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을 바꿔보고 싶을 때 <시골에서 농사짓지 않고 사는 법>
우리는 가끔, 어딘가에서의 삶을 꿈꿉니다. 쳇바퀴 같은 일과, 지옥철, 매일매일 따라잡아야 할 것도 충격 받을 일도 지나치게 많고 불안과 공포에 쫓기느라 헐레벌떡인 이 도시에서의 삶이 아닌 진짜 다른 삶, 말입니다.
TV 다큐멘터리, 제주도 게스트하우스, 얼마 전 퇴사했다는 친구의 친구 SNS, 그리고 (망할 놈의) 책에서 우리는 그런 삶들을 발견하고 동경합니다. 아침 햇살에 눈을 뜨고, 자연의 시간을 받아들이고, 작은 텃밭을 가꿔 식탁을 채우며 요가와 명상, 그림 그리기와 요리, 개와 함께 하는 산책으로 보내는 하루의 단편들에 눈을 두기 시작하면, 지금 이 일상이 지리멸렬하다 못해 끔찍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저도 한동안 ‘귀촌병’을 앓았음을 고백합니다. 귀촌한 청년들을 만나보러 전국의 몇몇 지역들을 돌아다니기도 했지요. 모두가 처음에는 “시골이란 그런 곳이 아니다”라며 환상을 깨라는 조언으로 시작해 “그래도 해볼 만한 일”이라는 결론에 이르는 와중에 개구리와의 사투부터 마을과의 관계까지 온갖 지난한 과정을, 한편으로는 자랑스럽게 또 한편으로는 짓궂게(“진짜? 이래도 할래? 이래도?”) 들려주곤 했습니다.
이 책은 그때 지리산 자락에서 만났던 한 분의 이야기입니다. 막상 귀촌하면 무엇을 해먹고 살아야할지 묻던 ‘도시촌년’인 저에게 저자가 쯧쯧, 하는 표정으로 건네준 탈무드 같은 책이었지요. 웹디자이너였던 저자가 덜컥 구례에 정착해 “젊은 사람이 어쩌다…?” 와 “그래서 뭐해서 먹고 산다고?” 라는 질문의 폭격을 버티어내며 무려 4년을 잘 지낸 기록입니다. 심지어 전업 농사도 안 지었다지요!
이 책의 가장 멋진 점은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귀촌한 사람들이 뿌리 깊은 농업 공동체와도 같은 마을에 금세 받아들여지거나, 그 마을을 단박에 이해하고 사랑하기란 쉽지 않은데, 저자는 마을의 언저리에서 끈기 있게 얼쩡거리며, 이해되지 않는 것을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정말 그 땅과 그 땅의 삶들을 있는 그대로 자신의 삶과 이어내려고 진심을 다합니다. 그 매개가 ‘마을 신문’ 이고 이웃이자 ‘절친’인 ‘지평댁’과 ‘대평댁’이고, 풍경이 아닌 사람들입니다.
이 책을 순박한 태도로 포장해 소개해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시골도 이런 저런 사람들이 사는 곳이고, 도시의 상식이 통하지 않거나 언뜻 불합리해 보이거나 거슬리는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나고, 그리고 풍요롭지 않습니다. 모든 귀촌 생활이 <효리네 민박> 같지는, 절대로, 않죠. 그 때문에 저자도 선의로 시작한 일들의 예기치 않은 파장 때문에 후회하기도 하고,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 회의에 휩싸이기도 하고, 복잡합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일들을 한편으로는 유머러스하게, 한편으로는 애잔하게 바라보는 저자의 태도가 결국은 감명을 줍니다. 무엇보다 이곳을 지키며 살아왔거나, 이곳에 와서 어떻게든 살아내려는 사람들의 마음 깊숙이 무엇이 있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마을과 사람들을 풍경으로 바라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청년회 회장의 말을 자꾸 떠올리면서, “분명히 힘든 시간이었을 테지만, 같은 곳에 줄을 서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기에 감내했던” 동료 귀촌자의 묵묵한 표정을 길게 묘사하는데…아, 아! 그 꾸준함이야말로 저자가 찾아낸 ‘다른 삶’의 정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골은 태생적으로, 구조적으로 도시와 다른 방식의 번잡스러움과 간섭이 많은 곳이다. 말이 나의 입술을 빠져나가기도 전인데 내가 하려던 말은 이미 마을 입구에 도착한 경우가 허다하다. 도시는 익명을 보장하지만 이곳은 익명이 존재할 수 없다. 마을에 외지 사람이 등장하면 금세 마을로 소리 없이 전해진다. 이를테면 ‘요즘 젊은 것들은 어른 앞에서 담배를 펴쌓더만’이라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불만이, ‘그 컨테이너 박스 있자녀? 아 그 즐믄 놈이 길 가상에 따악 하니 서서 담배를 펴쌓네’와 같은 구체적 대상을 향한 비난으로 진화한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귀찮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마을과 담을 쌓는 경우이다. 그러면 마을의 그녀들은 친절을 주머니 깊숙한 곳으로 집어넣어버린다. 사생활을 존중하는 방식과 문화가 다른 것이다. 도시에서 온 사람들은 사생활을 침범당했다고 생각하고 이곳의 그녀들은 무시당했다고 생각한다.(51)
요즘으로 보자면 대학원까지는 필수적으로 끝내고 그럴싸한 직장에서 받는 연봉에 비교할 수입은 아니지만 그만큼 지출 또한 비교할 수 없이 약소하니 결과적으로는 도시와 시골에 사는 사람들 중 과연 누가 더 풍족하고 여유로운 인생을 즐기는지는 확언하기 힘들다. 박투하며 항상 날이 선 신경으로 늦게까지 일하는 도시인들의 습관적 조급함으로 바라보면 시골살이는 감당하기 힘든 느려터진 속도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느림이 아니다. 제때를 노리고 풀 속에 웅크리고 있는 살쾡이의 감각 같은 본능적 움직임이 있다. 분명한 것은 시골에서 사는 것이 도시에서 사는 것보다 훨씬 시간적으로 여유롭다는 것이다. 생각의 문제다.(66)
2008년에 이장 마이크로 부음을 세 번 들었나? 때로 시간은 반복적이지만 그 반복은 한 번도 똑같지는 않았다. 부음을 알리는 이장의 마이크는 반복적이지만 그 마이크를 잡는 사람은 바뀔 것이다.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고 허망한 일이기도 하다.
대부분은 도시에서도 살아봤고 실패도 해봤다. 그러고 지금은 제 각각의 사연을 가슴에 묻어두고 고향에서 살고 있다. 오늘 찍은 사진을 보고 다시 ‘그 시절’을 이야기할 때 즈음에는 이 사람들이 마을의 노인회원이 돼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내가 이 마을에 존재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지금 이 마을의 이 순간을 기록하고 사람들과 즐기는 것에 충실하는 것이 나의 소임이다.(114)
청년회 회장의 말이 간혹 생각난다.
“마을과 사람들을 풍경으로 바라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간극을 좁힐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마을신문을 백 번 만든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닐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결국 어느 마을에서건 그 마을의 주민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기록하고 전한다.
그런 상상을 간혹 한다. 이곳을 떠나서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된다면, 그리고 쉽게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는 그 어떤 상황이라면. 내 고향도 아닌, 내 밥벌이가 마련된 곳도 아닌, 단지 이곳이 좋아, 지리산닷컴을 운영한다는 그 작거나 혹은 큰 이유로 내려온 사람이, 심장 가운데 큰 구멍이 난 채 평생을 살아갈 것 같다. 산도 강도 들판도 아닌, 아주 가깝지는 않지만, 제대로 된 대화도 나누어본 적이 없지만, 내 파인더 속으로 들어온 바로 이 사람들이 아주 고통스럽게 그리울 것이다.(141~143)
그에겐 분명히 힘든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혹은 ‘우리’는 우리의 선택이 가치 있는 결정이었다고 믿는다. ‘우리’는 단지 같은 곳에 줄을 서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을 뿐이다. ‘그곳’에 줄을 서는 일은 끝없이 반복되는 영화를 다시 보는 일과 같다. ‘우리’는 더 이상 똑같은 영화를 만들기도, 보기도 싫었을 뿐이다. ‘우리’는 최소한 영화의 결말을 정해두지 않았다. 그 힘들었던 시간들을, 지금도 여전한 그 시간들을 숨길 이유도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지금도, 앞으로도 끊임없이 ‘그곳’을 벗어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다.(210)