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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jin Park Apr 11. 2019

4월, 적당한 거리의 우정에 대해

관대함을 잃어갈 때 <거기, 당신?>

어린 나이에 의젓한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고통을 보는 눈이 남다른 사람을 만나면 섣불리 말하기가 어려워 조심스럽습니다. 얼마나 깊은 상처가 그들을 그렇게 길러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상처는 인장처럼, 어떤 사람을 바로 그 사람이게 만들곤 합니다. 우리가 자신에게 가장 솔직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사회적 가면 뒤에 숨겨 두었던 상처를, 고통과 분노와 우울과 무력을 꺼내놓을 때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을 공유한 타인을 사랑하게 되거나, 아예 피하게 되곤 합니다. 나의 취약함을 들켜버렸다는 사실에 극적인 감정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고, 이는 다시 말해 자신의 취약함을 마주하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지요.

윤성희 작가의 소설에는 깊은 상처가 있는 평범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출근 버스에서 빈자리를 두고 나와 신경전을 벌였을 지도, 찜질방 한 켠에서 코를 골고 있어 한번 노려보았을 지도 모를, 특별할 것 없는 인물들입니다. 게다가 지질하고 외골수적인 데가 있는 데가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첫 인상이 가여울지언정 호기심이 일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가 가랑비에 옷 젖듯이, 다가옵니다. 마치 길가에 핀 꽃 색깔이나 내일의 날씨를 일러주는 것 같은, 담담하고 미지근한 작가 특유의 어투 덕분입니다. 뒤틀려 있지도 않고, 심지어 종종 경쾌하게 느껴질 정도로 간단하고 위트 있는 문장들이 리듬감 있게 이어집니다. 그런데 한참 그 흐름을 타고 나아가다 보면 잔잔한 수면 밑에 슬픔과 고독이, 함부로 헤집을 수 없어 보듬어 놓은 상처가 있다는 것을 슬그머니 알게 됩니다. 그들의 지질하고 외골수적인 데가 실은 그 상처를 스스로 다루려는 발버둥이었다는 것도요.


정말 좋은 점은 끝까지 담담하다는 것, 그리고 끝은 따뜻하다는 것입니다. 작가는 상처 입은 인물들이 우연히 만나 서로를 지나치게 가여워하거나 궁금해하지 않은 채, 마주보기보단 나란히 걸어가는 풍경을 그려내는 데 집중합니다. ‘누구나 각자의 상처가 있고 그 상처로 인한 자기 자신을 버티어내는 것은 스스로의 몫이지만, 어쩌다 만난 우리들은 곁을 맴도는 우정으로 조금씩 나아질 수 있다’는 소박한 희망이 노을처럼 이야기를 감싸고 있습니다. 담담하고 따뜻하다는 것이 어쩌면 가장 강한 태도가 아닐까요, 라고 묻는 작가의 낮은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고, 정말이지 한번쯤은 그런 사람이고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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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을 찾으러 갔다 온 사이, 주방장이 도망을 갔다. 주방에 있던 그릇들과, 냉장고에 가득 들어 있던 음식 재료들과, 배달용 오토바이를 가지고 사라졌다. Q는 주방 바닥에 주저앉아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그만 울고 싶을 때까지 울어요! 나는 Q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W가 밖으로 나가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에 냉면 네 그릇이 배달되었다. 이럴 땐 매운 음식을 먹는 게 최고예요. W가 가방에서 매운 소스를 꺼냈다. 맞아요. 슬퍼서 울었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매워서 울었다고 하는 게 덜 쪽팔리잖아요. 고등학생이 냉면을 비비면서 말했다. 빈 주방 바닥에 앉아서 우리는 아주 매운 냉면을 먹었다. W는 특별히 Q의 냉면에 자신의 소스를 듬뿍 넣어주었다. 그때 내 머릿속을 무엇인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바로 이거야! 내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26)


방학이 끝나기 얼마 전이었다. A시에 사는 이모에게 다녀온다고 집을 나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남자는 역에 나가서 새벽에 들어오는 첫 기차를 기다렸다. 역 주변은 C시를 떠나면서 사람들이 내뱉어놓은 한숨들로 마치 안개가 낀 듯 흐릿했다. 공기 속을 떠돌고 있던 우울한 기운이 남자의 몸 속으로 들어왔다. 여름이었는데도 남자는 몸을 부르르 떨어야 했다. 남자는 어머니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그때 알았다. 역 광장에 서서 어머니는 이런 한숨을 내뱉었을 것이다. 남자도 누렇게 뜬 얼굴을 하고 역사를 빠져나오는 사람들 틈에 서서 한숨을 쉬었다. 슬프지 않았다. 가슴에서 메달처럼 환한 무엇인가가 반짝였다. 울면 그것이 녹슬 것만 같았다.(43)


아저씬 손이 왜 그래요?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던 여자아이가 그를 빤히 쳐다보면서 물었다. 아이스크림이 녹아서 아이가 입은 분홍색 원피스를 더럽혔다. 하지만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얘야, 똑바로 걸었는데도 너도 모르게 넘어질 때가 있지 않나?

여자애는 스타킹을 벗어서 무릎에 난 상처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여기요. 지난번에 넘어졌어요.

이것도 그런 상처란다.

그는 빨간색 자전거를 꺼내 아이에게 주었다.

아저씨 선물이다. 한 시간만 타거라.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고.(76)


저 버스를 따라가볼까요?

그가 말했다. 그의 허리를 꽉 잡고, 그녀는 어머니 뱃속에 있었던 여덟 달 동안 얼마나 외로웠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그녀는 가만히 그의 등에 귀를 대보았다. 난 당신의 말을 믿어요. 그의 몸 속에서 그런 말들이 들려왔다.(105)


*이 매거진에서 소개하는 책은 서울 은평구 대조동에 위치한 동네 카페 '다-용도실'@da_yongdosil 내 공유 서가 '멈포드의 서재'@mumford_salon 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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