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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jin Park Apr 18. 2019

4월, 삶의 태도와 죽음에 대한 감각 사이에서

윤리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될 때 <타인의 고통>

(거의) 모든 이야기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주인공의 머리에 바위를 떨어뜨리거나 건물을 폭파하는 것처럼 죽음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 이야기에도 죽음이 깔려 있습니다. 누군가 죽은 할아버지의 말을 기억하거나 동네 사람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하다못해 배경에 있는 TV에서 흘러나오는 사건사고 뉴스에라도 죽음을 도사리고 있습니다.(의심이 간다면 좋아하는 영화나 소설을 떠올려 보세요.)


굳이 죽음을 내세우지 않는 이야기에서조차 굳이 죽음을 찾아내려는 관점이 이상해보일지 모르겠지만, 저는 ‘죽음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그 이야기의 본질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이야기에는 죽음의 반대편에서 삶을 연결하거나, 위로하거나, 두려움을 잊거나, 잘 남기려는 기능이 있기 때문입니다.(<아라비안 나이트>의 세헤라자데를 예로 들어볼까요)


그러니까 타인의 삶에 대한 어떤 사람의 태도는 죽음에 대한-특히 전쟁이든, 혐오 범죄든, 독재 정권 하에서의 탄압이든 사람과 문명이 초래한 사회적 사건에 의한- 감각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참하구나, 안타깝구나, 슬프구나, 라는 1차적 감각 이후에 “그런데 저 죽음의 정체는 무엇인가”라는 생각으로 그 사람을 이끌어 가는 어떤 감각이 있는가, 라는 점이 중요합니다.(그것을 어쩌면 ‘윤리’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지금 여기의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너무 많은 죽음의 이미지에 노출되어 있기에, 오히려 죽음에 대한 감각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죽음은 온갖 매체에서 자극적인 소재로 다루어져 온지 오래입니다. 그것은 심지어 단순히 흥분의 도구로 쓰이기도 하며, 우리의 감각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도록 무력하게 옭아매는 절대적 이미지로 전시되기도 합니다.


전쟁에 대한 사진을 어떻게 볼 것인가, 라는 주제로 쓰인 수전 손택의 고전적 비평서 <타인의 고통>은 이런 문제를 생각해보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 책은 다양한 시각 테크놀로지의 개발과 함께, 이들 테크놀로지로 만들어진 “신경을 거슬리고, 소란을 불러 일으키며,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이미지가 ‘전쟁’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만들어내고 있는지를 분석했습니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이들 이미지의 섬뜩함이 사람들을 “구경꾼이나 겁쟁이”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경거리로 전시되고, 어떤 관객이 그것을 어떻게 보든, 결코 멈출 수 없는 ‘현실’이라는 함의로 통용되고는 합니다. 그런 이미지들에서 죽음은 연이은 흥분 상태를 부추기는 것 이외에 어떤 일도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가끔 어떤 참혹한 사건에 대한 이미지들을 보고, ‘슬퍼요’를 누르고, 공유하는 것만으로 어떤 의무를 다 했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그것은 저자의 관점에서는 죄의식을 달래는 개인의 의례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타인과 공유하는 이 세상에서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나가는 것”을 넘어서려면, 이들 이미지의 감흥에 둘러싸여 있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저자의 메시지에 죽비로 맞는 듯 정신이 번쩍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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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가 보기에 이 사진들을 보고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거나, 몸서리치지 않는다거나, 이런 참사나 대량 학살을 가져온 전쟁을 없애려 애쓰지 않는 것이야말로 도덕적 괴물의 반응이다. 그래서 그녀는 말한다. 우리는 괴물이 아니라, 교육받은 계급의 일원이라고. 우리가 겪은 실패는 상상력의 실패, 공감의 실패라고. 우리는 이런 현실을 마음 깊숙이 담아두는 데 실패해 왔다고.(25)


오늘날에는 전투가 한창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곳에서도 사진을 찍을 수 있으며, 군대가 촬영을 허가하는 한 민간인 희생자, 화약에 그을린 채 지칠 대로 지쳐 나자빠진 군인들의 모습도 가까이에서 사진에 담을 수 있다. 스페인 내전(1936~39)은 현대적인 의미에서 사람들이 지켜본(‘보도된’) 최초의 전쟁이었다. 교전이 벌어지고 있는 전선, 폭격을 받고 있는 마을에서 일군의 전문 사진작가들이 찍은 사진들은 스페인이나 해외의 각종 신문과 잡지에 곧장 실리곤 했다. 텔레비전 카메라가 매일같이 보여준 최초의 전쟁, 즉 미국이 개시한 베트남 전쟁 당시에는 머나먼 곳을 상세히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장치들을 통해서 죽음과 파괴의 모습이 가정의 코앞에까지 찾아들어 왔다. 그때 이래로, 발생할 때마다 곧바로 필름에 담겨지게 된 각종 전투와 대량 학살은 정기적으로 끊임없이 흘러 들어올 뿐 아니라, 가정에서 작은 화면으로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곳곳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극적인 사건들에 노출된 시청자들이 어떤 분쟁을 중요하다고 의식하도록 만들려면, 이제는 그 분쟁을 다룬 단편적인 필름들을 일상적으로 확산시키고 또 확산시켜야 될 지경에 이르렀다. 오늘날,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런 이미지들이 가져다 주는 충격을 통해서 전쟁을 이해한다.

어떤 것은 (다른 먼 곳에 떨어진 채, 그 어떤 것을 ‘뉴스’라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사진을 통해서 현실이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직접 겪고 있는 재앙이 그 재앙을 담은 표상만큼이나 불가사의하게 느껴질 때도 간혹 있을 것이다. 2001년 9월11일 세계 무역센터가 공격당했을 때 그 건물에서 간신히 피해 나왔던 사람들이나 근처에서 그 장면을 그대로 봤던 사람들은 처음 그 공습을 설명하면서 “믿을 수 없다”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영화 같다”라고 말했다.(막대한 예산이 투입되어 할리우드 재앙 영화가 만들어진 지 40여 년이 지난 오늘날, 결국 어떤 재앙에서 살아남은 생존자가 자신이 짧은 시간 동안 겪었던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재앙을 “마치 꿈처럼 느껴져요”라는 말 대신에 “마치 영화처럼 느껴져요”라는 말로 표현하는 상황이 닥쳤다).(42~43)


모든 기억은 개인적이며 재현될 수도 없다. 기억이란 것은 그 기억이 갖고 있는 개개의 사람이 죽으면 함께 죽는다. 우리가 집단적 기억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기하기가 아니라 일종의 약정이다. 즉, 우리는 사진을 통해서 이것은 중요한 일이며 이것이야말로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알려주는 이야기이다, 라고 우리의 정신 속에 꼭꼭 챙겨두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뭔가를 구체화할 수 있는 이미지, 즉 중요하기 그지없는 공통 관념을 담고 있으며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예측 가능하도록 움직이게 하는 재현적 이미지의 저장소를 만들어 둔다. 곧장 포스터로 만들 수 있는 사진들, 가령 원자폭탄 실험 뒤에 생긴 버섯구름, 워싱턴 D.C.의 링컨 기념관에서 연설하고 있는 마틴 루터 킹 2세, 달에 착륙한 우주 비행사 등의 사진들은 중요한 사건들의 핵심을 전달해주는 시각적 등가물이다. 이런 사진들은 중요한 역사적 순간들을 기념 우표들보다 훨씬 더 흥미롭게 상기시켜 준다. 실제로 위에서 언급한 순간들, (원자폭탄 사진을 빼고는) 일종의 개선식 같은 이 순간들은 기념 우표에 담겼다. 나치의 강제수용소 사진이 실린 전지 우표가 나오지 않는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다.(131)


어떤 곳을 지옥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사람들을 그 지옥에서 어떻게 빼내올 수 있는지, 그 지옥의 불길을 어떻게 사그라지게 만들 수 있는지까지 대답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타인과 공유하는 이 세상에서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나가는 것도 아직까지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일인 듯하다. 이 세상에 온갖 악행이 존재하고 있다는 데 매번 놀라는 사람, 인간이 얼마나 섬뜩한 방식으로 타인에게 잔인한 해코지를 손수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를 볼 때마다 끊임없이 환멸을 느끼는 사람은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물이다.

나이가 얼마나 됐든지 간에, 무릇 사람이라면 이럴 정도로 무지할 뿐만 아니라 세상만사를 망각할 만큼 순수하고 천박해질 수 있을 권리가 전혀 없다. 

오늘날에는 이렇듯 도덕적으로 모자란 상태에 남아 있기가 훨씬 더 어렵게 만드는 이미지들이 엄청나게 쌓여 있다. 잔혹하기 그지없는 이미지들이 늘 우리를 따라붙는 것이다. 제 아무리 이름뿐인 것일지라도, 그리고 자신이 가리키는 현실을 모두 에워싸는 것이 가능하지 않더라도, 이런 이미지들은 여전히 치명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 이미지들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짓이 바로 이런 일들이야, 기꺼이 이런 일을 저지르지, 그것도 자기를 정당화하며 열광적으로 말이야, 잊지 말라고.

(중략) 따라서 화해한다는 것은 잊는다는 것이다. 즉, 화해하려면 기억이 불완전하고 한정되어 있어야만 한다.(167~168)


*이 매거진에서 소개하는 책은 서울 은평구 대조동에 위치한 동네 카페 '다-용도실'@da_yongdosil 내 공유 서가 '멈포드의 서재'@mumford_salon 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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