놀아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니까 제이미의 모든 불행은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심지어 성까지 벨로주라니. 하필이면 브라질의 늙다리 가수와 같은 집안일 게 뭐람. 축구는 좋았다. 미구엘 벨로주는 제이미도 좋아하는 선수였다. 어쨌든.

%EB%B2%A8%EB%A1%9C%EC%A3%BC.JPG 브라질의 늙다리 가수=까에따노 벨로주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미워했던 게 아니었다. 그때도 약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그랬다. 공장에서 일하던 그의 할아버지는 저녁에 퇴근하고 집으로 와서 맥주를 마시고 잠들었다가 영원히 깨어나지 않았다. 심장마비였다. 할머니는 아침에 할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하자마자 정신을 잃었지만 제이미는 밤새도록 술에 취하고 약에 취해 그 사실조차 몰랐다. 선생들부터 락커까지 모든 게 엉망진창인 공립학교에서 제이미는 주로 인도계 친구들과 어울렸다. 그들이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꽤 괜찮은 마리화나를 싸게 팔았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가 죽고 얼마 뒤, 제이미는 부모도 한꺼번에 잃었다. 그들은 제이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트럭에 치었다. 부모가 탄 왜건은 처참하게 구겨졌고 두 사람은 병원에서 나란히 숨을 거뒀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할머니는 정신을 잃었지만 제이미는 멀쩡했다. 그 순간 제이미는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제이미를 어른 비슷한 게 될 때까지 키운 건 할머니였다. 그녀는 그를 웬일인지 자꾸만 벨이라고 불렀다. 벨! 손을 먼저 씻어야지. 벨! 마리화나 피우는 잡놈들과 어울리지 말거라. 벨! 너도 사람 구실하게 될 날이 올 거다. 벨! 사랑한다. 제이미는 그 이름이 좋았다. 제이미 벨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제이미 벨'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제이미는 공장에서 차로 30분 정도 걸리는 공공 주택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스물여덟이 되던 해에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항상 할아버지 곁에 묻히겠다고 말했다. 브라질 얘기는 하지 않았다. 어떤 나쁜 기억처럼 그녀는 결코 떠나온 땅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 후로 아무도 제이미를 "벨!" 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건 좀 쓸쓸했다. 그래서 다시 마리화나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 옛날 그에게 마리화나를 헐값에 팔던 인도 놈들은 대부분 런던 같은 대도시로 떠났다. 그들이 성공한 건 결코 아니었다. 작은 경찰서에서 더 큰 경찰서로 옮겼기 때문이다. 제이미는 고향에 남았다. 대신 가끔 런던에 들리러 간다. 거기서 그는 마리화나를 산다. 며칠 전에는 바에서 우연히 아시아 여행자도 만났다. 키가 작고 얼굴이 하얀 동양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한국이란 나라에서 왔다고 소개했다. 한국? 도대체 어딘지 모르겠다는 표정의 제이미에게 그는 ‘싸커! 싸커! 월드컵!’이라고 말했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아 지성팍이란 놈이 거기 출신이던가. “너 이름이 뭐야?” 그렇게 묻길래 “제이미, 제이미 벨로주”라고 대답하자 그 동양인은 정말 기뻐하는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와우. 진짜 믿을 수가 없구나! 내가 진짜 좋아하는 이름이야!” 하지만 제이미는 그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곧바로 “너, 기타 칠 줄 알아?”라고 물었기 때문이었다. 이름과 성도 구별 못하는 원숭이 주제에 재수없는 공장장처럼 말하다니. fuck이나 먹어라.


그 한국인은 영국 여행을 마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면 카페를 오픈할 거라고 했다. 맥주와 커피를 파는 카페 말이다. 영어가 서툰 그가 자세히 설명하진 못했지만 대충 제이미는 그 동양인의 비전이 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음악을 하고 싶었는데 재능이 없어서 그만뒀어. 대신 카페를 운영하는 게 꿈이지.” 그 동양인이 횡설수설 떠드는 걸 시큰둥하게 듣던 제이미의 관심을 끈 건 그 다음 말이었다. “한국에선 그래도 카페가 잘 되거든. 벨로주라는 이름으로 카페를 열거야. 그런데 너 혹시 그거 있어? 그거?” 제이미는 비로소 그가 마음에 들었다. 두 사람은 바의 뒷골목에 주저앉아 사이좋게 마리화나를 피웠다. 그 동양인은 제이미의 마리화나를 한 대 빨면서 두 배의 가격을 냈다. 와, 동양인들은 진짜 괜찮은 놈들이구만!

86_shop1_962872.jpg 올리버 스톤은 이런 XX같은 영화도 찍었음...


집에 돌아와 잠들기 전 제이미는 공상에 빠졌다. 한국이란 말이지. 한국이란 단어는 무척 이국적으로 들렸다. 아시아 어디쯤에 있는 작은 나라. 왠지 벼가 자라는 넓은 논이 떠올랐다. BBC4 같은 채널에서 본 것 같은 풍경일 거다. 까맣고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더러운 논두렁에 발을 담그고 거닐고 있었다. 그런 곳에 작은 카페를 연다. 까만 머리의 아시아 여자애들이 깔깔거리고. 다 같이 볏짚 위에서 뒹굴고... 뒷뜰에선 마리화나를 키우고... 커피라면... 음. 이래뵈도 나는 브라질 출신이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벨로주, 제이미 벨로주.” 침대에 누운 그는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건 “본드, 제임스 본드.”라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근사하게 들렸다. 잠들기 직전 제이미는 자신의 이름을 딴 한적한 카페에 앉아 넓은 논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보며 작고 앙증맞은 까만 머리의 아시아 여자애들에 둘러싸인 채 "Tears In Heaven"을 연주하는 자신을 상상했다. 왠지 근사해보였다. 거기라면 에릭 클랩튼이나 탐 웨이츠나 밥 딜런 같은 뭐 그게 그거 같은 거물 행세를 해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았다. 먼 곳에서 할머니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벨! 너도 언젠간 사람구실 하게 될 날이 올 거다.” 깊고 아늑한 잠 속으로 빠져들며 제이미는 몽롱하게 중얼거렸다. 한국이라... 카페라.. 기타라... 벨로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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