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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jin Park May 19. 2019

5월, 의문하는 일상과 아름다움

상상하고 창작하기 <변형적 아방가르드>

길에서 주은 빈 병과 종이상자를 수납할 수 있는 선반, 그릇 몇 개와 여벌의 옷가지 등 약간의 집기를 정리할 서랍, 밤이 되면 찬 이슬과 행인들의 시선을 피해 그 밑에 발을 뻗고 누울 지붕… 노숙자의 생활의 필요에 알뜰살뜰 맞춘 ‘노숙자 수레’는 수레라기보다 한 채의 ‘집’, 그야말로 삶의 터전처럼 보였습니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이 기발한 구조물은 알고 보니 폴란드 출신 작가 크지슈토프 보디츠코의 ‘미술작품’이었죠. 


이 작품은 1980년대 말 뉴욕에서 공개됐습니다. 당시 뉴욕에서는 도시 개발 정책 때문에 노숙자 수가 급증한 상황이었습니다. 작가는 노숙자와 대화하며 수레를 지었고, 노숙자가 이 작품을 끌고 다님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게” 만들었습니다. 화려한 도시의 전면에 가려 가시화되지 않았던 이들, 이들을 둘러싼 문제를 다른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였죠. 

보디츠코의 작품들은 도시에서 ‘시민’의 경계 바깥으로 밀려나거나, 이방인으로 인식되고 ‘불법’이라는 딱지가 붙는 사람들의 편에 서 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인간으로의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목소리를 빼앗겼거나 정해진, 협소한 틀에 맞춰서만 존재하도록 강요받고 있죠. 


이민자들에게 스스로 이민자임을 드러내면서 당당하게 발화할 수 있도록 돕는 ‘무기’인 ‘외국인 지팡이’, 세계 곳곳 도시의 공공 건축물에 전쟁이나 원폭 등 사회적 참사의 피해자들의 증언 영상을 투사한 ‘기념비 프로젝션’ 등의 작업 등이 대표적입니다. 


폴란드로부터 자유와 민주주의를 찾아 미국과 캐나다로 건너온 이민자로서,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라는 곳에서조차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는 차별과 배제를 더욱 예민하게 포착했을 이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의문하는 디자인”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우리의 삶과 사회의 미심쩍은 문제에 해답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일상적인 윤리적 각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그의 작업 철학에 따른 것입니다. 


“디자이너는 세상에 ‘대해’ 혹은 세상에 ‘관해서’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작업해야 한다”는 작가의 언명은, 그것이 무엇이든, 사람들에게 아름답고 의미 있는 것을 만들고자 하는 이들에게 뚜렷한 가르침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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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노숙인들은 개조하고 전용한 수레를 통해 도시에서 사는 데 필요한 생계 수단을 개발해냈다. ‘쓰레기 줍는 사람들(scavengers)’이라고 알려진 이들은 깡통을 모으고 분류해서 슈퍼마켓에 주고 5센트의 빈병 보증금을 받아 하루하루를 보낸다. 쇼핑 카트와 우편배달 카트를 비롯한 바퀴 달린 수레가 있는데, 낮에는 깡통과 병을 모으러 다닐 때, 밤에는 모은 것들을 보관하는 데 쓰인다. 빈병 법안(The Bottle Bill)이 효력을 발생하기 시작한 1983년 이래 슈퍼마켓 바깥에 빈병 보증금을 회수하려는 노숙인들이 대거 모이는 것은 흔한 일이다. 

애원과 절망에 더 친숙한 입장에 놓인 노숙인들은 자신들이 빼앗긴 영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다. 노숙인들은 그들이 살던 동네가 다른 이들을 위해 다시 만들어지는 상황을 그저 바라보는 관찰자로 축소되었다. 노숙인들의 무주거 상태는 자연 조건인 듯, 원인과 결과가 분리되어 나타나며, 무주거 신분은 도시 공동체의 합법적 일원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쓰레기 줍는 사람들의 활동과-한 기자가 “유쾌하게 장식했다”고 표현했던-늘어나는 그들의 쇼핑 카트는 노숙인에 대한 공공의 인식을 바꾸는 역할을 했다. 목적의식을 가지고 도시를 돌아다니는 노숙인의 움직임은 그들에게 도시 공간의 행위자라는 정체성을 부여한다. 쓰레기 줍는 사람들은 항상 이동하고 있기 때문에 지나쳐 버리거나 침묵하는 비인간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움직이지 않는 인물의 신분이 잠정적이고 모호해 보이는 반면에, 쓰레기 줍는 사람은 도시에서 공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자신이 도시 공동체의 일원임을 보여준다.(32~33)


연구를 제안하고 실행하는 일로서 디자인이, 위험을 감수하고 오늘날의 세계에서 미심쩍은 삶의 조건들을 탐구하고 절합하고 거기에 반응할 때, 그리고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이를 실천할 때, 우리는 의문한다고(interrogative) 말할 수 있다. 의문의/의문을 제기하는 디자인은 자신이 발생시킨 무한한 요구 자체를 질문한다. 그리고 이중의 다급함을 가지고 그런 세계에 반응해야 한다. 먼저 의문의 디자인은 사회적, 심리적, 물리적 상처를 견디고 저항하며 치유하는 과정에서 응급 치료로 기능해야 한다. 다음, 의문의 디자인은 발터 벤야민의 말을 빌리자면 위기 상황을 생산하는 고차원의 윤리적 각성을 높이고 유지할 필요가 있다.여기서 위기 상황이란 예외 상태가 아니라 일상적인 윤리적 조건, 즉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전망을 공고히 하기 위해 현재와 과거를 향한 비평적 판단에 필요한 지속적 동기다.(57)


나는 1977년에 민주주의를 찾아 당시 비민주적이었던 폴란드를 떠났다. 그러나 나에게 구체적인 어떤 것을 제공할 수 있는 레디메이드 혹은 기성품과 같은 민주주의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나는 비민주적 체제에서 우리가 늘 받아온 나쁜 ‘선물/현재(presents)'와는 반대로 민주주의 체제는 좋은 ’선물/현재‘를 줄 거라 잘못 생각했다. 오래지 않아 나는 민주주의를 발견하고 그 ’선물/현재/를 받겠다는 나의 희망이 일종의 유토피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양한 국가와 도시의 새로운 경계들을 횡단하면 할수록 민주주의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누구도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를 통해서는 민주주의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없이는 우리를 위한 민주주의도 있을 수 없다.(285~286)


*이 매거진에서 소개하는 책은 서울 은평구 대조동에 위치한 동네 카페 '다-용도실'@da_yongdosil 내 공유 서가 '멈포드의 서재'@mumford_salon 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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