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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jin Park Apr 14. 2019

4월,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지 않기 위해

관대함을 잃어갈 때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자네, 윤리를 책으로, 소설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책으로, 소설로 함께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이 질문 때문이었습니다, 이 책을 사게 된 것은. 서점에서 신간 도서를 훑어보다가 들춰본 페이지가 마침 ‘저자의 말’이었고, 그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소고기 수입 결정에 반대하는 촛불 집회가 대규모로 열린 10년 전, 저는 매주 ‘언론고시’를 준비하러 광화문에 위치한 한국언론재단에 다니던 대학원생이었습니다. 학교에서 공부한 바로도, 언론사 지망생 동료들과 토론한 바로도 집회에 참여하는 것이 옳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낮에는 수업 듣느라 밤에는 자소서 쓰느라 바쁘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광화문에 모인 사람들을 지나칠 때마다 시대를 비껴가고 있다는 열패감 같은 것을 느꼈지만 곧 기자가 되어 정의를 실현하는 현장에 있을 것이고, 그때 이 마음의 빚을 갚으리라 다짐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기자를 그만둔 지도 한참 지났고, 당시 뜨거웠던 몇몇 동료들이 10년차 ‘회사원’으로서 써내는 기사들을 발견하고 마음이 서늘해지기도 하는 지금까지도 그때의 열패감은 생생합니다. 그건 아마도 막상 기자가 되고 보니 공부만으로는 미처 이해할 수 없었던 현실이 있었고, 탁상공론만으로는 대적할 수 없는 악습과 부조리가 있었고… 결국 그 모든 것을 끝까지 똑바로 마주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이 시간이 지날수록 가시기는커녕 더해갔기 때문일 겁니다.

언젠가 ‘이야기가 안 된다’는 이유로 무시했던 억울한 사연들, 필요한 만큼만 추려서 기사화했던 어떤 사람들의 인생이 내내 돌덩이처럼 남아있었기에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자 했으나, 어느 때는 내가 쓴 모든 것이 다 거짓말 같았다”는 이기호 작가의 솔직한 고백에 가슴이 출렁거렸던 거겠죠. 기대만큼, 이 소설은 그때 그 억울한 사람들의, 눈물 콧물 훌쩍거리며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함부로 말했나요’를 연신 외치는 듯한 뒷이야기들과 그 사이를 절절매며 돌아다니는 작가의 자기반성으로 가득합니다. 


책 속에서 “때때로 나는 생각한다. 모욕을 당할까봐 모욕을 먼저 느끼며 모욕을 되돌려주는 삶에 대해서. 나는 그게 좀 서글프고 부끄럽다”라는 문장이 튀어나올 때, 어쩌다 자신의 집에 잠깐 얹혀살게 된 여자아이를 가여워하다가 그녀가 학교 폭력 가해자가 되자 “어린 게 염치도 없이”라는 말을 내뱉게 되었다는 소설가 주인공의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는 떳떳하지 않은 비밀을 들킨 듯 흠칫 놀라게 됩니다. 그리고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그 부끄러움마저도 비겁함을 포장하는 의젓한 마음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 복잡해집니다. 그때 작가가 어깨를 툭툭 치며 지나갑니다. “윤리를 책으로, 소설로, 배우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것이 우리가 소설이나 책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이라네.”


이 페이지, 읽어보세요!


때때로 나는 생각한다. 

모욕을 당할까봐 모욕을 먼저 느끼며 모욕을 되돌려주는 삶에 대해서. 

나는 그게 좀 서글프고, 부끄럽다. (33)


나는 왜 자꾸 애꿎은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가? 나는 왜 자꾸 애꿎은 사람들에게 화를 내려 하는가? G시의 작은 아파트 책상 앞에 앉아 나는 자주 그런 생각을 했고, 그러다가 아파트 정문 옆 작은 상가에 있는 호프집으로 나가 술을 마시는 날들이 늘어갔다. 호프집 여주인은 내가 갈 때마다 말하지 않아도 오백 시시 생맥주 한 잔과 소주 한 병을 내왔고, 거기에 다시 천 시시짜리 빈 맥주잔을 내주었다. 나는 천 시시짜리 빈 맥주잔에 맥주와 소주를 섞어 마셨다. 혼자 그걸 다 마시고 나면 적당한 취기가 올랐고, 그러면 아무에게도 화를 내지 않은 상태에서, 한글 파일을 열지 않은 상태로, 잠이 들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 이상한 남자를 만난 것은 바로 그런 나날 중 하루였던 것이다.(75~76)


정희는 자신의 책상에 제일 먼저 남자 아이돌 그룹 사진을 올려놓았고(‘방탄소년단’이라는 그룹인데, 후에 나는 그들을 ‘방탕소년단’이라고 잘못 불렀다가 처음으로 정희에게 한소리 듣기도 했다.) 손거울과 립밤, 로션 순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그 옆쪽에 교과서와 EBS 문제집들을 가지런히 세워두었다. 나는 아내와 함께 방문 앞에 서서 정희가 자신의 짐을 정리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내는 어땠는지 몰라도, 나는 그 순간 마음이 좀 아팠는데, 이제 겨우 만으로 열두 살이 된 소녀가 낯선 곳에 자신의 짐을 푸는 심정이, 그러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으려고 노력하는 그 마음이 어떨까, 상상했기 때문이다. 그건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마음이었다. 더불어 나는 아내의 어린 시절을 다시 짐작해보았다. 아내 또한 내게 말로는 다 할 수 없었던 마음 같은 것들이 있었겠지, 아마 그랬겠지…… 나는 그날 자주 정희의 뒷모습과 옆에 서 있는 아내의 프로필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252~253)


작가로 십오 년 넘게 살아오는 동안 나는 다른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쓰고 또 써왔다. 어수룩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쓸 때도 있었고, 이 세상에 없을 것만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썼지만, 그래도 내가 가장 많이 쓰고자 했던 것은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걸 쓰지 않는다면 작가가 또 무엇을 쓴단 말인가? 나는 그렇게 배웠고, 그런 소설들을 되풀이해서 읽었으며, 주변에 널려 있는 제각각의 고통에 대해서, 그 무게에 대해서, 오랫동안 고민해보고자 노력했다. 그걸 쓰는 과정은 단 한번도 즐겁지 않았다. 고통에 대해서 쓰는 시간들이었으니까…… 어느 땐 나도 모르는 감각이 나도 모르게 찾아와, 쓰고 있던 문장 앞에서 쩔쩔맸던 적도 있었다. 그리고 다시 거기에서 빠져나오려고 일부러 책상 옆에서 팔굽혀펴기 같은 것을 하기도 했다. 작가는 숙련된 배우와도 같아서 고통에 빠진 사람에 대해서 그릴 때도 다음 장면을 먼저 계산해야 하고, 또 목소리 톤도 조절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그게 잘 되지 않아서 고통스러웠던 적이 많았다. 그게 잘 되지 않는 고통…… 어느 땐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고통이란 오직 그것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어쩐지 내가 쓴 모든 것이 다 거짓말 같았다. 누군가의 고통을 이해해서 쓰는 것이 아닌, 누군가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쓰는 글. 나는 그런 글들을 여러 편 써왔다. (264~265)


*이 매거진에서 소개하는 책은 서울 은평구 대조동에 위치한 동네 카페 '다-용도실'@da_yongdosil 내 공유 서가 '멈포드의 서재'@mumford_salon 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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