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쌓아보고 싶을 때 <365日>
‘돌보다’와 ‘돌아보다’가 다른 듯 같은 말임을 곱씹어보곤 합니다, 삶을 돌보기 위해서는 일단 지금 이 자리를 돌아봐야 한다는 것을 실감한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은 눈을 저 멀리 두고, 높은 포부와 부푼 야망으로 달려 나가는 게 최선을 다하는 삶인 줄 알았죠.
우리는 왜 그렇게만 배웠을까요. 헐떡거리는 성공담에 둘러싸여, 발밑의 땅이 흩어지고 무너져버리는 줄도 모르고, 순간순간들이 공상의 미래의 인질이 되어 휘발되는 줄도 모르고.
가끔, 마음이 붕 뜰 때, 일부러 가깝고 단순한 것들에 대해 오래 생각합니다. 그릇이나 옷가지를 정리하고, 서랍을 뒤져보고, 집안일을 하거나 안부를 묻거나 하면서요. 수년간 지니고 있던 편지를 찬찬히 읽거나 지난해 이맘때쯤의 기억을 떠올립니다.
그런 것들의 실감. 형태도 촉감도 없지만 시간이라는 것이 진짜 있구나, 그 시간을 들이쉬고 내쉬고, 쥐고 펴고, 생각과 행위를 맡기었다가 떼었다가 하면서 삶이 흘러가는 거구나, 하는 깨달음은 올 때마다 어쩐지 경탄스럽습니다.
그리고 그 경탄이 쌓이고 쌓여, 곧 결기가 된다고, 그 결기가 어떤 사람을 바로 그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기운이라고, 생각해봅니다.
꼬박 1년간 매일의 간소한 단상을 모아둔 이 책을 후루룩 넘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어떤 단정한 사람이 떠오릅니다. 순간순간이 의미 없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곱게 쓸어 담는 것이 습관인 사람, 손 안의 공기 속에서 계절과 여행과 좋아하는 것, 감각과 다짐을 발견해내는 사람. 특별할 것 없는 화제로도 한참동안 뭉근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듯한 사람.
<365日>의 뒷맛이란, 겸허하면서 묵직하기도 합니다.
1/4
푹푹 잠길 정도로 눈이 내린다는 게 이런 거구나.
주위는 무서울 정도로 조용하다. 눈은 모든 것을 조용히 만들며 소리가 없는 세계로 데리고 간다. 눈을 감으면 상상력이 부풀어 오른다. 그리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무념의 상태가 된다. 언제까지라도 여기에 서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도쿄에 살 때에는 이렇게 눈 덮인 무음의 세계를 알지 못했다. 아무리 단절되어 있어도 어디선가 무언가의 소리가 들려온다.
아이즈 지역에 인연이 닿은 덕분에 매년 겨울 조용한 눈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얼마나 기대되는지 모르겠다.(6)
1/10
북향이라 선선한 작업실에는 작년에 담가둔 저장식품이 놓여 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이 저장용 유리병에 눈길이 간다.
병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까?
락교가 전부 위를 향하고 있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멍하니 바라본다.
우메보시 병에 손을 뻗어 한 개 꺼내서 깨물어본다.
너무나도 신 맛에 눈이 번쩍 뜨였다.(12)
2/17
우리 집에는 강에서 주워 온 돌멩이가 많다.
큼직한 것은 북엔드로, 작은 것은 젓가락 받침으로 사용한다.
이렇게 작아도 가만 들여다보면 저마다 개성이 있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50)
3/13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지은 지 꽤 오래 되었지만, 문손잡이나 천장 조명의 테두리 같은 세세한 부분에 깊은 정취가 배어 있어 마음에 든다.(74)
5/1
이전에 살던 집 정원에는 은방울꽃이 있었다.
매년 봄이 오면 촉촉해진 흙에서 작은 싹이 트고 매일 쑥쑥 자라나 5월에 접어들면 하얗고 가련한 작은 꽃을 피운다.
꽃이 피는 시기가 늘 감탄할 만큼 정확하여 5월이 되었다는 사실을 은방울꽃이 알려준다고 말해도 될 정도다.
정원이 없는 집으로 이사한 후로는 친구가 해마다 정원에 핀 은방울꽃을 가져온다. 덕분에 ‘아, 올해도 은방울꽃의 계절이 돌아왔구나’라고 느낀다.
꽃은 작고 가련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옆으로 가지를 늘려가는 강인함도 보여준다.
은방울꽃처럼 강인한 생명력과 가련한 아름다움을 함께 갖춘 사람이 된다면 멋있겠지.(123)
8/22
흙은 적고 직사광선이 강한 테라스의 가혹한 환경에서도 매년 분홍빛 꽃을 피우는 협죽도.
가로수로 심을 만큼 강인하다고 한다.
이렇게 귀여운 분홍빛과 한여름의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면 기운이 생긴다.(236)
10/17
이곳에 살기 시작하면서 지금껏 변함없이 걸어둔 사진 한 장이 있다.
나도 매일 사진을 바라보지만, 이 사진도 우리 가족을 지켜보고 있겠지.
세 번째 365일이 지나가고 있다.(2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