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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jin Park Apr 16. 2019

4월, 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윤리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될 때 <백의 그림자>

가끔 서울의 지도를 펴놓고 사라진 지리를 헤아려 봅니다. 지명은 남아 있어도 지형과 지세가 달라지고, 동네가 통째로 사라진 장소들 말입니다. 한때는 알았던 곳들, 마음이 머물렀거나 기억이 남겨진 곳들이 이미 다른 세상으로 변해버린 것을 보게 되는 순간들도 이젠 익숙합니다.


어려서부터 서울의 변두리 지역을 전전하며 살아온 덕분에 몸 안에 뒷골목 풍경이 새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대학생 때는 낡은 영화관에서 열리는 공짜 시사회를 쫓아다니는 게 일이어서 종로와 을지로, 충무로 거리까지 섭렵했죠. 독립 후에는 싼 월세집을 찾아 재개발 지역을 전전했습니다. 서울이란 저에게 남산타워나 광화문이기 이전에 다닥다닥하게 붙어있는 허름한 집들, 좁고 가파르고 거미줄 같은 길들, 가로등 밑 함부로 버려진 쓰레기를 앞 다투어 뒤적이던 할머니들의 앙상한 어깨, 누가 살까 싶은 고물 잡동사니 좌판, 무언가가 끊임없이 무너지는 소리 같은 것들의 집합이었습니다. 그것들이 딱히 정겹거나 자랑스럽지는 않았으나, 서울의 마천루가 덮고 있는 ‘현실’이었죠.


그러다 보니 제가 살았거나 지나쳐온 곳들이 금세 개발 자본에 의해 ‘슬럼’이라고 불리고, 집집마다 악착스럽게 붉은 ‘X’자가 그어지고, 산사태라도 난 것처럼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고, 그곳에 또 감쪽같이 고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하는 장면을 많이 보았으나, 전전하는 자 특유의 무심함으로 또 금세 잊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소설 <백의 그림자>의 연인들은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야금야금 철거되고 있는 용산 전자상가를 바라보며 말합니다. “은교씨는 슬럼이 무슨 뜻인지 아나요?” “가난하다는 뜻인가요?” “이 부근이 슬럼이래요. 좀 이상하죠.” “나는 슬럼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은 있어도, 여기가 슬럼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요.” 남자는 이곳에 깃든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을 꺼내어 놓습니다. 아버지가 여기서 난로를 팔았는데, 자신은 호객하는 아버지가 부끄러워서 울곤 했고,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혼내다가 그냥 고개를 돌려버렸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가 오래여도 희미해질 기척이 없는 그 심정을 이곳과 떼어놓을 수가 없는데 누군가 슬럼이라고 부르면 뭔가 억울하고…무서워진다고.


이 소설이 묘사하고 있는 철거 직전 용산의 지리는 자꾸 제 몸 속에 있는 오래된 풍경을 일깨웁니다. 미로처럼 좁고 꼬불꼬불한 상가의 골목들을 이리로 돌면 저마다 바쁘게 무언가를 수리하고 있는 기술자, 무엇을 하는지 하염없이 앉아 있는 할머니,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흰소리를 하며 다니는 청년을 만나게 되고, 또 저리로 돌면 할아버지의 전구 가게 오무사가 나옵니다. 빽빽하게 쌓인 전구 사이에서 손님이 찾는 바로 그 무엇을 귀신 같이 찾아내는 할아버지를 묘사하다가 주인공은 문득 생각합니다. ‘할아버지가 죽고 나면 전구는 다 어떻게 되나, 그가 없으면 도대체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누가 알까. 오래되어서 귀한 것을 오래되었다고 모두 버리지는 않을까.‘


이런 사람들의, 거미줄 같이 얽힌 사소한 하루하루가 곧 서울의 한 지층이었을 텐데, 내가 알던 거기에 살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공중으로 증발하지는 않았을 테고, 기댈 수 있는 땅이 가혹하게 좁아지고 말았을 텐데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함과 의아함이 가슴 한켠에서 마른 나뭇잎처럼 바스락니다. 황정은의 소설은 바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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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떻게 되나요.

소년 무재의 부모는 개연적으로, 빚을 집니다.

개연이요?

필연이라고 해도 좋고요.

빚을 지는 것이 어째서 필연이 되나요?

빚을 지지 않고 살 수 있나요.

그런 것 없이 사는 사람도 있잖아요.

글쎄요, 하고 무재씨가 나무뿌리를 잡고 비탈을 내려가느라 잠시 말을 쉬었다가 다시 말했다.

그런 것 없이 사는 사람이라고 자칭하고 다니는 사람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조금 난폭하게 말하자면, 누구의 배도 빌리지 않고 어느 날 숲에서 솟아나 공산품이라고는 일절 사용하지 않고 알몸으로 사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자신은 아무래도 빚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뻔뻔한 거라고 나는 생각해요.

공산품이 나쁜가요?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요, 공산품이란 각종의 물질과 화학 약품을 사용해서 대량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라 여러 가지 사정이 생길 수 있잖아요? 강이 더러워진다든지, 대금이 너무 저렴하게 지불되는 노동력이라든지. 하다못해 양말 한 켤레를 싸게 사도, 그 값싼 물건에 대한 빚이 어딘가에서 발생한다는 이야기예요.(17~18)


오무사라고, 할아버지가 전구를 파는 가게인데요. 전구라고 해서 흔히 사용되는 알전구 같은 것이 아니고, 한 개에 이십 원, 오십 원, 백 원가량 하는, 전자 제품에 들어가는 조그만 전구들이거든요. 오무사에서 이런 전구를 사고 보면 반드시 한 개가 더 들어 있어요. 이십 개를 사면 이십일 개, 사십 개를 사면 사십일 개, 오십 개를 사면 오십일 개, 백 개를 사면 백한 개, 하며 매번 살 때마다 한 개가 더 들어 있는 거예요.

잘못 세는 것은 아닐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요, 하나, 뿐이지만 반드시 하나 더, 가 반복되다 보니 우연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어느 날 물어보았어요. 할아버지가 전구를 세다 말고 나를 빤히 보시더라고요. 뭔가 잘못 물었나 보다, 하면서 긴장하고 있는데 가만히 보니 입을 조금씩 움직이고 계세요. 말하려고 애를 쓰는 것처럼. 그러다 한참 만에 말씀하시길, 가지고 가는 길에 깨질 수도 있고, 불량품도 있을 수 있는데, 오무사 위치가 멀어서 손님더러 왔다 갔다 하지 말라고 한 개를 더 넣어 준다는 것이었어요. 나는 그것을 듣고 뭐랄까, 순정하게 마음이 흔들렸다고나 할까. (...) 오무사의 경우엔, 조그맣고 값싼 하나일 뿐이지만, 귀한 덤을 받는 듯해서, 나는 좋았어요.(94~95)


어린 나이에도 나는 이렇게 호객하는 아버지를 보는 것이 당황스럽고, 사람들이 그가 하는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지나가는 것이 싫어서 종종 울었거든요. 이유도 말하지 않고 우니까 못됐다고 혼도 많이 났지만 나는 그냥 속이 상했을 뿐이었고요. 그런 속을 모르고 혼을 내니까 더 속이 상해서 더 울고 더 혼이 나고, 하다 보면 아버지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있었어요. 그렇게까지 되고 보면 나는 더 울 수가 없어서 아버지 곁에 그냥 서 있었고요. 돌아가신 지가 오래라 그런 기억이란 희미해질 법도 한데 도무지 그렇지가 않아서, 나는 이 부근을 그런 심정과는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는데 슬럼이라느니, 라는 말을 들으니 뭔가 억울해지는 거예요. 차라리 그냥 가난하다면 모를까, 슬럼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치 않은 듯해서 생각을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라고 무재씨는 말했다.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114~115)     


이를테면 뒷집에 홀로 사는 할머니가 종이 박스를 줍는 일로 먹고산다는 것은 애초부터 자연스러운 일일까,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살다가 그러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사정인 걸까, 하고 말이에요. 너무 숱한 것일 뿐, 그게 그다지 자연스럽지는 않은 일이었다고 하면, 본래 허망하다고 하는 것보다 더욱 허망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고요.(144)


*이 매거진에서 소개하는 책은 서울 은평구 대조동에 위치한 동네 카페 '다-용도실'@da_yongdosil 내 공유 서가 '멈포드의 서재'@mumford_salon 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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