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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jin Park Apr 24. 2019

4월, 깨진 곳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이야기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우고 싶을 때 <언더그라운드>

“월요일. 활짝 갠 초봄의 아침. 여느 때와 조금도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딱히 다른 날과 구분할 필요도 없는 당신의 인생 속 하루에 지나지 않았다.” 그랬던 그날이 지옥으로 변한 것은 지하철에 탄 다섯 명의 남자가 우산 끝으로 정체불명의 비닐봉지를 터뜨리면서였습니다. 1995년 3월20일은 일본을 충격에 빠뜨린 ‘옴진리교 테러 사건’이 벌어진 날입니다. 


그로부터 9개월 후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사건의 피해자가 잡지에 투고한 글을 읽다가, 머리를 무언가로 얻어맞은 듯, 생각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사건에 대해선 그동안, 옴진리교라는 집단의 극단적인 강령과 교주의 해괴한 언행으로 전부 설명할 수 있다는 듯 보도되었으나 사실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과 남겨진 사람들 한 명 한 명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자각으로 작가는 피해자들을 찾아 나섭니다. 

“언뜻 보기에도 ‘이 사람은 힘들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 적이 없었지만 직관적으로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사람은 그냥 이대로 죽을 것이라고. 그렇지만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작가가 만난 한 역무원의 말 중 마지막 문장, “그렇지만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에서 돌부리에 걸린 듯, 마음이 주저앉습니다. 언론이 ‘상처 받은 시민들’이라는 무성의한 겉옷을 둘러버렸고, 사회도 더 이상 알려고 들지 않았던 그날 그 자리의 무수한 사람들은 그렇게 각자의 의지와 책임감, 두려움과 사랑을 지닌 고유한 존재들이라는 것, 그것이 출발점입니다. 


그런 일을 겪었다는 것은, 한순간 겪어 넘겼다는 뜻이 아니라 평생 겪어내야 할 삶의 균열을 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그 균열의 크기나 깊이도 알지 못한 채, 시기마다 다른 모습으로 터져 나오는 충격을 외롭게 견뎌야 하는 운명이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이 문장이 과장처럼 느껴진다면 그날 이후 식물인간이 되었다가 감각과 언어를 거의 잃고 침상에 누워있게 된 아사코 시즈코씨의 이야기를 읽어보세요. 그녀의 오빠는 사건 전날 밤 가족이 둘러앉아 “이런 것이 행복이지”라고 말했던 기억을 들려줍니다. 언젠가 회복될 동생을 위해 매일매일 일기를 쓰고 있다고도요. 작가는 아사코씨에게 손을 잡아달라고 청합니다. 자신의 손을 꼭 쥔 그녀의 손가락 속에서, 그 힘 속에서 “뭔가가 밖으로 나오고 싶어한다”는 것을 느끼며 작가는 말을 잃습니다.  


우리는 각자 고유한 존재인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결코, 대신할 수 없을 겁니다. 진정한 작가의 궁극적인 일이란 어쩌면 제 말로 다른 사람의 삶의 균열을 기우고 메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들어야 할 사람들 곁에서 그들이 어떻게든 자신의 이야기를 밀고 나갈 수 있도록 귀 기울여주는 것, 기다려주는 것이 아닐까, 라고 이 책을 읽으며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그 균열 속에서 때때로 처참함을 뚫고 놀라운 것이 솟아오르고, 그것이 당신과 나의 마음을 움직여 우리는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어갈 수도 있을 거라고요. 


이 페이지, 읽어보세요!


그러나 그후 어떤 계기로 그 편지를 떠올리게 되었다. ‘왜?’라는 의문이 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거대한 의문부호였다.

불행히도 사린 사건의 순수한 ‘피해자’가 사건 그 자체에 의한 피해에 그치지 않고 왜 그렇게도 가혹한 ‘2차 피해’(다시 말해 우리 주위의 어디에도 있을 수 있는 일상사회가 생산하는 폭력)까지 받아야 하는가? 과연 주변 사람들은 그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중략)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가련한 젊은 샐러리맨이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했던 이중의 심각한 폭력에 대해,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 ‘이건 이상한 세계에서 온 것’, ‘저건 정상적인 세계에서 온 것’이라고 이론적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들 당사자에게 그것이 무슨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하고. 그들에게는 그 두 종류의 폭력을 여기와 저기로 구별하여 생각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보이는 겉모습이야 다를지언정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둘은 같은 지하의 뿌리에서 뻗어나온 동질적인 것 같아 보인다

나는 그 편지를 쓴 여성(들)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또한 그 남편(들)의 사정을 알고 싶어졌다. 개인적으로, 그리고 이렇게 가혹한 이중의 상처를 생산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에 대해서도 좀더 깊이 알고 싶어졌다.(12~13)


표현만은 무척 간단하더군요. “이제는 다른 사람과, 예를 들면 가족들과 한자리에 앉아 식사를 즐길 수 있는 기회를 갖기가 힘들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말이죠. 요컨대 이런 말이었습니다. 일어날 수 없다, 말도 할 수 없다, 의식도 거의 없다. 그 말은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차라리 시즈코는 그 자리에서 죽는 게 나았어! 저 애는 그렇다 치고 너희들 고생이 말이 아니야.”

그 말을 들으니 정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을 너무 잘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그때 신이 시즈코를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면 벌써 숨을 거두었을 거예요. 시즈코는 아직 살아있잖아요. 앞으로 좋아질 가능성도 있고. 그런 가능성까지 버린다면 시즈코가 너무 불쌍해요. 어머니, 그런 믿음을 갖고 참고 기다려요.” 그랬더니 어머니도 많이 우셨습니다.(197)


나는 그녀의 작은 손바닥-마치 어린아이의 손처럼 작다-에 나의 오른쪽 손가락 네 개를 올려놓았다. 그녀의 손가락은 마치 잠들려는 꽃잎처럼 조용히 오므라들었다. 따스하고 포근한 젊은 여성의 손가락이다. 손가락의 힘은 예상보다 훨씬 강했다. 그녀는 잠시 내 손가락을 힘껏 감싸고 있었다. 심부름을 가는 어린아이가 ‘중요한 물건’을 꼭 쥐듯이. 거기에서 또렷한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명백히 무엇인가를 갈구하고 있다. 물론 나를 향해 뭔가를 갈구하는 것은 아니다. 내 저편에 있는 ‘다른 것’을 향한 갈구다. 그렇지만 그 ‘다른 것’은 빙글 돌아서 나를 향해 다가올 그런 것이다. 알쏭달쏭하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불현 듯 그런 느낌이 들었다. 

필시 그녀의 머릿속에서 뭔가가 밖으로 나오고 싶어하고 있다. 그런 느낌이다. 중요한 무엇인가가, 그것을 표출할 수 있는 힘과 수단이 일시적으로 그녀 속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그 무엇인가는 벽으로 둘러싸인 그녀 속 어떤 장소에 아무 상처도 입지 않고 온전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녀는 누군가의 손을 잡고 ‘그것이 내 속에 있다’는 것을 조용히 전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언제까지고 내 손가락을 꼭 쥐고 있었다.

“고마워요”하고 내가 말하자 조용히 내 손가락을 놓아주었다.(214~215)


그렇다. 만약 당신이 자아를 잃는다면 그 순간 당신은 당신 자신의 일관된 이야기를 상실해버린다. 그러나 사람은 이야기 없이는 오랫동안 살아갈 수 없다. 이야기라는 것은 당신이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한정된 논리적 제도(또는 제도적 논리)를 초월하고, 타자와의 공시 체험에 중요한 비밀 열쇠이며 안전핀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물론 그냥 ‘이야기’다. ‘이야기’는 논리도 윤리도 철학도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꾸는 꿈이다. 당신은 어쩌면 느끼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은 숨을 쉬는 것과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그 ‘이야기’의 꿈을 꾸고 있다. 그 ‘이야기’ 안에서 당신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존재이다. 당신은 주체인 동시에 객체다. 당신은 종합인 동시에 부분이다. 당신은 실체인 동시에 그림자다. 당신은 이야기를 만드는 ‘메이커’인 동시에 그 이야기를 체험하는 ‘플레이어’다. 우리는 많건 적건 이러한 중층적인 설화성을 지님으로써, 이 세계에서 개체로서 느끼는 고독을 치유해가는 것이다.(709)


솔직한 기분은 ‘반성했다’라기보다는 역시 ‘감응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것은 논리나 선악을 넘어선 극히 자연스러운 마음의 움직임이었다. 

그 자연스러운 감응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그것은 역시 사람들이 말하는 ‘이야기(말할 것도 없이 ’이쪽‘의 이야기다)’ 속에서 샘물처럼 조용히 퐁퐁 솟아오른 것이 아닐까. 소설가인 나는 어떤 의미에서 그런 이야기에 가르침을 받고 어떤 의미로는 치유 받았던 것이다. 

이윽고 나는 모든 판단을 정지하고 말았다. 무엇이 올바르고 무엇이 틀린 것인지,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광기인지, 누구에게 책임이 있고 누구에게 책임이 없는지, 그것은 이 취재에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적어도 최종 판단을 내리는 것은 내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어깨에서 힘을 빼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는 거기에 있는 말의 집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나름대로 몸을 가루로 만들며 ‘또 하나의 이야기’를 자아내는 거미가 되었다. 어두컴컴한 천장 한구석에 있는 이름 없는 거미 말이다. 

특히 고덴마초 역에서 목숨을 잃은 와다 에이지 씨의 유족과, 중증에 시달리며 과거의 기억과 언어를 잃어버리고 지금도 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고 있는 아카시 시즈코씨(가명)를 취재한 후에는, 나의 말이 가지는 가치에 대해 다시 한번 깊고 신중하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골라내는 말은 이 사람들이 맛본 다양한 감정(공포, 절망, 슬픔, 분노, 무감각, 고독, 혼란, 희망......)을 어디까지 생생하게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인터뷰가 끝난 몇 시간 후, 또는 며칠 동안 나는 그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했다.(719~720)


*이 매거진에서 소개하는 책은 서울 은평구 대조동에 위치한 동네 카페 '다-용도실'@da_yongdosil 내 공유 서가 '멈포드의 서재'@mumford_salon 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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