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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사랑

3분 소설

by 차우진

말을 마친 뒤 남자는 빙긋, 웃는다. 계약서의 서명 같은 미소였다. 나는 좀 어이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상황에서 여유있게 미소나 짓는 인간을 거의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짐작이 아니라 경험에 의한 확신이다. 나는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흘깃 그런 사내의 표정을 본다. 그 남자는 자, 이제 다음 질문은? 이라는 표정으로 앉아 있다. ‘오케이, 이건 이렇게 하죠. 그 문제는 다음에 정리하고요. 아 언제 저녁식사 어떠세요?’ 라고 말한 뒤에 짓는 미소 같은 것. 역시. 나는 생각한다. 이것은 도전이다. 권위에 대항하려는 빳빳한 태도. 이를테면 이 남자는 자신이 경찰서의 취조실에 앉아 있는 정치범 같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는 결백하다 고로 나는 당당하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하지만 그건 일종의 역할 놀이 같은 거다. 과연 내가 이 남자의 역할놀이에 장단을 맞춰줄 필요가 있을까. 웃기는 소리. 나는 누군가를 위해 이용당하는 포악한 경찰관도 아닐뿐더러 이 남자는 정치범도 아니다. 무엇보다 결백하지 않다. 결백한 인간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이다. 인간의 치명적인 결함은 바로 거기에 있다. 결백함이란 추구되어야 할 것이지만 결코 성립될 수 없는 명제다.


이 사무실에는 이 남자와 같은 인간들이 우글거린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나처럼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한 자들이 묵묵히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이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앉아 있는 건 모두 그 지리멸렬한 역할놀이 덕분이다. 정치인, 군인, 사상범, 범죄인, 직장인, 학생 기타 등등의 역할에 빠져 정말 중요한 게 뭔지 모두들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런 데 끌려와 내 앞에 앉아 있는 거다.


게다가 나는 여기서 이 남자의 비위를 맞춰줄 여유도 없다. 갑자기 바뀐 담당 관할이 더 늘었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내 업무는 기록과 분류다. 마침 내 자리에는 서류도 잔뜩 쌓여있다. 한 사람 당 한 장의 서류다. 이 사람들을 다 만나야 한다. 그런데도 이 남자는 평온한 표정으로 여봐란 듯이 웃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지금까지 이런 종류의 인간들, 특히 남자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증명할 수도 없는 자존심을 붙들고 있다가 자멸하는 종들이지.


웃음이 나옵니까.


내가 묻자 남자는 뭐가 이상하냐는 듯이 대답한다.


당연하죠, 신혼인데요.


역시나 어이없는 인간. 모니터에는 지금까지 이 남자가 진술한 내용이 적혀있다. 서류에는 단 3줄로 요약되어 있는 이야기를 무려 한 시간 가까이 진술한 내용이다. 틀린 부분이 있는 것도 아니다. 너무 디테일해서 문제인 거다. 맹목적인 믿음. 확신.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믿음이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사실 은연중에 무시당하는 것 같긴 하지만 이게 우리 일이기 때문에 상관하지 않는다. 분노나 경쟁심은 우리 것이 아니다. 쉽게 흥분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런 종류의 다양한 상황에 대해 훈련받았고 필요에 따라 추가적인 능력을 개발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프로라는 얘기다. 남자가 아무리 여유만만하게 웃고 있어도 나는 그의 속마음이 엉망진창, 뒤죽박죽이라는 것을 안다. 경험에 의한 확신이다. 서류는 내가 가지고 있다. 권력은 내게 있다는 얘기다.


전부 다 하면 14년입니다. 고등학교 땐 교환일기를 썼죠. 지금 생각하면 좀 창피하지만 그땐 정말 열심히 썼습니다. 애인이라기보다는 그저 좋은 오빠동생이었죠. 그러다가 대학에 가고 스무 살이 되자 우리는 자연스럽게 연애를 했어요. 하지만 다들 그렇듯이. 뭐. 완전히 서툴러서 실수도 많이 하고 상처도 많이 줬죠. 뭘 어떻게 해야 할 진 몰랐지만 그저 같이 있는 게 너무 좋았는데... 아, 언젠가 한 번은...


맙소사. 나는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과정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존재하거든요. 이미 충분히 설명 드린 얘깁니다만, 어쨌든. 자 다음 얘기로 가죠. 담배는 피우십니까.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 과정이 어떤 결과를 야기할 것인지 짐작하고 있을까. 모르는 것 같다. 저 자리에 앉은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이 남자도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모른다. 그들은 모두 갑작스럽게 이 자리에 끌려온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먼저 여기에 온 이유에 대해서 충분히 납득할 만큼 친절한 설명을 해줬다. 그들은 우리가 제시하는 몇 가지 증거들을 확인하고 체념하고 피하지 못할 사실을 받아들일 때까지 잠시 시간을 가지게 된다. 그 다음에 차례를 기다려 여기, 이 자리다. 이 남자도 마찬가지다. 납득하고 체념한 뒤에 여기에 온 것이다. 운명적으로.


기록에 의하면 불륜을 저지른 적은 없군요. 친구의 애인을 탐한 적도 없고, 과한 욕심을 채우기 위해 누군가를 착취하지도 않았네요. 이 정도면 깨끗한 수준이군요. 정말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검토한 서류 중에서 가장 좋은 쪽에 속해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남자는 별로 기뻐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게 저랑 무슨 상관입니까. 남자가 물었다.


중요하죠. 아까 충분히 설명 드렸듯이 이 서류 검토 결과에 따라 선생님의 미래가 결정됩니다. 어느 쪽으로 가게 될 진 저희도 아직 모릅니다. 우린 그저 주어진 일에 충실할 뿐이니까요. 그래도 어쨌든 선생님은 아직까진 좋은 쪽이라는 겁니다.


상관없어요. 저는 그녀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어디에 있든 괜찮아요. 그리고 앞으로 영원히 함께 하리란 것도 확신합니다. 1년 밖에 사귀지 못한 채 헤어진 뒤 5년 동안 그녀만 생각하며 살았을 때도 그랬습니다. 아무리 괴로워도 괜찮았습니다.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믿었으니까요. 교환일기를 쓰던 고딩 시절부터 대학에 가서 처음으로 입을 맞추던 그 날, 헤어지던 날 밤에 텅 빈 골목에서 울다가 기절한 순간도 괜찮았습니다. 결혼식을 올리던 날에 제가 약속했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헤어지지 않겠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겠다고. 유치하게 들리겠지만 상관없습니다. 이게 제 운명이니까요.


그는 정말로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이런 사람에게 아무리 해피엔딩이라는 건 판타지라고 말해봐야 소용없다. 사랑이라는 환상에 대한 맹목적인 확신도 이 정도면 그게 진실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게 된다. 물론 내 입장에서 그건 단지 하찮은 인간들이 지리멸렬한 삶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낸 환상이다. 사랑이라니. 맙소사.


나는 모니터와 서류를 번갈아본다. 결과 란에 뭐라고 쓸 것인가. 사실 수억 명의 인간들을 검사하며 이렇게 고민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최근에 부서 간 통폐합이 있었다. 나는 갑자기 아시아 총괄팀으로 소속이 바뀌었고 팀원은 3배로 늘었다. 그래도 인력이 모자란다. 모두 바뀐 업무에 적응하기도 전에 업무가 하달되었다. 내가 맡은 인구만 해도 수 억 명으로 늘었다.


아시아 중에서도 한국과 북한, 일본과 중국 남부 지역을 총괄하는 게 내 업무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고위 국가 공무원이나 경제계의 인사들이었다. 나와 비슷했지만 나와 완전히 달랐다. 그들은 대부분 거짓말쟁이거나 전쟁광이거나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들이었다. 천황이나 대통령이나, 국무총리나 수상이나 국회의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재벌들과 기업가들 거의 모두는 자기들이 얼마나 믿음이 깊고 견고하며 인민과 국민과 황민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해 왔는지 떠벌리는 게 전부였다. 그들은 내가 당연히 승인이라고 쓴 도장을 서류에 찍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다. 모두들 승인불가, 나쁜 쪽이었다. 그게 운명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내 모습을 보고 지레 겁을 먹기도 했다. 대체로 기독교인들의 눈에 나는 검푸른 피부에 머리에는 뾰족한 뿔이 나고 어깨에는 날카롭고 작은 날개가 돋아 있는 모습이었다. 그것만 보고도 인간들은 내 앞에서 새파랗게 질리거나 성호를 그었다. 하지만 우리도 성호는 긋는다(나는 긋지 않는다. 유일신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정작 그건 우리의 본 모습이 아니다. 그들의 신앙에 따라, 혹은 자라온 문화적 환경에 따라 내 머리에 뿔이 나 있을 수도 있고, 외눈박이 거인으로 보일 수도 있고, 검은 갓을 쓴 창백한 얼굴일 수도 있다. 눈이 여러 개이거나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낼 수도 있다. 뭐 그렇다는 얘기다. 인간들은 나의 진짜 모습을 결코 보지 못한다. 사실 내게 중요한 건 외모가 아니라 처리해야할 업무다. 나, 아니 '우리'의 임무는 기록과 분류다.


이 우주에 오직 좋은 쪽과 나쁜 존재한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둘 중 한 편에 설 수밖에 없다. 그게 자기 역할이고 자기 역할에 충실한 것이야말로 이 우주와 삶의 조건이다. 그리고 그건 늘 바뀌기 마련이지만... 우리는 하필이면 처음부터 나쁜 쪽의 일을 맡게 되었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나도 좋은 쪽으로 갔다면 저들 눈에 보이는 것과는 좀 다른 모습으로 보였을지 모르겠다. 금발에 흰 옷을 입고 나팔을 부는 것 같은 뭐 그런. 어쨌든 그건 좋은 쪽 친구들 얘기다. 가끔, 그러니까 100년 정도에 한 두번 그들을 만난다. 좋은 쪽이나 나쁜 쪽이나 일이 고되고 힘든 건 마찬가지다. 우리는 우리를 괴롭히는 인간들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저 존재는 정말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우주의 골칫거리들이다. 조물주도 어찌하지 못하니, 늘어나는 업무는 오로지 우리 몫이다. 아무튼, 덕분에, 그래서, 정말 운 좋게 저들은 이제 곧 이 우주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마침내, 영원히, 다행스럽게도.


남자는 정말로 평온해보였다. 정말로 자신이 세계가 끝장나더라도 영원히 그의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세계의 종말을 위한 순간이었다. 우리는 종말 이후에 수 십 억년 동안 지구를 어질러놓은 인간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하고 분류하고 있다. 곧 심판의 날이 올 것이다. 신앙을 가지고 있든 아니든 믿음과 상관없이 그의 지나온 삶이 그의 운명을 결정하는 순간이 마침내 도래했다는 얘기다. 그건 우주의 법칙이었고 우리는 그 법칙을 유지하고 집행하는 공무 수행원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지난 삶에 대해 한 번도 의심하지 않으십니까. 남자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야말로 제 삶의 전부입니다. 그걸 의심한 적은 없어요. 말씀하신대로 우리는 모두 여기서 끝나겠지만 저는 어쨌든 삶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거 같아요. 유치하지만 그 교환일기를 쓰던 시절의 제가 그랬죠. 사랑이야말로 삶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 아닐까요. 아내도 저와 마찬가지일 겁니다.


나는 잠깐 고민한 뒤에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이제훈: 승인불가. 종말 이후 남자는 사랑하는 아내 현주와 함께 끝없는 우주를 영원히 떠돌게 되리라. 사실 인간들 중에 승인 도장을 받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애초부터 그런 계획이었다. 말했듯이 우리가 있는 곳은 나쁜 쪽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게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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