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우진 Aug 07. 2017

이 동네를 사랑한다

[문화+서울] | 2014.07

서울문화재단에서 발행하는 [문화+서울] 2014년 7월호에 쓴 글. 동네에 대한 에세이를 써달라고 해서 '연남동'에 대해 썼다. 힙스터든 향수든 아무튼, 이걸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다. 그저 나는 이 동네를 사랑하기로 한다. 그건 소비한다는 것과는 다른 뜻이라 믿는다.  

홍대 앞에 처음 간 건 대학교 2학년, 1995년 가을이었다. 그때 나는 집은 인천이었지만 학교가 있는 안산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좋아하던(요즘 말로 ‘썸 타던’) 여학생과 신촌으로 데이트를 하러 가던 길에 지하철에서 잘못 내려버렸다. 그때 홍대 앞은 한산했다. 전철역 앞은 공사가 한창이었다. 풍경이 좋지 않았다. 낭패다, 라고 생각하며 낯선 거리를 헤맸다. 그 여학생은 어땠는지 모르겠다. 우리의 데이트는 그날이 끝이었다.


홍대 앞에 다시 간 건 군대에 다녀온 다음이다. 1999년 겨울부터 2000년 여름까지 홍대 앞을 자주 오갔다. 그땐 혼자였다. 작은 갤러리들, 에스프레소를 파는 카페들과 음반 가게들을 구경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 즈음부터 홍대 앞을 자주 오갔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과 공사로 복잡했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이 ‘지루하지 않음’이 홍대 앞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2004년 즈음부터는 아예 홍대 앞에 원룸을 구해 살기도 했다. 단골 술집이 생겼고 자주 들리는 구멍가게나 식당 주인과 얼굴을 익히게 되었다. ‘우리 동네’라는 생각을 그 즈음부터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홍대 앞에 프렌차이즈 카페와 호프집과 DVD 룸이 들어섰다. 그러는 사이 나는 그 동네에서 연애도 하고 실연도 하고 회사도 다니고 실직자도 되었다. 아는 친구가 전 재산을 털어 카페를 열기도 했다. 나의 삼십대는 그렇게 지나갔다.

그림 조성헌. 대구에서 태어나서 양화를 전공했다.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천마의 꿈-화랑영웅기피랑전(3D애니메이션)' 콘셉트 디자인을 했으며, 현재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 중.


보통 ‘홍대 앞’이라 부르는 공간은 서교동 일대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는 홍익대학교 정문 인근과 ‘피카소 거리’를 일컫는데 불과했지만, 90년대 중반과 2000년 이후부터는 꾸준히 그 의미가 확장되며 현재는 서교동 일대를 포함해 상수동, 합정동, 동교동, 연남동으로까지 넓히고 있다. 서울에서 이처럼 문화적 공간으로 자리 잡은 곳은 대학로나 가로수길, 인사동 정도인데 이들은 모두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의미가 와해되고 가치는 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홍대 앞은 지난 20여 년간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왜 그럴까?


일단 이곳은 다른 곳보다 지리적으로 넓고 평평하다. 홍익대학교를 기준으로 동쪽으로 공항철도역이 위치한 동교동 로터리, 서쪽으로 지하철 2/6호선 환승역과 주상복합 건물인 메세나 폴리스가 있는 합정역까지, 그리고 북쪽으로는 내부순환도로가 자리한 연남동, 남쪽으로는 강변북로가 놓인 상수역까지 ‘홍대 앞’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너른 공간에 공간이 구획되는 시설물이나 교차로가 없다는 점을 중요하게 지적하고 싶다. 


다른 지역에 비해 홍대 앞은 ‘덩치’가 크고, 이 덩치의 맷집으로부터 문화적 공간의 상업화에 지속적으로 맞서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젠트리피케이션’이란 맥락에서 홍대 앞은 여전히 침투와 저항이 반복적으로 이뤄지는 곳이라고 보는데, 이 운동성이야말로 마포구 서교동의 너른 면적과 홍대 앞의 지리적 위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이곳은 애초에 문화적으로 특화된 공간이기도 했다. 1961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이, 1972년 산업미술대학원이 설립되는 동안 서교동은 전형적인 주거지역이었지만, 이후 1980년대까지 미술학원, 공방, 갤러리 등이 밀집한 문화적 특성을 띄게 되었다. 1984년 지하철 2호선이 개통하며 홍대입구역과 대학 정문을 잇는 서교로 일대에 상업지구가 형성되었고 이후 와우산길을 중심으로 형성된 미술학원 거리는 ‘피카소거리(홍대 정문-극동방송국-주차장거리)’로 일컬어지며 대학가 상업지구의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이런 맥락에서 홍대 앞은 90년대 중반 인디 음악을 중심으로 하는 청년 하위문화의 진원지가 될 수 있었다. 특히 2013년 기준으로 서울시 집계를 참고하면 서교동과 상수동 지역의 유통, 숙박, 요식업체 수는 2007년 2088개에서 2013년 4578개 업체로 크게 늘었고, 지하철 2호선 유동인구는 하루 평균 9만7728명으로 전년에 비해 9.5%나 늘었다. 이것은 강북의 기존 상권인 명동역(5만7811명)과 종로3가역(5만5304명)보다 훨씬 많은 수치다. 다시 말해 2014년 현재 홍대 앞은 음악적 공간 외에 카페, 여가, 관광 지역으로서의 가치가 교차하는 곳으로 그 의미가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요즘엔 연남동에 자주 간다. 지인의 카페가 쉬는 날에 사무실처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연남동 경성고등학교 근처에 있는 곳이다. 테이블은 3개 정도. 주로 테이크아웃으로 커피와 와플을 파는 집인데, 저렴하게 사용료를 내고 한 달에 8일을 쓰기로 했다. 거기에서 사람들도 만나고 일도 한다. 어림잡아 열 명도 못 들어가는 작은 공간이지만 여기서 사람들과 뭔가 재미난 걸 해볼 수 있을 거란 생각도 든다. 당장은 내가 운영하고 있는 [weiv]란 음악웹진에서 모인 친구들과 자주 만나는 곳으로 활용하고 있다. 하루 종일 이 카페에 앉아 있다 보면, 그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풍경의 어떤 순간이 오래 전 홍대 앞을 닮았다는 생각도 든다. 옛날 빌라와 구멍가게와 작은 카페와 별 것 아닌 옷가게, 마사지 가게, 한의원이 나란히 서 있는 이질감. 보기에 따라 촌스러울 수도, 재미있을 수도 있는 풍경. 그래서 이 동네가 오래도록 이런 모습이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 한편으론 조만간 이곳도 복잡해지겠다는 예감도 든다. 


솔직히 뭐가 옳은지는 모르겠다. 특히 그 동네에 사는 것도 아니면서 뭔가를 함부로 말할 수는 없다. 애정 표현이 때로는 이기적일 수도 있다. 다만 나는 이곳을 사랑하기로 한다. 그건 소비한다는 것과 다른 뜻이라고 믿는다. 어떻게 하는 게 옳은 일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나는 다시 ‘사랑’에 대해 생각하기로 한다. 연남동, 홍대, 어쩌면 내가 보내고 있는 삶의 한 때를. | 문화+서울. 2014.07.


매거진의 이전글 여긴 오직 나만을 위한 공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