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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jin Park Apr 30. 2019

4월, 툇마루의 시간들

나란히 앉는 마음을 알고 싶을 때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

한 여성이 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미소년 캐릭터로 가득한 만화책 한 권을 발견합니다. 심심풀이로 읽어볼까 싶어 구입한 그 만화의 장르는 바로 BL. BL은 처음이었지만, 뒷이야기기 너무 궁금했던 여성은 다시 서점을 찾아 마침 BL 매니아였던 여성 직원과 말을 트고, 둘은 만화 이야기를 나누며 조금씩 친해지게 됩니다.


요약해보면 그다지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줄거리입니다만, 두 여성이 ‘할머니’와 ‘여고생’이라면 어떨까요? 남편과 사별 후 서예 교실을 운영하며 혼자 사는 75세 유키와 어쩐지 또래들과는 다른 시간을 사는 것처럼 느끼는 17세 우라라의 이야기라고 생각해보면 말입니다. 겪어온 일들과 가치관, 취향, 일과와 입맛, 하다못해 외모와 체력까지 어디 하나 비슷한 데가 없는 이들을 친구로 ‘만들’겠다니, 작가의 욕심이 너무 과한 것이 아닌지, 흐름이 어색하지 않을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기우에 불과합니다. BL 만화를 계속 읽고 싶은 이유가 소년들의 사랑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는 유키 할머니의 천진한 표정과, 교실을 시끌벅적하게 메우는 다른 여학생들의 수다를 멀리서 바라보며 “나도 저렇게 관심사에 대해 신나게 떠들어 봤으면”이라고 중얼거리는 우라라의 쓸쓸한 표정은 어느새 겹쳐집니다.

유키는 “나 같은 할머니가 문자 보내도 되나?” 라고 재차 묻고, 우라라는 계단을 힘겹게 오르는 유키의 뒷모습을 보며 ‘내가 그리던 친구 모습과는 많이 다르구나’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둘은 조금씩 서로의 일행이 되어 갑니다. 어쩌면 둘 사이에는 ‘만화’밖에 없기 때문에 더욱 담백한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요. 책 표지로도 쓰인, 둘이 유키의 집 툇마루에 앉아 만화를 보는 풍경은 내 삶에 누군가 부담 없이 머물러갈 수 있는 ‘툇마루’ 같은 자리를 마련하고 열어놓는 것이 바로 곁을 내어주는 일이겠구나 생각하게 합니다.  


아직 1권밖에 나오지 않은 이 만화는, 가면 갈수록 더 좋은 이야기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자신이 ‘입덕’하게 된 BL 만화가 대략 1년 반에 1권씩 나온다는 것을 알고, 만약 10년 정도 더 산다면 6권쯤 더 볼 수 있겠구나, 라고 유키가 생각하는 장면처럼 삶의 시간을 의식하게 하는 순간들이 툭툭 튀어나오기 때문입니다. 유키는 남은 날들이 길지 않고, ‘다음’이란 영원히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영차’하는 마음으로 만화를 읽고, 우정을 이어가는 일에 최선을 다하려 합니다. 그 마음이 소소한 장면들을 자꾸 애틋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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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매거진에서 소개하는 책은 서울 은평구 대조동에 위치한 동네 카페 '다-용도실'@da_yongdosil 내 공유 서가 '멈포드의 서재'@mumford_salon 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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