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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jin Park Apr 21. 2019

4월, 떠밀리고 배반당했으나 끝끝내 남은 사람들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우고 싶을 때 <그의 슬픔과 기쁨>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을 믿는 사람,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물론 사람이란 때때로 일관성을 잃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 사람을 믿거나 믿지 않는 척 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끝끝내 사람을 믿어보려고 애쓰는 쪽과 애당초 사람은 이해관계에 의해 행동한다고 전제해버리는 쪽이 있습니다. 이 사회 자체가 오랫동안 사람의 이기적 동기를 양분 삼아 ‘발전’해 왔기 때문에 사람을 덥석덥석 믿다가는 손해 보는 일이 비일비재하지만 그래도, 상처 받을지언정, 사람에게는 누구나 양심과 이타심이 있을 거라고 끈질기게 기대해온 사람들이 없었다면 ‘윤리’란 단어는 아마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나는 어떤 쪽일지, 우리는 평소에는 잘 알지 못합니다. 10년 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도 그랬습니다. 무자비한 정리해고가 없었다면, 그들도 그런 곤란하고 처절한 질문 같은 것은 마주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일은 번개처럼 닥쳐왔고, 한 공장 옆 라인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한 순간 ‘죽은 자’와 ‘산 자’로 나뉘었습니다. ‘죽은 자’는 저항했지만, 그 중에서도 포기하거나 돌아선 사람이 나왔습니다. ‘산 자’ 중에는 자발적으로 ‘죽은 자’ 편에 선 사람도 있었고, ‘죽은 자’를 한 번 더 죽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선택을 할 때 자신에게 수십 번, 수백 번 되묻지 않은 사람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도 확신하지 못했고, 모두가 어쩔 수 없었다면서 어디론가 스스로를 떠밀어 가야했던 지옥 같은 시간이었겠지요. 

해고 노동자들의 싸움이 5년째 이어지던 2014년, 정혜윤 작가는 그들의 목소리를 낱낱이 들어 이 책을 썼습니다. 아니, 썼다기보다 옮겼습니다. 실제로 그들의 말의 분량이 작가의 ‘주석’보다 훨씬 많은데, 그건 작가가 그들을 굳게 믿었고, 또 독자에게도 그 믿음을 전하고 싶어 애쓴 흔적처럼 느껴집니다. 아마도 그 믿음에 힘입어 처음부터 ‘그런’ 사람들은 아니었던 그 사람들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동안의 시간 속에서 자신에게 묻고 또 묻고, 찢기고 배반당하였으나 끝끝내 남은 것들을 꺼내어 놓습니다. 


스스로 “나약하다”고 평가하던 정비사 이현준씨는 말합니다. “장비가 많지 않고 차량은 너무 무거우니까 혼자 하기가 힘들어요. 옆에 있는 동료에게 꼭 도움을 청하게 되어 있어요. 그때는 주로 정우 형이 옆에 있었는데 ”형님, 이것 좀 내려 주쇼“ 하면 정우형이 ”알았어, 인마“ 하면서 내려주죠.” 그가 공장에서 일하면서 배운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어깨 너머에 누군가 있다’,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리려면 누군가 도와야 한다’는 것. 저는 이 이야기를 읽고 울었고, 읽을 때마다 슬픔인지 희망인지, 안쓰러움인지 부끄러움인지 모를 감정들이 뒤엉켜 웁니다. 그리고 그 미련한 ‘배움’의 편에 남은 마음을 걸어보고 싶었습니다. 할 수 있는 한, 주변에 이 책이라도 한 번 더 권하면서, 거리를 점거하고 굴뚝에 오르도록 떠밀린 사람들에 대해 함부로 하는 말들을 경계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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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긴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해 여름, 여러 가지 이유로 나는 궁지에 몰려 있었다. 나 외에 다른 인간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었다. 인간의 일을 영원의 관점에서 생각하기는 더욱더 어려웠었다. 하루 이틀, 아니 단 몇 시간이라도 마음의 안정을 주는 것이라면 뭐든지 받아들일 수 있을 지경이었다. 인간의 기본적인 행동의 동기를 희망과 공포라고 한다면, 그해 여름 나는 공포 쪽에서 행동의 동기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나에게 특별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인간 행동의 두 동기인 희망과 공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으르렁대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들 속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그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나는 책임감, 죄책감, 모욕감, 동지애, 우정, 존경, 용기, 믿음, 불안, 체면, 염치, 슬픔과 기쁨, 글고 무엇보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슬픔이 기쁨으로 바뀔 수 있을지, 공포가 희망으로 바뀔 수 있을지 여러모로 애매모호했다. 미래가 불안할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 이야기가 단순하기를 바란다. 확실성 속에 있거나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해 여름 내가 만난 사람들은 삶의 불확실성 앞에 거의 벌거벗은 채로 서있게 되었다. 그리고 긴 이야기들을 갖게 되었다. 그 시작은 이렇다.(8~9)


정비사는 ‘손끝이 눈’이라는 말이 있어요. 손끝이 굉장히 발달해요. 부품 가짓수도 많고 고장 원인도 많은데 손 끝에 조여지는 감각으로 조립해요. 그리고 청각도 발달해요. 귀로 듣고 손으로 느끼고. 정비하면서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어요. 예전에는 장비가 많지 않고 차량은 너무 무거우니까 혼자 하기가 힘들어요. 옆에 있는 동료에게 꼭 도움을 청하게 되어 있어요. 그때는 주로 정우 형이 옆에 있었는데, “형님, 이것 좀 내려 주쇼.”하면, 정우 형이 “알았어, 인마.” 하면서 내려 주죠. 정비는 절대 혼자 못 해요. 굉장한 협업입니다. 게다가 아무리 A급 정비사라고 해도 신중해야 합니다. 고장의 원인은 너무나 많아요. 엔진에 대해 잘 알아도 반드시 또 모르는 것이 나타납니다. 그러다 보니 애매모호한 것은 늘 옆 사람 의견을 구하게 되어 있어요. 저는 그렇게 일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정비 일은 의사 같아요. 자동차도 사람 몸처럼 다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까딱 잘못하면 큰일입니다. 저희는 무쏘나 렉스턴만 고친 게 아니라 대형차도 같이 했어요. 오일·부동액 뒤집어쓰는 것은 다반사고, 얼굴은 시커메지고, 작업복도 금세 지저분해지고. 그래도 내가 고친 차에 시동 걸어 봤을 때 소리가 듣기 좋으면 나도 모르게 씽긋 웃게 되죠. 가슴에서 뭐가 쓱 올라옵니다. 그때 희열을 느껴요. 가슴이 벅차죠.(32~33)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살면서 배신하지 않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매일매일 어떤 타협인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일매일 타협하면서 사는 우리는 어떤 선택이 배신인지 아닌지, 어떤 선택을 배신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기가 결코 쉽지 않다. 

이현준은 자신이 나약하다는 말을 곧잘 하곤 했다. 그는 협심증을 앓았다. 그는 “정신력이 약해서 협심증을 앓나 보다.” 하고 말했다. 그는 마치 정신이 가슴에 있는 것처럼 심장 부위를 쓸어 보았다. 그는 자신이 나약한 인간인 것을 알기 때문에 나약해지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되자 그는 정비 과정에서 배운 대로 했다. 

‘돌아보면 어깨 너머에 누군가 있다.’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리려면 누군가 도와야 한다.’(35~36)


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알려고 안달을 할까? 자신을 안다는 것, 이것은 우리 자신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 아마도 우리가 비난받을 때, 오해받을 때, 외롭게 궁지에 몰려 있을 때, 그리고 버텨야 할 때, 그것도 확신 없이 버텨야 할 때 도움이 될 것이다.(127)


*이 매거진에서 소개하는 책은 서울 은평구 대조동에 위치한 동네 카페 '다-용도실'@da_yongdosil 내 공유 서가 '멈포드의 서재'@mumford_salon 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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